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우리는 과학소설에서 읽었던 인공지능이 일상 깊숙이 들어온 시대에 살게 됐다. 우리는 얼마 전까지도 불가능하다고 여겼던 많은 기술 진보를 실시간으로 목격하고 있다. 당장 나부터 학교에서 인공지능의 파급효과를 실감 중이다. 2023년부터 수업 시간에 학생들이 제출한 글쓰기 과제에서 이전과 달리 거의 편차가 드러나지 않아서 놀랐다. 학생들 수준이 갑자기 평균적으로 높아졌을 리는 없고, 챗봇을 활용했기에 가능했다고 짐작할 수 있었다. 특히 영어 글쓰기를 과제로 내주면 이런 “평준화”는 더 심했다. 생성형 인공지능 챗봇을 이용해 작성한 영문에 특정 단어나 표현이 빈번하게 등장하는 것은 이제 잘 알려진 사실이다.
학생들 과제만 그런가. 학술논문도 마찬가지다. 논문 심사를 해보면 비슷비슷한 논의와 표현이 예전보다 부쩍 많아졌다. 심증은 가지만 증명할 방법이 없다. 모두가 모두를 의심하는 상황이다. 물론 이런 이유로 챗봇을 비롯해 인공지능을 교육에서 퇴출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실제로 챗봇을 사용하지 못하게 규제하는 학교도 생겼다. 그러나 대부분은 챗봇 사용을 허락한다. 사용 자체를 엄격하게 제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공존할 방법을 찾는 수밖에 없다는 것이 결론이다. 문제는 어떻게 공존할지 누구도 뚜렷한 가이드라인을 제시하지 못하는 현실이다.
인공지능이 창작이나 교육 과정에 들어옴으로써 여러 문제가 새롭게 대두했지만, 이 난제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진지하게 논의하는 모습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왜 그럴까.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인공지능 기술을 도구 정도로 생각해서 그런 것은 아닐까. 그러나 인공지능, 더 나아가서 기술은 결코 도구가 아니다. 도구라기보다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 자체를 좌지우지하는 존재 양식이다. 돌도끼는 그냥 쓸모 있는 도구만이 아니라 상상과 노동의 산물이다.
인간이 기술을 창안하고 활용하려면 상상과 노동이 필요하다. 노동은 사자가 영양을 사냥하거나 소가 풀을 뜯는 행위와 달리 상상을 현실로 이끌어낼 수 있는 객관화 과정이다. 이런 의미에서 인공지능은 우리의 노동을 바꾸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인공지능이 기존 일자리를 없앤다거나 새로운 일자리를 만들어낸다는 말은 이처럼 이 기술의 활용과 노동이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뜻이다. 우리 자리를 기계가 대신하는 차원을 넘어 노동에 대한 개념 자체를 바꾼다고 봐야 한다.
인공지능 사용 문제는 결국 “양심”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현재는 개인 선택에 맡겨두는 것 외엔 뾰족한 수가 없다. 유럽은 개발과 사용을 제한하는 규제를 만들었고 저작권과 관련한 여러 법령을 정비하는 중이다. 그러나 이런 유럽의 선택이 좋은 결과를 낳으리라고 장담하기도 어렵다. 최근 방문한 홍콩대학의 경우는 적극적으로 인공지능 사용을 권장하고 있었다. 향후 산업구조가 인공지능 중심으로 재편된다면 학생들에게 챗봇 사용을 제한하는 것이 더 나은 미래를 위한 선택이라고 확신하기 쉽지 않다는 논리였다.
앞서 언급했듯이, 학생들이 챗봇을 사용하는 것 자체를 막을 방법은 없다. 챗봇을 사용하면 낙제 처리한다고 미리 공지해도 누군가는 챗봇을 몰래 사용해서 과제를 제출할 수 있다. 양심적인 학생들은 주저하겠지만 이들 역시 부득이한 사정이 생겨서 챗봇에 의존할 수도 있다. 이제 과거처럼 에세이를 제출해서 평가받는 방식은 사실상 엄정성의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다. 어떤 농담처럼 인공지능으로 에세이를 작성해 제출하고 인공지능으로 평가하면 모두가 행복한 자동화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이 자동화는 교육의 원래 목적과 무관한 인공지능 자체의 완성일 뿐이다.
