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시30분 대검찰청 1층에서 뵐게요.”
2024년 2월16일, 교육 및 공익적 목적의 법률구조 활동을 하는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공익법률센터 마태영 변호사를 만나 ‘성폭력 피해자를 위한 소송절차 가이드북’ 첫 번째 기획회의를 한 날이다. 성폭력 피해자가 외부 조력 없이 홀로 형사소송절차를 밟을 경우를 상정해 가이드북을 제작하기로 했던 그날을 잊을 수가 없다. 공적 지원을 통해 일반인 성폭력 피해자를 대상으로 무료 배포·게시하는 ‘피해자노트’를 제작하는 것은 10년이 넘는 연대활동의 숙원이었기 때문이다.
2019년 경찰청과 대한변호사협회는 ‘피의자 자기변호노트’를 제작해 전국 경찰서에 배포하고 대한변협 사이트에 게시했다. 이 노트는 수사 과정에서 경험할 수 있는 피의자 대상 인권침해를 최소화하고 피의자가 자기 진술을 점검할 수 있도록 구성됐다. 별개로 시중에는 성폭력 사건 피의자를 위한 도서가 넘쳐났고, 유튜브에는 현직 변호사들이 나와 ‘아청법(아동·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 기소유예’ 등을 내세워 피의자를 위한 각종 정보와 전략을 쏟아냈다. 14만 명이 넘는 회원수를 자랑하는 인터넷 카페에서는 성폭력 가해자들이 모여 수사, 재판 절차에 대해 논의하고 도움을 받고 있었다.
그에 비해 성폭력 피해자를 위한 가이드나 정보 제공은 부족했다. 2011년 한국성폭력상담소가 ‘보통의 경험-성폭력 피해자를 위한 DIY 가이드’을 출간했으나 형사소송절차의 변화를 반영하지 못했다. 한국여성인권진흥원 등 다양한 기관에서 매뉴얼을 제작했지만 기관 종사자를 대상으로 한 것이라 일반인 피해자가 이용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2019년 피해자 통합지원 사회적협동조합에서 ‘피해자 자기보호노트’를 제작하고 경찰이 이를 시범 도입하겠다고 발표했으나 보도자료 배포 수준에 머물렀을 뿐 정작 이 노트가 필요한 피해자들에게는 홍보가 안 됐다. 게다가 노트의 내용이 일반인인 피해자가 이해하기에는 어렵다는 평가도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여러 출판사로부터 ‘피해자 대상 가이드북’ 출간 제의를 받았다. 그러나 공적 지원을 통한 가이드북 제작·배포·게시가 필요하다고 생각해 계속 거절해왔다. 그래서 당시 서울대 공익법률센터 소속이었던 마태영 변호사를 통해 ‘피해자 노트’ 제작을 제안받았을 때 무척 고맙고 반가웠다.
2024년 3월, 첫 회의 때 센터 내 지도 변호사이자 노동·젠더 분야 전문가인 정이량 변호사도 합류했다. 한정된 예산, 복잡한 성폭력 사건의 특성 등을 고려해 가이드북에서 안내할 대상, 범죄, 절차 등을 결정했다. ‘성인-비장애-일반 성폭력(대면·접촉형) 피해자’가 홀로 증거를 수집하고 고소장을 작성해 경찰, 검찰 수사 단계를 거치는 상황을 상정했다. 아동·청소년, 장애인, 이주민 등의 성폭력 사건, 디지털 성폭력 사건, 나아가 형사재판절차 등 다룰 내용은 많았지만 첫 단계라 생각하고 욕심을 눌렀다.
기존에 내가 만든 피해자 대상 매뉴얼(‘성폭력 피해자X의 형사사법절차 따라잡기’ 등)을 전달한 뒤 편집·집필은 변호사가, 나는 범죄 피해자 25명, 일반 시민 20명, 반성폭력 활동가 및 진술분석가·상담심리사 등 관련 전문가 11명, 현직 판사·검사·경찰 11명 등 총 67명에게 작업에 대한 피드백을 받는 일을 맡았다.
2024년 9월 초, 최종 원고를 탈고했다. 마태영 변호사는 피해자들의 피드백을 통해, 가상의 피해자를 기준으로 그 피해자가 피해 직후 물적증거 등을 확보하고 고소장을 작성해 제출하는 과정인 준비 단계를 구체적으로 작성했다. 성폭력상담기관 등에서 강력히 요청한 절차별 팁과 질의응답, 그리고 그 근거 규정도 꼼꼼하게 점검했다. 정이량 변호사가 쓴 ‘죄명찾기 알고리즘’ 챕터는 ‘앱 제작’까지 제안됐지만 예산 문제로 반려됐다.
