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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사태 쟁점] 주인을 잘못 만난 ‘행복한 눈물’

등록 2008-02-01 00:00 수정 2020-05-03 04:25

“에버랜드 창고로 옮겨졌다” 보도 뒤 삼성 비자금 의혹의 핵심이 된 미술품들

▣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 사진 강창광 기자

미술품 특검? 1월 말 나라 안은 수백억대 미술품의 행방을 둘러싼 ‘숨바꼭질’로 떠들썩했다.

최고 재벌인 삼성의 곳간에서 사흘간 비자금 구입 미술품을 찾으려는 특검의 압수수색은 요란했다. 경기도 용인 에버랜드 구내 창고에서 드러난 수천 점의 미술품 컬렉션 앞에서 수사진은 허겁지겁 비디오로 작품들을 찍었다. 성과는 미흡했다. 김용철 변호사가 2002년 홍라희 삼성미술관 리움 관장이 미국 경매에서 비자금으로 샀다고 주장한 구입 목록 작품 30점 중 고갱이로 꼽힌 팝아트 작가 리히텐슈타인의 (715만달러)과 프랭크 스텔라의 (800만달러) 등은 발견되지 않았다. 지난해 11월26일 김 변호사의 폭로가 나온 지 두 달이 지난 시점이다. 창고주 쪽이 진작 낌새를 채고 문제될 작품들은 이미 옮긴 게 당연한 상식 아니겠느냐는 한탄들이 나왔다.

양도소득세·상속세 없어 ‘뒤처리’ 깔끔

조준웅 특검이 1월8일 출범할 당시 미술품 수사는 불법 비자금 조성·관리를 파헤치기 위한 곁가지처럼 비쳤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1월21일 언론 보도 뒤 양상이 급변했다. 는 삼성 쪽이 비자금으로 사들인 등의 주요 고가 미술품들을 삼성미술관 리움에서 용인 창고로 옮겼다는 증언을 보도했다. 한국방송은 용인 수장고 운용 상황 등에 대한 관련 업자들의 증언을 공개했다. 특검은 당장 21일 오후 창고 압수수색을 시작했고, 23일까지 비디오로 일일이 촬영한 미술품 수천 점의 비자금 구입 여부를 확인하는 데 매달렸다. 미술품은 비자금 의혹의 몸통으로 떠올랐다.

특검이 미술품 쪽으로 고삐를 잡은 건 비자금 사용처가 드러나는 가장 유력한 물증이기 때문이다. 차명계좌나 금품수수의 경우 당사자끼리 입을 맞추면 입증이 쉽지 않다. 한 예로 삼성 쪽에 자기 이름을 빌려준 전·현직 그룹 임원들을 상대로 차명계좌를 둘러싼 참고인 조사를 벌였지만, 한결같이 자기네가 동의해줬다는 해명만 돌아왔다. 반면 미술품은 김 변호사가 지난해 11월26일 삼성가 여인들의 해외 경매 비자금 구입 목록을 공개했고, 이후 검찰 특별수사본부는 김 변호사 등의 차명계좌에서 서미갤러리, 국제갤러리 등으로 약 1천억원대의 거액이 흘러나간 정황을 밝혀냈다. 특검의 추가 계좌 추적에서도 차명 의심 계좌에서 국제갤러리로 거액이 흘러나간 사실을 포착했다.

고액의 미술품 구입은 비자금 세탁과 재산 증식에 가장 효율적이며, 뒤탈이 없는 상속 기반이다. 경매 등의 거래에서 구입자 신분에 대한 기밀이 보장될 뿐 아니라, 보유세와 양도소득세도 없다. 시세차익과 투자가치 상승 효과까지 있다. 작품을 상속품으로 자진 신고하지 않는 한, 상속·증여세를 내지 않아도 된다. 재벌 등이 주로 사들이는 고액 미술품은 거래가 공개적으로 노출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이건희 회장이 상속세를 피하려고 아들 이재용 삼성 전무에게 전환사채(CB)를 헐값에 인수하게 해줬다가 시민단체들의 소송으로 곤혹을 치른 사실을 감안하면, 뒤처리 깔끔한 미술품이야말로 좋은 상속 수단이다. 미술관과 재단을 설립하고, 합법 문화사업의 외피도 씌울 수 있다. 실제로 삼성가의 미술 컬렉션은 삼성문화재단에서 관리하지만 컬렉션 일부가 공개된 것을 제외하고, 컬렉션의 세부 구매 내역 등이 공개된 바 없다.

