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아픈 사람에게 가장 멀리 있는 의료, 끌어당기기 위해
의료가 상품이 되는 시대, 노동자가 치료받지 못하는 현실은 ‘현재진행형’

노동절을 하루 앞둔 2026년 4월30일 오후 서울 종로구 전태일다리에 세워진 전태일 열사 동상 주변으로 한 노동자가 지나가고 있다. 한겨레 김혜윤 기자
전태일의료센터가 동료 시민의 아픈 하루를 함께 지탱하기 위해 ‘일, 낸다 캠페인’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이 캠페인은 몸과 마음을 다친 노동자의 ‘하루치 병원비’(2만1천원)를 매달 선결제하는 기부 연대입니다. 내가 낸 ‘1’(일부/하루/노동)로 누군가의 회복을 돕고, 그가 다시 우리 일상을 든든하게 지켜줍니다.
한겨레21은 ‘나의 1, 당신의 하루’를 매달 다른 필진의 시선을 담은 연속 기고로 전합니다. 일 내는 동료가 되시려면 글 맨 아래 정보무늬를 찍어주세요. _편집자

‘일, 낸다 캠페인’ 참여 정보무늬
1970년 가을, 스물두 살의 전태일은 평화시장 근로조건 실태조사를 진행했다. 조사는 그가 회장을 맡고 있던 삼동친목회를 통해 비밀리에 이루어졌다. 한 해 전 전태일은 ‘바보회’를 만들어 같은 조사를 시도했다가 업주들 사이에서 위험분자로 소문나면서 직장에서 해고당했고, 한동안 평화시장에 발을 붙이지 못했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는 전태일과 동료들이 만들었던 열세 개 문항으로 이루어진 그 설문지를 확인할 수 있다.(‘전태일 평전’ 283~284쪽) 설문지는 한 달에 며칠을 쉬는지, 하루에 몇 시간을 일하는지 묻는다. 전태일은 재단사로서 이 설문에 직접 응답했는데, 첫 질문에 ‘2일’, 다음 질문에 ‘오전 8시부터 오후 10시까지’라고 적었다. 근무시간 다음으로 상세히 측정한 항목은 건강이었다. “건강 상태는?”이라는 짧은 질문에 응답자는 제시된 질병 중 자신의 상태에 해당하는 것을 고르게 되어 있었다. 그 여섯 개의 항목은 ‘A. 신경통, B. 식사를 못한다, C. 신경성 위장병, D. 폐결핵, E. 눈에 이상이 있다, F. 심장병’이었는데, 전태일은 자신이 A, B, C, E를 가지고 있다고 답했다.
이 질문들은 우리가 병원에서 받는 건강검진 문진표의 질문들과 다르다. 질병을 조기에 발견해 치료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인간을 병들게 하는 노동을 고발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에게 평화시장 노동자들의 병든 몸은 ‘인간을 물질화하는 세대’를 보여주는 증거였다. ‘E. 눈에 이상이 있다’ 응답 항목에는 별도의 설명이 붙어 있다. ‘날씨가 좋은 날은 눈을 똑바로 뜨지 못하고 눈을 바로 뜨려면 정상이 아니다.’ 휘날리는 먼지가 끊임없이 눈을 찔러대는, 환기가 안 되는 좁은 공간에서 하루 종일 바느질을 했던 사람이 아니라면 할 수 없는 질문이었다.
조영래 변호사는 이 설문지를 소개하며 “이른바 ‘과학적인’ 조사방법론자들은 이 설문지가 답변을 일정한 방향으로 유도하고 있다고 비판할지 모른다”고 조심스레 말했다. 하지만 산업보건 전공자로서 이 설문지를 보고 있으면, 국민학교를 마치지 못한 젊은이가 일터의 삶을 세상에 알리려 안간힘을 쓴 흔적에 마음이 먹먹해진다.
