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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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곁이 곁과 만나 ‘나의 이름’ 묻고 답하다

참사 뒤 유가족·생존자·연대자 등을 슬픔과 절망으로 고립시키려는 ‘명령’을 무너뜨리는 이야기를 만들자, 만나자
등록 2024-09-20 22:08 수정 2024-09-26 07:28
2011년 9월7일 ‘노동자의 어머니 이소선 민주사회장’에서 헌화 순서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모습. 박승화 선임기자

2011년 9월7일 ‘노동자의 어머니 이소선 민주사회장’에서 헌화 순서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모습. 박승화 선임기자


“우리는 모두 연결돼 있다.” 불과 얼마 전까지 이 말은 존재의 사회성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연결은 나라는 존재가 그냥 나 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다른 존재들에게 빚지고 살아가는 것임을 깨닫게 하는 말이었다. ‘인드라망’ 그림이 알려주는 것처럼 나는 나를 둘러싼 많은 존재가 자신을 내준 결과로 존재한다. 직접 자신을 내주는 것이 눈에 보이는 존재들부터 보이지 않는 존재까지 거미줄처럼 얽힌 ‘있게 하는’ 은혜 때문에 모든 것은 겨우 존재할 수 있음을 알게 됐다.

너의 이름은? 나의 이름은?

다만 가족이나 친구처럼 연결이 강할 때는 ‘연결됨’을 느끼며 감사하고 미안한 것을 의식·표현하지만 그 연결을 부를 이름이 없을 때는 존재의 빚짐을 잊고 살아간다. 그렇더라도 그 인연은 사라지지 않는다. 세상은 연결로 유지된다. 시공을 초월하여 연결됐던 그 끈은, 그 연결로 생명을 지속하는 세상에서 언젠가 스쳐 지나가는 만남에도 미세하게 흔들리며 서로의 이름을 묻게 한다. 너의 이름은. 신카이 마코토의 애니메이션 제목처럼 ‘너의 이름은’.

물론 때로 적대적으로 이름을 물을 때도 있다. 그 연결이 나의 안전을 위협할 때다. 코로나19 대유행 기간이 대표적이다. 누군가 방심해서 하는 행동 하나가 취약한 사람들에게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끼칠 수도 있다는 사실에 많은 사람이 극도로 조심하며 서로를 경계하고 살았다. 모두가 연결됐다는 것은 끔찍한 사실이었고 세상을 지옥으로 만들었다. 연결은 존재의 적이었고 서로 나의 이름을 감추며 적대적으로 물었다. 너의 이름은?

그러나 우리 모두가 연결돼 있다는 말은 때로는 어떤 이들의 이름을 묻어버린다. 연결 때문에 자기 이름을 잃어버리는 사람들이 있다. 연결이 강할수록, 그리고 그 연결을 감지하게 하는 사건이 강력하고 연결된 존재를 상실한 일일수록, 나에게 너의 이름만 남고 내 이름은 지워지기도 한다. 사회적 재난이나 참사를 당하고 남은 자들이 바로 그들이다.

이들은 자신들이 상실한 ‘너’와 연결된 자로서만 존재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부도덕한 존재가 돼버린다. 상실한 너의 이름을 모질게도 자신의 삶에서 지워버리고 ‘나의 삶’만 살아가려고 하는 자로 말이다. 남들이 그렇게 보기 때문만이 아니다. 자신의 양심에도 마찬가지다. 그렇게 도덕과 양심 때문에 나는 더는 나로 살 수 없고 너를 품은 존재, 심지어는 나를 잃어버린 존재로만 살아야 한다.

사회는 그것이 유가족의 운명이라고 말한다.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 이소선 선생님은 평생을 전태일의 어머니로 불렸다. 그분 스스로가 너무나 훌륭한 노동운동가였지만 그의 노동운동에 대한 헌신은 아들이 전태일이었기에 가능했던 것처럼 아들의 몫으로 돌려졌다. 박종철 열사의 아버지 박정기 선생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분 역시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민주주의 투사였지만 그것은 아들 박종철에 대한 것으로 여겨지며 호칭은 아버지였다.

그렇기에 생존자와 유가족, 그리고 그 곁에 남은 자에게는 두 가지 상처가 있다. 너를 잃은 상처와 나를 잃은 상처. 너를 잃은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나는 언제나 질문할 수밖에 없다. 너를 잃은 내가 아무렇지도 않게 일상을 살아감이 가능한 일인가. 밥을 먹으면 “아이고. 목숨이 모질지. 자식이 죽었는데도 저렇게 밥을 먹는 것을 보면 말이야”라고 말하는 주변의 입방아 때문만은 아니다. 나 스스로가 그렇게 느끼기 때문이다. 너를 잃은 나는 이 일상을 살 자격이 있는가. 이 질문과 상처는 평생 사라지지 않는다.

