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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잊고 미래로 나아가자” 말이 ‘퇴행’인 이유

너의 슬픔에서 나의 슬픔, 동시대 공통의 운명을 읽어내는 만남과 이야기의 힘
등록 2024-04-27 13:22 수정 2024-05-02 09:18
2024년 1월11일 가습기살균제 참사가 세상에 알려진 지 13년 만에 모든 가해 기업의 형사상 책임을 인정한 판결이 나왔다. 이날 피해자 채경선씨가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 앞에서 판결에 대한 입장을 밝히는 모습. 한겨레 강창광 선임기자

2024년 1월11일 가습기살균제 참사가 세상에 알려진 지 13년 만에 모든 가해 기업의 형사상 책임을 인정한 판결이 나왔다. 이날 피해자 채경선씨가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 앞에서 판결에 대한 입장을 밝히는 모습. 한겨레 강창광 선임기자


“시간이 지났는데 기억이 더 선명해지고 느낌은 더 생생해지더라고요.”

지영(가명)은 2014년 세월호 참사가 벌어졌을 때 중학생이었다. 뉴스에 나온 세월호는 충격적이었지만 그렇다고 아주 슬프거나 바로 내 일이라는 느낌은 없었다. 학교에서 친구들과 세월호에 대해 웅성웅성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지만 아주 가슴 아파하진 않았다. 오히려 세월호 ‘때문에’ 수학여행이나 다른 ‘재밌는’ 활동이 갑자기 취소된 일이 자신과 친구들에게 더 중요했다고 말했다.

‘무너졌다’는 말 듣자 떠오른 그날의 감각

이상했던 것은 세월호 뉴스를 보며 하염없이 울던 엄마 모습이었다. 솔직히 그때는 엄마가 슬퍼하는 모습을 이해하면서도 낯설었다고 한다. 아는 사람들도 아닌데 왜 저렇게 슬퍼하는지 이해되지 않으면서도 뭔가 엄마의 슬픔에는 ‘아는 사람/모르는 사람의 죽음’이라는 구분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어떤 단단한 것이 있다고 느꼈다고 한다. 그리고 그 비슷한 것이 자기 마음에도 있음을 어렴풋하게 느꼈지만 뚜렷하지는 않았고, 그 느낌은 곧 깊숙이 묻혀버렸다.

그러다 그 사라진 줄 알았던 감각이 확 다시 살아 돌아왔다고 한다. 공부하는 자리에서 만난 한 선생이 세월호 사건 당시 길을 걷다가 갑자기 너무 슬퍼 몸이 무너져 그만 주저앉아 울었다는 자기 경험을 이야기하는데, 슬퍼하던 엄마의 얼굴이 삽시간에 떠올랐다. 엄마의 얼굴은 그때 무너져 있었다. ‘무너졌다’는 말은 엄마의 슬픔을 정확하게 포착해 드러내는 말이었다. 그리고 순간 뭔가가 살아났다. 당시 엄마 얼굴을 보면서 자기 마음에도 뭔가 비슷한 것이 있다고 느꼈던 것이 무엇인지, 그 느낌이 확 깨어났다. 그때 자신의 마음도 무너져 있었다.

‘무너졌다’는 말이 10년 전 그날의 감각‘만’ 깨운 것이 아니었다. 지영과 이야기하며 이 말은 지영이 지금 현재를 만나는 말이었음을 알게 됐다. 여러 가지 삶의 어려움을 돌파해나가고자 하며 지영은 자신이 무너지고 있다고 느꼈다. 저 말을 만나는 전후로 공부하면서 자신이 개인적 불운으로만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이 시대를 살아가면 무너지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무너질 수밖에 없는 삶, 무너질 수밖에 없는 사회.

그러자 세월호와 다른 사회적 참사를 진심으로 애도하게 됐다. 이유와 원인은 다 달랐지만 그 전체를 관통하는 것은 너와 나의 차이를 가로지르며 계속해서 반복되는, 무너질 수밖에 없는 삶을 살아가는 이 시대 공통의 운명에 대한 연민이었다. 지영에게 애도를 가능하게 한 것은 ‘우리, 공통의 운명’이라는 시대 인식이었다. ‘무너졌다’는 말이 그 시대 인식을 가능하게 했다. 그 말을 최초로 한 선생과의 만남은 무너진 이야기와의 만남이었다. 현재의 이야기를 만날수록 그날의 감각은 더 생생해지고 기억(엄마의 얼굴과 자신의 느낌)은 더 선명해졌다.

지영의 이야기는 기억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잘 이야기해준다. 기억한다는 것은 퇴색할 수밖에 없는 과거의 감각과 기억을 부여잡는 행위가 아니다. 사실 그렇게 부여잡는다고 잡히지도 않는다. 기억과 감각은 시간이 가면 퇴색하기 마련이다. 반대로 기억한다는 것은 현재를 깨닫는 행위다. 그 사건이 아니었다면 보지 못하고 느끼지 못했을 현재의 ‘섬뜩함’을 깨닫게 하는 것이 기억이다. ‘무너진다’는 것은 그날 과거의 느낌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현재 상태다. 이 현재 상태를 볼 수 있게 하기 때문에 과거(의 느낌)는 기억으로 생생하게 살아난다. 인간은 현재를 직시하며 과거를 일깨운다. 되살아난 감각은 현재를 다시 각성하게 한다.

