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심적 병역거부 최초 무죄 판결의 의미… ‘다를 수 있는 권리’ 50년 형기를 마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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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2004년 5월21일. 마침내 ‘양심의 자유’가 자유를 얻었다.
이날 서울지법 남부지원 형사6단독 이정렬 판사는 종교적 신념에 따라 군 입대를 거부해 병역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여호와의 증인 신도 정아무개(23·노동)씨 등 3명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병역거부자 처벌조항인 병역법 88조 1항은 ‘정당한 사유’ 없이 입영을 거부하거나 소집에 응하지 않은 자를 처벌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 조항에 근거해 병역거부자들은 처벌을 받아왔다.
하지만 이번 판결은 병역거부자의 양심상의 이유가 정당한 것으로 인정했다. 대한민국 헌정 사상 최초로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의 ‘양심’을 인정한 무죄 판결이었다. 이로써 비로소 법전 속에 갇혀 있던 대한민국 헌법 제19조의 ‘모든 국민은 양심의 자유를 가진다’는 구절이 현실 세계로 석방됐다.
양심의 자유는 ‘정신적 기본권’
한국은 양심 ‘없는’ 사회였다. 양심의 자유는 0.75평 감옥에 갇혀 있었다. 형기는 무려 해방 뒤 50여년이었다. 감옥 밖은 ‘국가안보’ 논리가 지배하는 사회였다. 그 아래에서 1만여명의 병역거부 ‘양심수’가 양산됐고, 수많은 국가보안법 피해자가 생겨났다. 국가안보를 위협하는 위험한 양심은 격리돼 마땅한 것이었다. 대법원은 병역거부자에 대해 “종교의 교리를 내세워 법률이 규정한 병역 의무를 거부하는 것과 같은 이른바 양심상의 결정은 헌법에서 보장한 종교와 양심의 자유에 속하는 것이 아니다”(1992년 9월14일 대법원 판결)라고 판시했다. 이러한 판결은 1969년에도, 85년에도 되풀이됐다.
양심과 사상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오래된 논란에도 국가보안법은 아직 서슬 푸르게 살아 있다. 한국은 90년 유엔 자유권규약(시민적·정치적 권리에 관한 규약)에 가입하고 93년부터 5번이나 유엔인권위원회 이사국을 연임했지만, 유엔 자유권규약의 핵심인 양심과 사상의 자유는 무시됐고 병역거부권 보장을 촉구한 유엔인권위 결의안은 사문화됐다. 그것이 ‘한국적’ 현실이었다.
한국은 양심 개념조차 없는 사회였다. 법률상의 ‘양심’은 ‘선량한 마음’과는 다르다. 헌법재판소는 양심을 “어떤 일의 옳고 그름을 판단함에 있어서 그렇게 행동하지 아니하고는 자신의 인격적 존재가 허물어지고 말 것이라는 강력하고 진지한 마음의 소리”라고 정의했다. 여기에는 “세계관, 인생관, 주의, 신조” 등이 포함된다. 이처럼 양심은 옳은 것을 뜻하는 가치 개념이 아니다. 우리는 저마다 신념과 가치에 따른 ‘양심’을 지니고 있을 뿐이다. 이재승 국민대 법학과 교수는 “양심에 대한 법적인 논쟁의 출발점은 양심의 ‘진리’가 아니라 ‘개인’의 양심이 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양심은 곧 ‘자기 양심’인 것이다. 인간 존재의 기본조건이라는 의미에서 양심의 자유는 ‘정신적 기본권’ ‘최상급의 기본권’이라고 불린다.
한국은 양심의 자유를 지키기 어려운 사회였다. 양심의 자유는 내면에만 머물지 않는다. 양심을 지키는 자유뿐 아니라 양심을 실현하는 자유가 보장돼야 비로소 양심의 자유가 완성된다. 하지만 한국 사회는 법과 제도를 통해 양심의 자유를 유린해왔다. 사상전향서와 준법서약서를 통해 양심을 표명하지 않을 ‘침묵의 자유’를 훼손했다. 총을 들고 싶지 않은 사람에게 입대를 강요했다. 양심에 반하는 행동을 강요당하지 않을 자유를 박탈한 것이다.
