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1998년 외환위기 직후 일주일간 노숙자 생활을 체험한 뒤 쓴 ‘버려진 우리의 이웃 노숙자 24시’라는 기획물을 보도한 적이 있다. 1996년 말 입사해 사회부 사건기자로 일한 지 석 달밖에 되지 않은 초년병 기자 시절의 일이다. 당시 사회복지사로 일하던 지금의 처로부터 노숙자들의 실태를 자주 전해들으며 노숙 체험에 도전해볼까 고민하고 있었으나 엄두를 내기 어려웠다. 그러던 차에 당시 사건팀장이 기획회의 시간에 같은 의견을 내놓았고, 결국 ‘해야 할 운명인가’ 하는 생각에 손을 번쩍 들고 말았다. 젊은 혈기에 자원하기는 했으나 취재의 기초도 완전히 습득하지 못한 나에게는 너무나 큰 도전이었다.
“술 마시지 말고 건강을 유지하라”1998년 5월16일 오전 11시. 나는 내가 가진 옷 중 가장 허름한 옷을 꺼내 입고 버스로 서울역에 도착했다. 때마침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서울역 건물 처마 아래와 서부역 통로 등 곳곳에선 대낮부터 노숙자들이 술에 절어들고 있었다. 비를 피해 모여든 탓인지 당시 서울역 1층 대합실은 족히 100명이 넘는 노숙자들로 붐볐다. 노숙자들 대부분은 바지와 잠바를 걸친 꾀죄죄한 차림이었다. 텁수룩한 수염, 헝클어진 머리, 설명하기 힘든 퀴퀴한 냄새들…. 서울역 1층 대합실에 처음 들어섰을 때 느낀 그 막막함과 불안감을 나는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더구나 노숙자들은 언론에 ‘불타는 적개심’을 가지고 있어 신분이 탄로 나지 않도록 계속 극도로 긴장해야 했다.
그런 나에게 당시 만난 노숙자 정아무개씨는 천사가 아니었을까. 정씨는 경기도 안산에서 플라스틱제품 제조업체 사장이었다가 1997년 말 돌아오는 어음을 막지 못하고 부도를 낸 뒤 한 달여 전에 서울역으로 나오게 된 분이었다. 그는 “어린이날 아이들을 데리고 에버랜드에 가기로 한 약속을 못 지켰다”며 눈물 흘리는 평범한 대한민국 가장이었다.
취재 첫날 남대문 지하도 저녁 급식 현장에서 처음 만난 뒤 취재 마지막 날까지 함께 지낸 그는 나의 노숙자 생활 입문 스승이었다. 그는 자신의 노숙 생활 노하우를 성심성의껏 알려주었다. 급식은 언제 어디에서 타는지, ‘삥차’(지하철 무임승차)는 어떻게 하면 안 걸리는지, 노숙자들에게 작은 돈이나마 적선해주는 종교기관이 어디에 있는지, 노숙자 상담은 어떻게 받는지, 밤에 노숙하려면 라면 박스 등으로 어떻게 잠자리를 마련하는지 같은 것 말이다. 그리고 당시 일하던 식당에서 쫓겨난 ‘알바’로 가장한 나를 그는 친삼촌처럼 다독여주었다. 그는 자신도 힘든 처지인데도 “빨리 힘내 이곳을 벗어나라” “힘들더라도 술 마시지 말고 건강을 잘 유지하라”는 등 격려와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취재 마지막 날 “취직이 돼 다른 곳으로 간다”는 이유를 대며 서울역을 떠날 때 그는 내게 호출번호를 가르쳐주며 “언젠가 다시 만나자”며 내 손을 꼭 잡았다. 그때 나는 붉어지는 눈시울을 감추느라 얼른 등을 돌려야 했다.
거짓말을 했기에 감사하단 말도 못하고
정씨의 도움으로 성공적으로 마친 노숙자 체험기는 당시 1면과 3면 등에 크게 보도돼 많은 화제를 불렀고 한국기자협회로부터 ‘이달의 기자상’까지 받았다. 초년병 기자가 그토록 큰 기사를 쓸 수 있었던 데는 정씨의 도움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그에게 제대로 된 감사를 표현할 기회도 갖지 못했다. 더구나 본의는 아니지만 그를 속이기까지 했다. 초년병 기자 시절 가장 큰 도전이었던 취재를 사정도 모른 채 진심 어린 마음으로 도와준 정씨가 당시 나에게는 천사 같은 존재였다. 그때로부터 10여 년이 흘렀지만 지금이라도 그를 만날 수 있다면 깊은 감사와 함께 사과의 뜻을 전하며 머리 숙이고 싶다.
선대인 김광수경제연구소 부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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