과거에 사로잡히는 퇴행 막으려면

물론 이 과정에서 기억한다는 말에 퇴행이 일어나기 쉽다. 현재를 직시할 때 과거가 깨어나는 것인데 반대로 과거의 눈으로 현재를 보는 것이다. 이것은 현재가 과거와 다르지 않다는 점만 강조하면서 현재가 아닌 과거에 사로잡혀 버린다. 그날의 감각이 퇴색하는 것을 안타까워하고 붙잡으려고만 하는 퇴행이 일어나는 것이다. 여기서는 ‘무너졌다’와 같이 그날에 대한 이야기가 현재를 만나게 하는 언어가 생겨나지 않는다. 나아가 ‘무너졌다’는 말도 그날의 감각이 퇴색되고 있다고 다른 사람을 꾸짖는 도덕적 질타의 언어가 되어 사람을 숨 막히게 할 뿐이다. 이런 분위기에 사람들은 반발하게 되고 “과거를 잊고 미래로 나아가자”는 말이 주도권을 갖게 된다. 기억에 대한 사회의 퇴행이다.

이 퇴행을 막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만남이며 만남에 대한 성찰이다. “내가 먹는 것이 곧 나”라는 말을 빌린다면 “내가 만나는 만남이 곧 나”이며 “그 만남에서 만들어지는 말/이야기가 곧 나”다. 내가 만나는 만남에서 어떤 이야기가 오가며 어떤 말이 만들어지는지 살펴보면 지금 내가 과거를 어떻게 기억하고, 그 기억은 어떤 감각을 불러오며, 그 감각은 현재를 어떻게 각성하거나 마비시키는지 알 수 있다. 마찬가지로 지금 내 만남은 현재를 어떻게 감각하고 인식하며 그것은 과거를 어떤 감각으로 기억하게 하는지를 살펴볼 수 있다. 만남이 곧 나인 것이다.

어떤 만남인가? 철학자 김상봉이라면 ‘슬픔의 만남’이라고 할 것이다. 그가 말하는 것처럼 인간에게 만남은 사람이 주체가 될 수 있는 전제이기도 하고 과제이기도 하다. 만남이 없으면 주체가 될 수 없으며 만남은 주체가 되기 위한 과제이기도 하다. 그 만남 중에서 사람을 주체로 각성시키는 만남이 슬픔의 만남이다. 과거로 무너지는 슬픔이 아니라 지영이 만난 ‘무너진다’는 말처럼 현재를 각성하는 주체로 일으켜 세우는 슬픔 말이다. 그래야 우리는 ‘만남의 총체’로서 세계라는 ‘우리, 공동의 집’을 지을 수 있다.

집을 짓기 위해서는 집에 대한 감각이 있어야 하고 집에 대해 알아야 한다. 근대 사회는 집이 없는 사람에게도 집에 대한 감각/인식을 가질 수 있게 하는 상당히 좋은 도구를 알고 보편화했다. 책이다. 물론 구전되는 이야기도 그 자체로 훌륭한 집이며 집에 대한 감각/인식을 키울 수 있지만, 책은 시간과 공간의 한계를 넘어 훨씬 더 정교하게 지어진 언어/이야기의 집이며, 집에 대한 감각을 키울 수 있는 장치다. 더구나 책의 보편화가 인간세계에 끼친 가장 큰 영향은, 사람이 세상 모든 것을 책으로 여기며 그것들을 읽음으로써 서로 관계 맺을 수 있다는 것이다.

(나아가 이야기/책은 세계라는 공동의 집을 지을 수 있는 주체로 사람을 일으키는 슬픔을 만나는 언어의 집이다. 책은 그저 글/언어를 모아놓은 창고가 아니라 언어로 지어진 집이다. 언어를 쌓아두는 것이 아니라 지어야 책이다. 그렇기에 책을 읽을 때 우리는 집에 대한 감각을 갖게 된다. 한두 마디 좋은 말만 만나는 것이 아니라 그 말로 집은 어떻게 지어지는지에 대한 감각을 갖게 된다. 이것은 책이 아닌 글만 봐서는 절대 생겨나지 않는 감각이다.)

서로를 책으로 아끼는 관계의 기쁨

지영이 만난 ‘무너진다’는 말도 우연히 한 번에 사람을 각성시킨 화두 같은 말처럼 보이지만(실제로 그런 말들이 있으며 그 말들의 가치를 폄훼해서는 안 된다) 사실은 책 안에 있는 말이라고 봐야 한다. 지영은 자신이 그 선생과 정말 ‘공부’를 했다고 한다. 지영이 전하는 그 선생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는 지영의 삶, 지영의 이야기를 ‘읽어야 하는’ 책으로 여겼다. 허투루 ‘듣고’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뛰어들어 깊이 있게 ‘읽어’야지만 알 수 있는 의미가 담긴 책으로 지영의 이야기를 들었다. 지영 개인의 불운으로 가득 찬 특이한 이야기가 아니라 그 안에 동시대 보편적 운명이 담긴 이야기로 지영의 이야기를 읽고 해석했다.