이 질문은 결국 나를 잃는 상처를 만든다. ‘너 없는 나’를 다른 누구도 아닌 내 양심이 허락하지 못한다. 그렇기에 나는 나로 살아갈 수 없다. 나를 잊어야지만 내 양심이 나를 용서하고 받아들인다. 너를 품은 나로만 살아야 한다. 평생 나는 나로 살아갈 수 없다. 너의 무엇으로 살아야 한다. 이것이 강하면 강할수록 나는 나를 잃어버린다.

자격을 묻는 마음과의 싸움

그 연결을 운명처럼 짊어지고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에게는 내 이름을 묻게(이중적 의미에서, 땅에 묻어버려야 함과 그래서 홀로 물을 수밖에 없게 한다는) 한다. 네 이름을 묻고, 네 이름을 알게 되면, 시공을 초월한 카르마는 해소된다. 카르마가 해소되면 서로를 축복 속에 떠나보낼 수 있다. 서로의 이름을 알기에 망각돼도 되는 인연. 그것이 축복이다. 그러나 내 죽음 이전에 결코 그 망각이 일어나지 않는 관계에서는 평생 나는 ‘나의 이름은’을 삼키며 살아간다.

내 이름을 삼킬 수밖에 없는 이들이 자기 이야기를 시작하면 어떤 이야기가 나올까. 무엇보다 이들은 자기들이 박제당하고 박탈당한 시간을 묻게 된다. 수많은 참사의 생존자와 유가족들은 자신들을 향한 사회의 시선과 질문이 사건 당일에 국한돼 있음을 안다. 그리고 그날을 무한 반복적으로 재생해야지만 그나마 사건이 해결될 수 있다. 시간은 사건을 퇴색시키기에 사회적 주목을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더욱 자극적이고 극한적인 이야기가 나와야 한다는 것도 안다. 망각된 것은 사건들뿐만이 아니다. 그들의 삶이 지속됨을 이 사회는 망각했다는 것을, 이들은 이야기할 것이다.

그리고 삶이 지속됨을 망각한 이 사회에서 그들은 어떤 싸움을 해야 했는지 말할 것이다. 사건의 망각됨과 맞서 싸운 것만이 아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생존자와 유가족은 살아남은 자신들의 슬픔에 대해서만 이야기해야 하고 살아남은 자신들의 정당성에 대해 괴로워하며 일상을 살아갈 자격을 물으며 살아가야 한다. 때로는 이 질문이 너무 지긋지긋해 자기를 알아보는 사람이 전혀 없는 바깥으로 탈출하기도 하지만 이미 내 안에 들어와 있는 질문은 사라지지 않는다.

안에서 밖으로, 밖에서 안으로 간다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다. ‘너’를 상실한 자에게 ‘나’의 일상의 자격을 묻는 그 마음, 그 마음에 들어와 있는 것과 싸워야 한다. 그 마음은 내 마음이지만 그저 내 마음이기만 한 것이 아니다. 내 양심이지만 그저 내 양심이기만 한 것이 아니다. 자격을 묻는 마음과의 싸움은 일상에 대한 자격의 이름으로 생존자와 그 곁에 있는 이들을 옴짝달싹 못하고 ‘너의 이름’에 묶어두고 고립시키려는 명령과의 싸움이다.

이 명령은 남은 이들에게 그들이 머물러야 하는 곁에서 비통해할 것만을 요구한다. 곁에 있는 이들이 ‘고립된 곁’에서 사람을 ‘고립시키는 슬픔’에 매몰되고, 자신이 상실한 것만을 바라보면서, 만날 수 없다는 슬픔과 절망 속에서 자책하며 죽게 하는 것이다. 여기서 곁의 도덕을 강조하며 있어야 할 그 곁에서 꼼짝도 하지 않는 것만을 미화하는 이 명령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다. 곁에 선 이가 다른 곁에 선 이를 만나는 것을 막는 일이다.

곁에 선 이들끼리의 만남을 막는 명령

이 명령은 곁에 선 이들이 만나는 것을 두려워한다. 곁에 선 이들이 만나서 서로 물을 것이기 때문이다. 너의 이름은? 이 물음을 서로에게 던짐으로써 나의 이름을 삼키던 자들은 비로소 대답하게 된다. 나의 이름은. 이런 만남이 일어나면 슬픔과 슬픔이 만나지 못하고 고립돼야지만 작동하는 이 명령이 죽는다. 그렇기에 이 명령은 슬픔과 슬픔이 만나지 못해야 한다. 슬픔은 사람을 고립시켜 일상을 살아가지 못하게 하고 죽음만을 살다가 죽게 해야 한다. 상실만 바라보게 한다. 만날 수 없다는 슬픔과 절망에 빠뜨리는 것이다.

