1995년 소나기가 간간이 쏟아지던 여름이었다. 나는 청와대 가는 길에서 비를 맞고 있었다. 기습시위를 벌이려 모인 서울지역총학생회연합(서총련) 대학생 300여 명과 함께였다. 전두환·노태우 일당을 비호하고 있던 김영삼 정부에 대한 항의시위였다. 1995년 7월18일 5·18 관련 고소·고발 사건을 수사해온 서울지검 공안1부는 전·노 일당을 포함해, 피고소·고발인 58명 전원에게 ‘공소권 없음’으로 불기소한다고 발표했다. 우리를 더 분노하게 만든 것은 검찰의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논리였다.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은 처벌받지 않았다는 것이다. 현대 문명국가는 한순간에 봉건시대의 왕권국가가 되었다.
시위가 벌어지자 곧 전경들이 학생들을 둘러쌌고 ‘닭장차’ 여러 대가 오더니 학생들을 모두 강제 연행했다. 닭장차에서 내려서 보니 종로경찰서였다. 유치장으로 이동하는데 경찰들이 여학생들에게 폭행에 가까운 손찌검을 하는 것에 격렬하게 항의했던 기억이 난다. 그날 격렬하게 우리가 항의해서였을까, 아니면 인원이 너무 많아서였을까. 유치장 비슷한 곳에 우리를 격리해 감금해놓은 경찰들이 자정이 다 돼서 풀어주었다. 그때만 해도 경미한 도로교통법 위반 시위에 대해서는 입건하지 않고 조기에 훈방하는 일이 많았다(도리어 현 정권은 48시간 가둬놓거나 사사건건 입건하는 등 과잉 대응을 일삼고 있다).
일단 풀어준다니 기뻤다. 그 전에 몇 번 연행돼서 즉심 판결을 받아본 적이 있어서, 판결까지 며칠 갇혀 있는 것이 얼마나 귀찮고 답답한지 알았다. 그런데 당시 경찰서에서 풀려나고보니 수중에 돈이 한푼도 없었다. 옆에 함께 잡혀온 여학생 후배도 돈이 없었다. 시간은 새벽 1시를 향해 가고, 버스는 끊기고, 잠자리가 있는 학교까지 걸어가기엔 너무 멀고…. 난감했다. 그때 ‘마음 좋게’ 생긴 함께 나온 대학생에게 부탁하기로 했다. 기약할 수 있는 거라곤 “‘투쟁 현장’에서 다시 만나서 갚겠노라”였다. ‘마음씨 좋게 생긴’ 대학생은 역시나 마음이 좋아서 한마디 덧붙이지 않고 1만원인지 2만원인지를 빌려주었다. 15년 전이니 지금 돈으로는 3만~5만원은 되겠다. 이름이나 연락처는 모른다. 다만 키가 크고 인상이 좋고 나보다는 후배인 92∼93학번이고, 건국대 학생이었다는 것은 확실히 기억한다.
그 건대생이 고마운 이유는 또 있었다. 함께 풀려난 후배는 내가 호감을 가지고 있던 여자 후배였다. 그 후배 앞에서 위기 상황을 침착하게 헤쳐나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대학 시절 연애를 한 번도 못해본 나에겐 마지막 기회라는 절박함이 있었다. 또 인연이 된다는 것이 이런 건지 우리 학교에서는 나와 그 후배 2명만 잡혀와서 ‘이때다’ 싶었다.
학교로 가는 길에 출출하다며 남대문시장에서 내렸다. 시장의 정감 넘치는 활력은 우리 만남을 더욱 드라마틱하게 해주었다. 그리고 후배와는 사귀는 사이가 되었다.
안타깝게도 이후로 나에게 돈을 빌려준 그분을 ‘투쟁 현장’에서 볼 수는 없었다. 지금이라도 혹시 그때 일을 기억하는 건대생이 있으면 꼭 연락주시라. 돈도 몇 배로 갚고, 밥도 술도 사고 싶다.
안진걸 참여연대 민생희망팀장·등록금넷 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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