지영에게도 그 선생의 이야기는 책과 같았다. 지영은 선생의 이야기를 한 번에 알아듣는 경우가 많지 않았다. 처음 들으면 느낌이 있기는 하지만 그게 어떤 것인지 명확하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그래서 다시 ‘읽어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그래서 지영은 선생과 대화를 나누면서 “잠깐만요. 다시 한번 생각해볼게요.” “한번 읽어보고 말씀드릴게요.” “한 번에 이해가 안 돼 몇 번 읽는다고 시간이 좀 걸렸어요”라는 말을 즐겨 하게 됐다고 한다. 서로의 말을 읽어야 하는 것으로, 책처럼 여긴 것이다.

서로를 책과 같이 여기는 관계처럼 기쁜 관계가 있을까? 아무리 엉성해 보이는 삶이더라도 서로의 삶이 동시대에 대해 아직 들어보지 못한 이야기를 담은 잘 짜인 책이라고 여기는 관계 말이다. 그 이야기를 읽음으로써 동시대의 보편적 운명에 대한 깨달음에 도달하게 하는 그런 의미로 충만한 책이라고 여기는 관계 말이다. 한쪽이 다른 한쪽을 일방적으로 그렇게 여긴다면 ‘대상화’라고 하겠지만 서로가 기꺼이 서로를 텍스트로 내어주고 읽는 관계라면 가장 슬픈 이야기를 할 때조차 더할 나위 없이 기쁘지 않겠는가? 이것이 ‘무너졌다’는 이야기조차 서로를 슬픔으로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 주체로 일으키는 ‘슬픔의 만남’이 아닐까 한다.

이 이야기를 들려준 지영을 다시 만난 것은 피해자권리센터와 함께 진행하고 있는 ‘참사/애도와 서사’ 수업에서였다. 이미 졸업했지만 지영은 참사/애도의 당사자들과 만나는 수업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시간을 내어 학교에 왔다. 그날은 가습기살균제 참사 피해자인 채경선씨가 역시 같은 피해자인 딸과 함께 강의했다. 강의를 듣는 내내 지영은 슬픔에 눈물을 훔쳤다. 강의가 끝나고 보니 눈가가 빨개져 있었다. “너무 좋았어요.”

다음날 지영은 재학생 누구보다 빠르게 강의를 들으며 생각했던 것을 작품 밑그림으로 그려 보내왔다. 처음 이런 이야기를 듣는 사람이라면 피해자 당사자와 그들의 고통, 슬픔에 대해 이야기한다. 조금 더 나가면 세상에 대한 분노를 표출한다. 그러나 지영은 그 슬픔이 어떻게 퇴색돼가던 자신의 슬픔을 현재의 감각으로 생생하게 각성시킨 만남으로 ‘읽어야’ 하는지를 ‘이야기’하는 작품의 스케치를 그려서 보내왔다.

그 스케치를 ‘읽고’ 지영에게 전화했다. 스케치를 보며 나는 어떤 슬픔을 다시 만났고 그 슬픔은 가르치는 자로서 나에게 동시대의 보편적 운명에 대해 어떤 것을 각성시켰는지 말했다. 서로에게 책과 같은 관계가 되는 것이 기술적인 면을 ‘코치’하지 않더라도(물론 이 기술적인 코치를 폄훼해서는 안 된다. 전문인으로 사람이 성장하는 데 이 부분은 매우 중요하다) 서로 배우며 성장을 도모하는 가장 큰 동기이자 힘일 것이라고 확신한다.

모두를 책으로 여긴, 세상의 책이었던 선생님

내가 하는 말과 글을 그렇게 책으로 여기며 읽어주던 분이 계시다. 그분은 나뿐만 아니라 자신이 만나는 모든 사람과 서로에게 책이 되는 관계를 추구하셨다. 나는 그분에게서 서로를 슬픔의 책으로 여기는 것이 어떻게 사람을 살게 하는지를 배웠다. 부족하지만 선생님처럼 누군가에게 책이 되고 누구든 책으로 대하는 마음을 잊지 않도록 애쓰는 삶을 살겠다고 다짐한다. 모두를 책으로 여기며 세상의 책이었던 홍세화 선생님의 명복을 빕니다.

엄기호 사회학자·청강문화산업대학 교수

*엄기호의 이야기 사회학: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생겨나는 시대와 사회에 대한 고민을 같이 나눕니다. 격주 연재.

홍세화 선생이 2024년 4월18일 별세했다. 이날 빈소가 마련된 서울 서대문구 신촌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의 모습. 한겨레 김경호 선임기자

홍세화 선생이 2024년 4월18일 별세했다. 이날 빈소가 마련된 서울 서대문구 신촌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의 모습. 한겨레 김경호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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