삼성 눈치보여 자문할 전문가 있을까

가장 확실한 물증인 과 은 어디에 숨은 것일까. ‘수도권 곳곳에 있는 삼성의 비밀 창고에 옮겨졌다’ ‘땅에 묻었다’ ‘불태웠다’ 등의 뜬소문만 나돌고 있다. 특검은 1월25일 창고의 미술품 보험계약 업무를 처리해온 삼성화재를 전격 압수수색하고, 홍송원 서미갤러리 대표를 소환 조사했다. 미술품을 운반하는 운송업체들에 대한 탐문도 하고 있다. 특검은 홍라희 관장과 이명희 신세계 회장 등 삼성가 여인들에 대한 소환 조사도 추진 중이지만, 갈 길은 험난하다. 비밀 미술품 창고라고 일부 언론은 명명했지만, 에버랜드 수장고는 주요 고급 미술품의 수장처로 알려져 작품을 대여하려는 다른 미술관 사람들의 출입도 잦았던 곳이다. 창고의 존재 자체가 아니라 구입 과정이 불투명한 컬렉션의 존재를 찾아내는 게 더욱 중요하다는 지적이다. 특검 쪽은 김 변호사가 비자금으로 사들였다고 지목한 미술품 일부를 에버랜드 창고 압수수색 과정에서 찾았다고 밝혔으나, 김 변호사가 말한 목록의 작품과 동일한 것인지는 미지수다. 현대미술가들은 흔히 같은 제목으로 사진, 판화 등에서 숱한 판(에디션)들을 찍는다. 원화의 경우도 조금씩 내용을 고쳐 같은 제목으로 만들기 십상이다. 김 변호사가 폭로한 비자금 구입 미술품 목록의 작품들을 확인하려면, 이런 독특하고 전문적인 작품 제작 방식에 익숙해야 한다. 작가 작품명이 일치해도 서로 다른 그림일 가능성이 있어 정밀한 확인이 필요한 것이다. 당연히 작품의 유파별 특징을 판별할 전문가가 필수적이다. 미술판 최고 권력인 삼성의 비위를 거스르며 특검 수사에 자문해줄 전문가들이 있을까 의문을 표시하는 이들도 있다. 미술품 감식에 대한 전문 능력을 보강하는 것이 수사 진척의 중요한 전제라는 지적이 많다. 삼성 쪽이 재단 컬렉션 목록도 제공하지 않는 등 수사에 미온적이란 점에서 더욱 그렇다.

김용철 변호사의 폭로 두 달 만에 은 단순한 비싼 작품이 아니라 삼성 비자금을 상징하는 정치적·사회적 아이콘이 되어버렸다. 문화 명가와 그늘진 로비로 기업제국을 확장해온 삼성의 양면성을 드러내는 상징물이 된 것이다. 민주노동당과 시민단체들은 삼성 규탄 시위 때마다 을 확대한 플래카드와 피켓을 들고 나온다. 서해안 기름 유출 사고의 피해 주민들도 1월23일 서울역 앞 삼성 규탄 시위에서 비자금 미술품을 팔아 피해보상을 하라고 외쳤다. 은 한국 사회에서 역대 어느 그림보다 강력한 정치·사회적 의미를 부여받게 된 셈이다.

1964년 세코스키의 만화를 본떠 그려진 은 원래 미국 필라델피아의 은퇴 실업가인 로버트 카돈과 그의 부인이 애지중지하던 그림이다. 앤디 워홀 등 팝아티스트를 스타로 만든 세계적인 화랑주 레오 카스텔리의 알선으로 사들인 것이다. 2002년 11월 크리스티 경매 당시 등의 보도를 보면, 카돈 부부는 작품을 사기 위해 직접 리히텐슈타인의 화실로 가서 대화하고 관찰한 끝에 마르지도 않은 작품을 사들였다고 술회하고 있다. 그런 내력을 지닌 작품이 리히텐슈타인 작품 가운데 최고 비싼 값에 서미갤러리에 팔린 뒤 5년여 만에 실종된 것은 아이러니다. 생전 “팝아트는 세상을 내다보는 거울”이라고 자신의 신념을 표출하곤 했던 리히텐슈타인의 말은 을 둘러싼 숨바꼭질을 통해 뚜렷이 입증된 셈이다.

“위신 지키려 묻어두거나 파기할 수도”

명화가 소장자를 잘못 만나 작품의 가치가 묻히고 미술사의 미아가 되는 경우는 종종 있다. 고흐의 말년 걸작인 은 1990년 5월 미국 크리스티 경매에서 당시 사상 최고액인 8250만달러(한화 1070억원)에 일본의 제지회사 소유주에게 팔렸다. 그러나 그가 사업에 실패하고 6년 뒤에 죽자, 그림은 지금껏 종적이 묘연한 상태다. “죽을 때 작품도 화장하고 싶다”고 말했던 소유주는 도쿄의 밀폐 보관실에 그림을 꼭꼭 숨겨놓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삼성가는 소장 사실이 없다고 부인하지만, 을 비롯한 목록의 그림들 또한 애물단지가 되어버렸음이 분명하다. 홍송원씨는 언론 인터뷰를 통해 그림을 보관하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공개 용의가 있다고 했으나 그 뒤 잠적해버렸다. 미술판 쪽에서 홍 대표가 작품을 소장했다고 확신하는 이들은 거의 없다. 미술인 ㄱ씨는 “만약 부정한 방법으로 작품을 사들인 것이 명확할 경우, 위신을 지키기 위해 같은 목록상의 수작들을 영영 묻어두거나 심지어 파기할 수도 있다”며 “미술사의 비극이 생기지 않기를 바랄 뿐”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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