충돌의 조화, 대체복무제
병역거부자에 대한 무죄 선고는 이런 현실을 뒤집는 판결이었다. 이것은 양심을 지킬 자유뿐 아니라 양심을 행동에 옮길 자유까지 인정한 최초의 판결이다. 조국 서울대 법대 교수는 라는 책에서 “양심의 자유가… 내면에만 제한되는 것이라면 양심의 자유를 특별히 헌법상의 기본권으로 보장할 이유가 없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따라서 양심의 자유는 “우리가 증오하는 사상을 위한 자유”이다. 의견을 같이하는 사람을 위한 것이라면 굳이 존재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스톤 미국연방대법원 대법관은 양심의 자유에 대해 “다를 수 있는 자유의 실체는 기존 질서의 심장을 건드리는 사안에 대하여 다를 수 있는 권리가 있는지 없는지에 따라 검증된다”고 정의했다.
다를 수 있는 권리가 없는 사회에서 ‘다른’ 양심을 가진 사람들은 희생양이 됐다. 좌익사상범과 병역거부자는 그 대표적 예이다. 한국 사회는 좌익사상범을 희생양으로 반공 체제를 유지해왔다. 병역거부자들은 징병제의 희생양이었다. 소수의 희생양을 통해서 다수의 국민을 통제하는 효과까지 닮은 꼴이었다. 그것이 ‘양심의 자유’가 없는 사회의 자화상이었다. 하지만 민주사회로 향하는 과정에서 희생양의 정치는 한계에 부딪히고 있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의 백승헌 변호사는 “국가보안법이 개인의 자유를 침해함으로써 자유민주주의를 취약하게 만든 것처럼 병역거부자를 처벌함으로써 징병제 자체에 대한 의문을 키우고 있다”고 지적했다.
개인의 양심과 실정법상의 의무가 충돌할 경우, 국가는 이 충돌을 ‘조화’하는 구실을 해야 한다. 예컨대 양심의 자유와 국방의 의무가 충돌하면, 국가는 ‘대체복무제’를 통해 갈등을 조화할 수 있다. 하지만 한국 정부는 병역거부자를 처벌해왔을 뿐 조화의 의무를 지키지 않았다. 언제나 실정법상 ‘합법적’ 양심만이 인정됐다. 이정렬 판사는 판결문을 통해 “국가의 형벌권과 개인의 양심의 자유권이 충돌하는 경우 형벌권이 한발 양보하여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도록 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밝혔다.
아직 갈 길은 멀다
이번 판결은 국가주의 법 적용을 넘어 인권 중심의 법 해석으로 나아간 것으로 평가된다. 민변의 이석태 변호사는 “대체복무제의 입법이 벽에 부딪힌 상황을 사법적극주의로 돌파하려는 시도”라고 평가했다. 김형태 변호사는 무죄 선고를 “해석을 통한 창조”로 요약했다. 양심의 자유에 대한 적극적인 해석을 통해 새로운 판례의 창조로 나아갔다는 것이다.
하지만 아직 양심의 자유가 완전한 자유를 얻은 것은 아니다. 병역거부자에 대한 무죄 판결은 상고심에서 뒤집힐 가능성이 크다. 병무청은 즉각 무죄 선고자들에게 재입대 영장을 보내겠다고 밝혔다. 국가보안법 위반 전력자라는 이유만으로 사생활을 일일이 관할 경찰서에 보고해야 하는 보호관찰제도 폐지되지 않았다. 무엇보다 최근 송두율 교수 재판을 통해 양심의 자유가 지켜지기는커녕 사상검증의 중세가 끝나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국가보안법이 살아 있고 병역거부자가 처벌받는 한 양심의 자유는 완전할 수 없다. 양심의 자유는 근대시민 혁명 이후 민주주의의 핵심이다. 양심의 자유를 획득함으로써 우리는 비로소 복종하는 신민이 아니라 자유로운 시민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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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1월 제345호 기사 “차마 총을 들 수가 없어요”를 통해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 최초로 공론화
2001년 3월 대만의 병역거부권 인정 과정과 대체복무 현장 현지 취재
2001년 9월 최정민 평화인권연대 활동가 등과 함께 터키에서 열린 전쟁저항자인터내셔널(WRI) 연례 세미나 참석 및 취재
2001년 9월 국방부 고등군사법원, 공론화의 영향으로 3년형을 선고받은 병역거부자에게 최초로 2년6개월형 선고
2001년 12월 평화운동가이자 불교신자인 오태양씨 여호와의 증인이 아닌 사람으로는 최초로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 선언, 단독 인터뷰 보도