사실 문제는 학생들이 인공지능을 활용한다는 것이 아니라 의미 없는 과제를 제출한다는 것이다. 인공지능 이전에도 이런 문제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짜깁기해서 제출한 책이나 논문의 표절을 잡아내는 소프트웨어가 있을 정도였다. 기술의 발달은 근대 이후 형성된 독창성을 위협하고 있다. 이 때문에 이런 문제는 비단 한국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고등교육기관에서 표절 기술은 언제나 골칫거리였다. 기술 발전은 누구에게나 특정 사물에 대한 접근성을 높인다. 애플 컴퓨터의 아이튠은 사실상 음반 편집 능력을 대중화했다. 개러지밴드 역시 마찬가지다. 이 앱을 사용하면 간단한 작곡과 팟캐스트 제작을 할 수 있다. 유튜브는 어떤가. 스튜디오를 이용하면 지상파 방송사 못지않은 방송을 할 수 있다.
인공지능 발달도 비슷한 방식으로 전문적 능력의 범용화를 초래할 것이다. 이런 능력의 평준화 자체를 나쁘다고 말할 수는 없다. 다만 이렇게 인공지능을 활용한 능력의 확대가 특정한 가치와 충돌할 때 문제가 발생한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챗봇을 활용해 교육 과정에서 좀더 높은 효율을 추구하는 것이 나쁘다고 볼 수는 없다. 다만 그 효율은 남들보다 노력을 덜 하고 더 나은 결과를 얻고자 할 때 발생한다. 이때 더 나은 결과란 무엇일까. 과거보다 효율성을 높여 목표를 달성하는 것은 생산성을 높이는 일이다. 그러나 교육에서 이 생산성이란 다른 분야의 생산성과 다를 수밖에 없다. 그리고 교육이기 때문에 인공지능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요소도 있다.
인공지능 때문에 대학 교육에서 특히 인문학 관련 수업의 평가 방식을 바꿔야 한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 됐다. 인문학의 고유 영역이라 생각했던 많은 부분이 변화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했다. 자필로 논술 시험을 본다거나 개별 인터뷰를 진행하는 복고 경향도 생겼다. 한마디로 모든 평가가 “질적”으로 바뀌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변화의 숨은 의미가 단순 작업은 인공지능에 맡기고 복잡하고 창의적인 작업을 인간이 하면 된다는 뜻이 아니다. 인공지능의 선구자 중 한 명인 마빈 민스키의 지적처럼 오히려 인공지능이 하지 못하는 일은 인간에게 단순한 일이다. 인간에게 쉬운 일일수록 인공지능에는 어렵다. 이런 인공지능의 역설이 향후 노동구조의 변화와 맞물려 있다.
이런 역설로 인해 인공지능으로 대체 불가능한 직업은 의사나 변호사가 아니라 종교인이나 택배 배달 기사이다. 오히려 단순 노동을 수행하는 이들은 건재할 것이다. 이 말은 주요한 인간의 노동이 인공지능을 보충하는 역할로 바뀔 것임을 의미한다. 인공지능이 인간을 지배한다거나 직업을 빼앗는다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인공지능에 맞춰 능력을 개조할 것이라는 뜻이다. 휴대전화가 등장한 이후 우리는 전화번호를 애써 기억하지 않는다. 노래방이 유행하면서 노래 가사를 다 외우는 경우도 드물다. 뇌의 기능은 필요한 능력에 따라 선택과 집중을 한다. 이런 의미에서 인공지능은 우리 뇌가 하는 역할을 대신하는 셈이고, 점점 우리의 인공지능 의존도도 높아질 것이다.