‘보건소에서 건강진단’을 받은 적이 있는지도 물었다. 당시 근로기준법에 따르면 사용자는 정기적으로 종업원들의 건강진단을 실시할 의무가 있었다. 평화시장에서 5년을 일했지만, 전태일은 건강진단을 받아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1967년 전태일이 시다로 평화시장에 들어와 3년 만에 막 재단사가 되었을 무렵, 함께 일하던 미싱사가 갑자기 피를 토했다. 급하게 돈을 걷어 그를 병원에 데리고 갔지만, 폐병 3기였다. 너무 늦은 것이었다. 어린 여공이 “한번 사는 것처럼 명랑하게 살아보지도 못하고, 캄캄한 절망 속에서 죽어”야 했던 사건은 그의 삶이 바뀌는 계기가 되었다. 전태일은 가난한 이들이 더 많이 아프고 병원과 더 먼 곳에서 살아간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1970년 가을, 지구 반대편에서 줄리언 튜더 하트는 고심하고 있었다. 1952년 의사가 된 그는 영국 런던 빈민가에서 진료를 하다가, 1961년 웨일스 남부의 탄광촌으로 들어갔다. 당시 그 지역 탄광촌은 영국에서 가장 가난하고 위험한 마을 중 하나였다. 한국 평화시장의 미싱사들이 바느질을 하며 원단에서 날리는 섬유 먼지로 면폐증을 얻고 결핵이 겹쳐 피를 토하던 시기, 영국 탄광촌의 광부들은 갱도에서 석탄을 캐고 암반을 뚫을 때 쏟아지는 먼지로 진폐증을 얻어 호흡곤란에 시달렸다. 1931년에서 1948년 사이에 진폐증으로 인해 갱내 노동을 그만두어야 했던 광부가 2만2천 명이 넘었는데, 그중 85%가 웨일스 남부 지역에서 살고 있었다.
학생 때부터 빈곤과 불평등 문제에 관심을 갖고 사회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하트는 병원에 올 수 없는 환자들이 사는 곳으로 찾아 들어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1987년까지 26년 동안 의사로 일했다. 그가 진료를 시작한 글린코르그는 사방이 산으로 막혀 고립된 탄광촌이었고, 여덟 가구를 제외한 마을 전체가 그의 등록 명부에 올라 있었다. 사실상 그 마을의 유일한 의사였다.
마을 주민들은 진료소에 올 수 없거나 오지 않았다. 그는 병원에 앉아 환자를 기다리는 대신에 환자를 찾아 나섰다. 고혈압의 위험성이 널리 알려지기 시작한 때였다. 그는 주민들의 혈압을 관리하기 위해 평소 진료실에 오는 사람의 혈압을 그때그때 재어두고, 끝내 오지 않는 사람은 집으로 직접 찾아갔다. 그렇게 1년 반 동안 환자의 집을 찾아간 횟수가 212번에 달했다. 1970년 8월, 20살에서 64살 사이 주민 912명 가운데 임신 중인 두 사람을 뺀 전원의 혈압을 측정한 논문을 학술지 랜싯에 발표한다.
그 과정에서 하트는 하나의 현상을 목도했다. 가혹한 환경에서 일하는 가장 아픈 사람들이 의료서비스에서 가장 멀리 있었다. 이는 그가 런던 빈민가에서 일할 때부터 거듭 목격해온 현상이었다. 돈이 없고 시간이 없어서, 혹은 자신이 가진 위험을 알지 못해서. 이유가 무엇이건 의료서비스는 그것을 필요로 하는 이들로부터 멀리 있었다. 그는 이 현상에 이름을 붙인 논문 ‘역진료법칙’(The Inverse Care Law)을 1971년 2월 랜싯에 발표한다.
역진료법칙을 숫자로 증명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필요한 통계가 아예 없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는 가능한 데이터를 최대한 모았다. 노동계급이 주로 살아가는 지역에서는 의사의 진료실 중 1945년 이후에 지어진 것이 5%에 불과했지만 중산층 지역에서는 그 비율이 25%에 달했다. 중산층 거주 지역의 의사들은 더 적은 수의 환자를 담당했고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 같은 명문대 출신이 네 배 많았다. 그런데 자신들이 받는 의료서비스에 대해 불만족스럽다고 표현하는 비율은 오히려 중산층이 노동계급의 두 배였다. 중산층에 비해 노동계급의 사람들은 더 열악한 환경에서 진료받으면서도 불만을 표현하지 못했던 것이다. 말하지 않은, 말하지 못한 고통은 어떤 통계에도 잡히지 않았다.