2002년 초 종교적 병역거부자들 군사법정 대신 민간법정에서 재판받기 시작, 대부분의 병역거부자들이 재입대를 피할 수 있는 법정 최소 형량인 1년6개월을 선고받음
2002년 1월 서울지법 남부지원 박시환 판사가 병역거부자 이경수씨가 신청한 위헌법률심판 제청을 받아들여 병역법 88조 1항에 대한 위헌 여부를 묻는 심판을 헌법재판소에 제청
2002년 2월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권 인정 및 대체복무제도 개선을 위한 연대회의 발족
2003년 3월 한국에서 최초로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 국제회의 개최
2003년 11월 현역 군인인 강철민 이병 이라크 파병반대 병역거부 선언
2004년 5월 서울지법 남부지원 형사6단독 이정렬 판사, 여호와의 증인 병역거부자 3명에게 무죄 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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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심의 자유냐 국방의 의무냐. 병역거부자에 대한 무죄 선고가 나오자 찬반양론이 다시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
반대쪽에는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 병무청, 재향군인회가 삼각 편대를 이루고 있다. 병무청과 재향군인회는 안보 논리로, 한기총은 종교적 이유로 반대하고 있다. 한기총은 여호와의 증인을 이단으로 규정하고 있다. 한기총은 5월21일 발표한 논평을 통해 “여호와의 증인이 집총과 병역을 거부하는 것은 국가와 정부를 사탄의 조직으로 보기 때문”이라며 “미군 감축으로 안보 상황에 대한 국민 불안이 고조되어 있는 시점에서 병역거부를 무죄라고 선고해 더욱 당혹스럽다”고 밝혔다. 병무청도 같은 날 발표한 입장글을 통해 “무죄 선고로 인해 병역을 거부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조성된다면 많은 사람들이 합법적 병역 기피 수단으로 악용할 소지가 다분히 있다”고 우려했다. 재향군인회도 비슷한 내용의 반대 입장을 밝혔다.
이에 반해 새사회연대 등 인권사회단체는 일제히 환영 입장을 밝혔다. 특히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 인권위원회, 불교인권위원회 등이 환영하고 있어 눈길을 끌었다. KNCC 인권위는 “정부 당국은 이번 사법부의 판결을 참고하여 하루속히 대체복무제 실시를 통해 이 땅의 평화를 갈망하는 수많은 젊은이들을 범법자로 내몰지 말기를 촉구한다”고 밝혔다. 병역거부 문제가 공론화되던 초기에 관망의 입장을 취한 종교인권단체가 병역거부자들을 적극 지지하는 입장을 굳힌 것이다.
인터넷에서도 논쟁이 불붙었다.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권 연대회의 홈페이지와 병역거부를 주제로 토론을 벌인 한국방송의 게시판에는 하루 수백개가 넘는 글이 올라왔다. 다수의 네티즌들은 국가 안보와 병역의 형평성 등을 이유로 병역거부에 반대했다. 일부 예비역들은 “병역거부가 양심적이면 군대 갔다온 사람은 비양심적이냐”는 문제를 다시 제기하기도 했다. 한편에서는 소수자 인권 보호 등을 이유로 병역거부를 인정해야 한다는 의견도 팽팽히 맞섰다. 이들 중 일부는 모병제로의 전환을 주장하기도 했다. 몇몇 포털 사이트는 병역거부에 대한 라이브폴을 실시했다. 이 실시한 ‘법원의 병역거부자 무죄 판결에 대한 의견은’에 대한 응답은 ‘어떠한 경우라도 인정하지 말아야’(60.5%), ‘이번 판결처럼 사안별로 허용해야’(18.2%), ‘모두 인정해야’(19.7%), ‘판단유보’(1.6%) 순이었다.
병역거부를 둘러싼 논쟁은 2001년 의 보도로 병역거부가 공론화된 때, 2002년 병역법 88조 1항에 대한 위헌법률심판 제청이 받아들여지던 시기에도 치열하게 벌어졌다. 어느덧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는 우리 사회의 진보와 보수를 가르는 새로운 가늠자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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