오늘날 주목받는 인공지능과 관련한 논의를 훑어보면, 어렵지 않게 그 중심에 뇌라는 신체기관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뇌는 실험으로 데이터를 측정할 수 있는 대상이다. 인간의 마음이나 지적 활동을 정보화하려면 뇌를 연구하면 된다. 과학은 바로 구체적 대상에서 데이터를 얻는 방법이다. 제한적인 대상에서 획득한 데이터를 전체에 대입해서 분석하는 것이 과학인데, 이렇게 실험실이라는 통제된 공간에서 이뤄진 실험 결과를 모든 대상에 적용하는 것이 타당한지에 대한 비판도 있다.
생각이라는 의식 철학의 문제를 뇌라고 하는 구체적인 대상으로 대체하게 한 계기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체계화한 사이버네틱스(생물의 자기 제어 원리를 기계 장치에 적용해 통신·제어·정보처리 등의 기술을 연구하는 학문)와 정보이론이었다. 이 이론에 기반을 두고 인공지능에 대한 이론이 등장했다.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바로 “의사소통”과 “정보”라는 개념이 전통적인 의미의 형이상학을 대체했다는 사실이다. 독일 철학자 하이데거는 이런 맥락에서 “이제 사이버네틱스가 철학을 대신하게 됐다”는 명언을 남겼다. 과거와 달리 인지과학이나 뇌과학이 인문학의 주요 문제를 다루는 전문 분야가 됐다. 인간의 뇌는 자연의 컴퓨터이다. 이 자연의 컴퓨터를 인공의 컴퓨터로 만드는 시도가 인공지능이다.
이렇게 보면 새롭게 보이는 인공지능이라는 기술은 과거의 유산 없이 오롯이 이해하기 어렵다. 일론 머스크의 “진짜 인공지능 로봇”이나 일부 언론이 보도하는 특이점 논의를 보면 인공지능과 관련한 상상은 상당 부분 과거에 빚지고 있다. 그러나 이런 상상을 현실화하는 조건은 분명 예전과 달라졌다. 어떤 이들은 이런 변화가 인공지능 기술의 내적 발전을 통해 가능했다고 믿지만, 나는 이런 발전이 내적인 정합성만으로 이뤄진 것이 아니라고 본다. 이미 설계도는 있었고 그 설계도가 우연히 때를 만난 것이다. 그 도약을 가능하게 한 디딤돌이 바로 인터넷과 빅데이터였다. 인터넷이 없었다면 소셜미디어도 없었을 것이고 모두가 소셜미디어를 쓰는 사회가 되면서 생긴 빅데이터의 형성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인터넷 쇼핑몰이 만들어낸 행동 패턴도 빅데이터의 천연자원이었다. 데이터가 자원이 되는 시대에 우리는 살게 된 것이다.
이런 새로운 조건은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남반구” 노동자들의 값싼 노동력 덕분에 만들어졌다. 이 “보이지 않는 손”을 빠트리고 인공지능을 말하는 것은 장님 코끼리 만지는 우를 범하는 일일 것이다. 따라서 글로벌라이제이션과 팬데믹이라는 사회적 배경이 없었다면 인공지능 역시 다른 여러 기술처럼 말 그대로 공상에 그쳤을지 모른다. 이 우연의 산물이 그러나 필연의 법칙을 만들어낸 것이 지금 우리가 목격하는 변화의 요체이다. 인공지능은 인간의 마음을 흉내 내고자 하는 기술이다. 그 결과는 인간의 마음이 기계처럼 되는 것이 아니라 기계가 인간의 마음이 되는 것이다. 기계가 우리 마음을 돌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기계에 우리 마음을 맞춰야 하는 미래가 이미 당도해 있다.
이 연재는 이 우연성에 대한 이야기를 정리해보는 것이다.
이택광 문화비평가·경희대 글로벌커뮤니케이션학부 영미문화전공 교수
*철학자이자 문화비평가인 저자가 인공지능 시대에 우리 사회가 비평적으로 봐야 할 인문사회적 쟁점을 풀어내는 칼럼입니다. 3주마다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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