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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기에 대한 맹세, 스리슬쩍 보존하세

등록 2007-04-13 00:00 수정 2020-05-03 04:24

국기법에서 삭제되었으나 행자부 시행령 초안에 그대로 들어가 있어

▣ 남종영 기자 fandg@hani.co.kr
▣ 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대한민국국기법(이하 국기법)에서 ‘국기에 대한 맹세’가 사라졌다. 대통령령인 ‘대한민국 국기규정’을 법률로 만든 국기법은 지난해 거센 존폐 논란이 일었던 국기에 대한 맹세를 법률 조항에서 없앴다. 국기법 제정 날짜는 지난 1월27일. 여섯 달 뒤인 7월27일부터 시행된다.

‘맹세’없는 국기법 12월 국회 통과

하지만 국기에 대한 맹세는 시행령으로 ‘부활’할 조짐이다. 새로 제정된 국기법에 따라 대한민국 국기규정이 폐지되고, 대신 ‘국기법 시행령’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국기법 시행령은 행정자치부가 만들고 있다. 행자부 의정팀 관계자는 “국기법 시행령에 국기에 대한 맹세를 넣을 예정”이라고 말했다.

이렇게 된 연유는 국회의원들이 ‘뜨거운 감자’가 된 국기에 대한 맹세의 존폐 여부 결정권을 행자부에 넘겼기 때문이다. 국기법 담당 상임위원회는 국회 행정자치위원회다. 행자위는 지난해 11월7일 공청회를 열어 전문가의 의견을 수렴하고, 11월28일과 30일 연이어 법안심사소위를 열어 국기법을 심의했다. 국기에 대한 맹세의 존폐·수정 여부를 두고 의견이 엇갈렸지만, 의원들은 결국 ‘국기에 대한 맹세가 현실에 맞지 않으므로, 법률에 넣을 필요는 없다’는 데 공감했다.

이런 공감 속에서 11월30일 행자위 법안심사소위에 수정 법안이 제출됐다. 국기에 대한 경례 실시 방법을 규정하되, 국기에 대한 맹세는 언급하지 않고, 국기법 시행령 등에서 최종 결정하자는 대안이었다. 법안심사소위에 참석한 최양식 행자부 1차관도 “(국기 경례의) 원칙만 법률에서 정하고 구체적인 방법에 관해서는 대통령령으로 위임하는 방법이 적절하다”며 찬성의 뜻을 밝혔다. 국기법 발의자인 홍미영 열린우리당 의원은 “행자부가 시행령을 정하기 전에 공청회 등을 통해 내용이나 방법 등을 정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회의는 이렇게 마무리됐고, ‘국기에 대한 맹세가 없는’ 국기법은 12월22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국기법 6조는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는 때에는 선 채로 국기를 향하여 오른손을 펴서 왼편 가슴에 대고 국기를 주목하거나 거수경례를 한다. 그 밖에 국기에 대한 경례방법 및 절차 등에 관하여 필요한 사항은 대통령령으로 정한다.”

어떤 여론 수렴 작업도 없이

‘뜨거운 감자’는 행자부로 넘어왔다. 행자부는 국기법 시행령(대통령령)에서 국기에 대한 맹세를 넣을 수도 있고 뺄 수도 있고, 바꿀 수도 있다. 하지만 행자부는 여론이 잠잠한 사이 ‘뜨거운 감자’를 건드리지 않고 몰래 넘어가는 방향을 택했다. 의 확인 결과, 행자부는 이미 국기법 시행령 초안을 만들었고, 시행령 안에는 현재의 국기에 대한 맹세가 그대로 들어가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정현규 행자부 의정팀장은 “시행령 초안에 대해 각 부처로부터 의견을 받고 있는 중”이라며 “법제처와 규제개혁심사위원회의 검토를 거친 뒤, 5월께 최종 확정해 입법예고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법안이 통과되고 넉 달 사이 행자부는 어떤 여론 수렴 작업도 벌이지 않았다. 국민을 상대로 한 여론조사나 용역조사조차 없었다. 국기에 대한 맹세의 기원, 존폐 여부 등 종합적인 조사는 여태껏 민간기관에서조차 이뤄진 적이 없다. 전국의 초·중·고생이 1년에도 수없이 마주치는 국기에 대한 맹세를 이렇게 허술하게 끼워넣어도 되는 것일까. 이 문제점을 지적하자 그는 “적정한 시기에 보도자료를 내어 의견을 들어볼 생각”이라며 “여론 수렴에 대해서 좀더 고민할 것”이라고 말했다.

국기에 대한 맹세는 1968년 충남도교육위원회에서 자체적으로 제정·시행한 문안에서 비롯됐다. 애초엔 ‘…조국의 통일과 번영을 위하여 정의와 진실로써 충성을 다할 것을 다짐합니다’였지만, 유신 직전인 1972년 문교부는 여기서 두세 단어를 바꾼 맹세문을 제정해 전국 학생들에게 암송하라고 지시했다. 충남 맹세문의 ‘통일과 번영’은 ‘무궁한 영광’으로, ‘정의와 진실’은 ‘몸과 마음을 바쳐’로 바뀌었다. 의 취재 결과, 현 맹세문은 민관식 전 문교부 장관의 지시로 문교부 장학관이 작성했으며, 김종필 전 총리의 재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서명으로 최종 확정됐다. 국민적인 토론은 고사하고 전문가의 참여도 없었던 단 하루 만의 거사였다.( 592·594호 참고)

또다시 ‘날림’ 처리되는가

국기에 대한 맹세는 또다시 ‘날림’ 처리되는 것일까. 군사독재 시절에 만들어진 왜곡된 ‘충성 주문’이 아무런 검증 없이 2000년대 법률에 안착하려 하고 있다. 의 취재가 이어지자, 황인평 행자부 의정관은 “행자부로서도 다른 양쪽의 의견 때문에 고민하고 있다”며 “신중하게 접근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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