그러는 동안 마태영 변호사는 대한법률구조공단 서울서부지부로 이직, 피해자 전담 국선변호사로 또다시 험로를 택했다. 정이량 변호사는 센터에서 공익 활동을 지속하고 있다. 나 역시 전국을 돌아다니며 수사, 재판 모니터링 및 시민 대상 교육 등 연대를 이어갔다. 2024년 10월 말 실물 인쇄가 완료되고, 11월5일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피해자노트 파일을 내려받을 수 있는 사이트 주소를 공개하자, 조회수가 폭발적으로 늘었고, 피해자노트 실물에 대한 수요도 급증했다.
11월13일 센터에서 피해자노트 설명회가 열렸다. 그 자리에는 서울대 로스쿨생 등 센터가 익숙한 이들도 있었지만, 성폭력 피해자, 활동가 등 외부 인사들도 참여했다. 정이량 변호사가 진행하고 마태영 변호사가 설명했으며 내가 축사와 질의응답 보조 역할을 했다. 다양한 이야기가 오가던 중 ‘피해자의 스탠스는 어때야 하냐’는 질문을 받고 정색했다. 최근 피의자, 피고인 대상의 법률시장이 포화 상태에 이르자 일부 법인이 피해자 대상으로 ‘장사’를 시작했는데 그 과정에서 부적절한 사례가 계속 보고되고 있던 터라 그 질문은 매우 유의미했다. 피해자노트를 제작하면서 우려했던 것 중 하나는 외부 조력의 필요성을 무시하거나 반대로 외부 조력에 집착하는 피해자들이 생기는 것이었는데, 이 질문은 피해자들이 외부 조력, 전략 등에 매달리는 현실을 반영하기 때문이다.
실제 ‘피해자다움’과 한 치의 오차도 용납하지 않으려는 ‘피해자 진술’ 평가 과정에서 압박받는 피해자들을 대상으로 진술에 개입하거나 피해자다움을 강조하고, 금전적 배상만이 최상의 선택지인 것처럼 전략을 짜는 변호사들이 등장했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피해자들에게 불필요한 비용이 전가되거나 고소 진의를 의심받고, 진술 오염을 우려한 수사기관, 법원으로부터 오히려 진술 신빙성을 인정받지 못하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다는 데 있다. 결과적으로 진술의 유불리를 자의적으로 판단해 진술을 축소, 과장, 왜곡하거나 피해자다움에 집착해 접촉하는 수사관, 법관 등에 스탠스를 맞추려 하는 건 지양해야 하며, 금전을 이용한 피해 회복 역시 피해자의 상태, 상황, 사건 진행 과정 등을 종합적으로 판단해 결정할 필요가 있다.
11월 말에야 피해자노트의 추가인쇄가 마무리됐고, 전국성폭력상담소협의회 등 실물 배송 대상 기관과 단체에는 늦어도 연말에는 배송될 예정이다. 범죄명 알고리즘의 앱 제작, 대면접촉형 일반 성폭력 외에 디지털성폭력 관련 가이드북 제작, 취약한 피해자 혹은 그 조력자(가족, 연대자 등) 대상의 가이드북 제작, 수사 단계 외 형사재판절차 가이드북 제작 등 할 일이 남아 있다. 아무리 쉽게 설명했다 하더라도 여전히 노트의 활용에 어려움을 겪는 이들을 위해 온·오프라인 교육도 진행해야 한다. 그럼에도 이 노트가 사건의 실질적 당사자임에도 형사소송절차에서 배제·소외당하는 피해자들에게 길을 안내하고 같이 고민하는 시작점이 되기를 바란다. 그 어떤 피해자도 2010년의 나처럼 혼자서 정보를 찾아다니며 헤매지 않기를 바란다. 피해자가 혼자가 아니라는 것, 그렇게 두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이들이 있다는 것을 피해자들이 알아주길 바란다. 당신들의 곁에 그림자로, 안내자로 있겠다.
마녀 D 반성폭력 활동가·‘그림자를 이으면 길이 된다’ 저자
*마녀 D는 성폭력 재판이 열리는 전국 법원을 찾아가 지켜보고 기록하고 공유합니다. 3주마다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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