곁에 선 이들의 만남이 있을 때 죽은 이 역시 떠나갈 수 있다. 살아 있는 사람이 죽은 이의 한을 풀어주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야말로 살아 있는 사람의 착각이다. 한을 가진 존재는 죽은 이가 아니라 살아 있는 이다. 죽은 자가 기다리는 것은 살아 있는 자의 한을 풀어주기 위해서다. 곁에 고립된 이는 죽은 자기와의 만남 이외 다른 만남이 없다. 죽은 이는 산 이와의 만남을 지속시켜 그의 삶을 지속시켜야 하기 때문에 떠나지 못한다. 그 곁이 고립에서 나와 자기 이름을 말할 수 있는 다른 만남이 일어날 때 죽은 이는 비로소 떠날 수 있다. 그때 죽은 이는 베레나 카스트의 책 ‘애도’에 나오는 이 말을 할 것이다. “됐다. 이제 네가 나를 다시 보내줘야겠구나.”

삶을 곁에 내버려둬서는 안 된다. 극단적인 경우도 발생하지만 삶과 곁은 강력한 회복탄성력을 가지고 일상을 재건한다. 사건이 발생하면 모든 것이 무너지고 다시 살아감이 불가능해 보이지만 삶은 재건되며 미래는 지속된다.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당연하던 것들이 지속되기도 하며 사건을 겪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전혀 당연하지 않은 것들이 당연해진다. 산다는 것, 그것만큼 당연한 것이 없다. 다만 사건에도 불구하고 당연한 것은 여전히 당연하고 사건이 아니었다면 당연하지 않을 것이 당연해질 뿐이다.

명령이 요구하는 것은 이야기가 여기서 그치는 것이다. 삶과 곁의 찬란한 회복탄력성에 대한 예찬. 생명 예찬. 그러나 이것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으려는 마음. 그 마음에 의해 새로운 이야기가 만들어진다. 이것이 이렇게 당연해도 되는지를 말이다. 이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되는 순간 질문에 부쳐지는 것은 삶이 아니라 그렇게 ‘위대한’ 삶의 회복탄력성에만 모든 것을 맡기는 무책임한 명령이다. 이 명령이 아무리 곁을 미화하고 강조해봤자 그 결과는 곁의 이름으로 사적으로 똘똘 뭉치는 사회 없는 각자도생일 뿐이다.

이 명령을 무너뜨리는 새로운 이야기는, 당연하지 않은 것이 당연해지는 것은 당연하지 않음을 알게 하는 만남을 통해 시작된다. 슬픔의 곁과 또 다른 슬픔의 곁이 만나 서로의 이름을 묻고 자기의 이름을 말할 때 이 명령은 무너진다. 슬픔과 슬픔이 만나고 비탄과 비탄이 만나 슬픔 가운데 만남의 기쁨이 생성하는 것을 명령은 가장 두려워한다. 그때 우리가 사는 세상은 곁이 없는 사회가 아니라 곁만 남은 사회, 아니 곁만 남고 사회가 부재한 세상이라는 것이 폭로되기 때문이다. 우리 삶에 구축돼야 하는 것은 곁이 아니라 그 곁이 곁을 만나 ‘나의 이름’을 답할 수 있는, 만남의 기쁨이 있는 정치공동체로서의 ‘사회’다.

사회 부재의 현실을 소환하는 만남의 전시

지난 학기 재난피해자권리센터 ‘우리함께’와 함께 슬픔과 슬픔이 만나 새로운 이야기가 탄생하는 교실을 실험했다. 슬픈 이름들이 서로 만나 너의 이름을 묻고 슬픔의 곁이 나의 이름을 말하는 이야기를 창작하는 교실을 함께 도모했다. 그 결과를 2024년 9월9일부터 서울 충무로에 있는 재난피해자권리센터에서 ‘암흑을 직시하는 동시대인’이라는 만남의 전시로 개최하고 있다.(전시 정보 참조: https://1661-2014.org/85) 이 전시회를 통해 우리 교실은 당연할 수 없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곁의 회복탄력성에 사람의 운명을 맡겨버리는 무책임한 사회 부재의 현실을 공론으로 소환하려 한다.

‘암흑을 직시하는 동시대인’ 전시 작품의 한 장면. 땡글 작가, 재난피해권리센터 제공

‘암흑을 직시하는 동시대인’ 전시 작품의 한 장면. 땡글 작가, 재난피해권리센터 제공


‘암흑을 직시하는 동시대인’ 전시 작품의 한 장면. 땡글 작가, 재난피해권리센터 제공

‘암흑을 직시하는 동시대인’ 전시 작품의 한 장면. 땡글 작가, 재난피해권리센터 제공


엄기호 사회학자·청강문화산업대학 교수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생겨나는 시대와 사회에 대한 고민을 같이 나눕니다. 격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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