그렇게 근거를 모아, 하트는 논문 초록의 첫 두 문장을 이렇게 적었다. “좋은 의료는 그것을 가장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적게 돌아가는 경향이 있다. 이 역진료법칙은 의료가 시장의 힘에 많이 노출된 곳일수록 더 완전하게 작동하고, 그 노출이 줄어든 곳에서는 덜 작동한다.”
1970년 전태일의 조사에는 시다와 미싱사와 재단사 126명이 응답했다. 전태일은 그 자료를 정리한 진정서를 노동청에 제출했고, 이튿날 신문 사회면 머리기사로 보도된다. 허리도 펼 수 없는 두 평 남짓한 작업장, 먼지 가득한 공간에 열다섯 명씩 몰아넣고 온종일 일을 시켜 폐결핵과 신경성 위장병을 앓는 어린 소녀들. 평화시장의 다락방이 처음으로 세상에 알려진 것이다.
신문 기사가 사회적 이슈가 되자 삼동친목회는 회의를 열어 건의사항을 정리한다. 이듬해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긴장한 노동청과 업주들은 마치 그 요구를 들어줄 것처럼 행동했지만 실제로는 아무것도 수용하지 않았다. 그들이 거절했던 요구사항은 결코 파격적이지 않았다. “건강진단을 받게” 해달라, “전염병이 나돌 때는 시장에서도 꼭 예방주사를 맞을 수 있게” 해달라 같은 것들이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하고 나서도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요구”가 묵살되자, 그는 자신의 몸에 불을 붙였다.
1971년 발표된 하트의 역진료법칙은 전세계에서 널리 인용됐다. 미국이건 인도건 의료가 시장에 맡겨질수록 가난한 사람들이 치료받지 못하는 경우는 늘어났고, 역진료법칙은 그러한 현실을 읽어내는 날카로운 도구였다. 그러나 하트는 그 상황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 법칙이 세상을 해석하는 학술적 도구로만 쓰이고 세상을 바꾸는 데는 쓰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트는 2008년 7월 열린 한 강연에서 이렇게 말했다. “의료가 상품이 되는 만큼, 그것은 샴페인처럼 분배된다. 부자는 잔뜩 갖고, 가난한 사람은 한 방울도 못 갖는다.” 샴페인을 특정 집단만 마신다고 해서 그것을 부당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찾기 어렵다. 사치품이니까. 하트는 의료를 상품으로 여기게 되면 그런 부당한 분배가 상식으로 자리 잡을까봐 우려했다.
2026년이다. ‘전태일 평전’을 다시 읽는다. 책은 여전히 뜨거워 책장을 넘기기 어렵다. 명동 성모병원 장면은 몇 번을 읽어도 숨을 고르게 된다. 근로기준법을 품에 안고 분신한 스물두 살의 아들이 어머니에게 말하는 장면이다. 죽음을 앞두고 전태일이 이소선 여사에게 전하는 이야기는 “어머니, 우리 어머니만은 나를 이해할 수 있지요?”로 시작해서 “어머니, 저를 원망하십니까?”로 끝난다.(334쪽)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전태일은 이 마지막 날의 모습만은 아닐 것이다. 이소선 여사에 따르면 전태일이 재단사가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새벽에야 돌아오는 날이 반복됐다. 어느 날 더는 두고 볼 수 없어 물어보니, 아들은 답했다.
“오다 파출소에서 자고 왔어요. 어머니가 나 집 나올 때 차비 30원을 주잖아요. 시다들이 밤잠을 제대로 못 자서 낮이면 꾸벅꾸벅 졸고, 일은 해야 하는데 점심까지 쫄쫄 굶기에 보다 못해 그 돈으로 풀빵 30개를 사서 여섯 사람에게 나눠주었더니 한 시간 반쯤은 견디더라고요. 그래서 집에 올 때 걸어왔더니 오다가 시간이 늦어서 파출소에 붙잡혔어요.”(113쪽)
동대문 평화시장에서 쌍문동 판잣집까지의 거리는 12㎞에 달한다. 버스비로 풀빵을 사주고 밤늦은 시간 그 거리를 터벅터벅 홀로 걸어오다가 파출소에 잡혀 있는 18살의 전태일을 상상해본다. 인간은 그렇게 살 수도 있는 존재구나. 전태일의료센터를 응원한다.
*전태일에 대한 모든 인용구는 ‘전태일 평전’에서 가져왔습니다.

김승섭 서울대 보건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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