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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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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사회를 포기한 때, 사회를 만드는 사람들

나와 비슷한 사람, 내가 속한 공동체만 챙기는 시대에 다른 사람과 ‘함께 살아갈 권리’ 요구하는 장애인운동
등록 2023-11-18 02:44 수정 2023-11-21 16:39
2023년 9월18일 피플퍼스트 활동가들이 점거한 서울 중구 한국장애인고용공단 서울지역본부 로비 모습. 피플퍼스트서울센터 제공

2023년 9월18일 피플퍼스트 활동가들이 점거한 서울 중구 한국장애인고용공단 서울지역본부 로비 모습. 피플퍼스트서울센터 제공

어디나 혼란스럽기만 하고 희망이 없어 보이는 2023년이다. 어디나 인간(적 가치)의 ‘가능성’을 고양하는 새로운 것이 태어나며 사람들에게 ‘해보자’는 의욕을 고취하기보다는, 무력감과 무기력 그리고 피곤함만 팽배해지고 있다. 따라서 창작자들의 고군분투에도 사람들이 연합할수록 연합을 도모하는 개인들의 독자성과 관계성이 동시에 빛을 발하는 이야기는 좀처럼 나오지 않고 있다. 현실의 무력함을 뚫는 이야기의 힘도 증발되는 셈이다.

이 난세에 이야기보다 먼저 몸으로 무력함을 뚫고 인간의 가능성을 고취한 사람들이 나타났다. 인간의 상상력보다 더 큰 것이 결코 현실에서 제거될 수 없는, 불가능성을 뚫고 출현하는 존재임을 증명하듯이 말이다. 예산 전액 삭감안이 국회에 제출된 ‘동료지원가 사업’(중증장애인 지역맞춤형 취업지원사업)의 복구를 요구하며 한국장애인고용공단 서울지사를 점거농성한 피플퍼스트(발달장애인자립지원센터)를 중심으로 한 장애인 당사자 활동가가 그들이다. 이날 농성에 이어 발달장애인 당사자 문석영씨는 국회 국정감사에 출석해 동료들과 헤어지기 싫고 동료 활동가들과 계속 일하고 싶다고 했다. 이들은 자신이 원하는 것은 ‘복지’가 아니라 ‘노동’임을 분명히 하며 사업 주최를 고용노동부로 하도록 요구했다.

이야기보다 먼저 몸으로 출현하는 사람들

이들의 출현이 의미심장한 이유는 단지 발달장애인의 첫 번째 투쟁, 첫 번째 목소리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이들의 주장 자체가 더는 불가능해 보이고 모두가 포기한 것처럼 보이는 것을 요구하고 실현시키겠다고 나섰기 때문이다. 복지가 아니라 노동이라는 구호를 통해 이들이 요구한 것은 ‘사회’다. 자신들이 사회 바깥에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사회 안에서 동료들과 함께 다른 사람들과 노동하고 작업하고 행위하며 활동적 삶을 살아야 할 사람들이라고 선언했다.

모두가 사회를 포기하는 시대다. 이 시대는 내가 알지 못하는 사람과 함께 살고 싶어 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보자. 장애인의 권리 자체를 부정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대다수는 장애인에게도 비장애인처럼 기본적이고 다양한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며 그것을 국가가 세금이 허락하는 한 보장해줘야 한다고 말한다. 다만 그 장애인과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서는 살고 싶어 하지 않는다. 비장애인의 삶에 대한 침해로 여긴다. 그래서 가뜩이나 비좁은 출근길 지하철에 장애인이 휠체어를 타고 나타나면 눈살을 찌푸린다. 집단시위를 하면 시민들이 격렬하게 저항한다. 왜 우리 일상을 방해하냐고 말이다.

나아가 노골적으로 아예 ‘나와 비슷하지 않은’ 사람들과는 전혀 교류하고 싶지 않은 사람들도 있다. 고급 아파트 거주지에서는 단지를 빙 둘러싸고 벽을 설치한 다음 외부 사람의 출입을 허락하지 않는 일이 늘고 있다. 법으로 어쩔 수 없이 통행로를 허락해야 하는데 불법으로 담을 치거나 경고문을 붙여둔다. 같은 아파트 단지라도 임대아파트가 주로 있는 곳과는 분리해버리기도 한다.

사람들은 결코 같이 살고 싶어 하지 않는다. 최근에 생긴 현상이 아니라 과거에도 있던 것이다. 같은 ‘내부인’끼리 뭉치고 외부인을 경계하는 것이 생존확률을 높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에 ‘함께’란 전적으로 ‘내부인끼리의 함께’이지 ‘외부인과 함께’를 의미하지 않았다. 내부와 외부는 철저하게 구분됐다.

여기에 변화를 가져온 것은 근대사회 출현과 더불어서였다. 신뢰와 친밀성에 기초한 ‘내부’는 여전히 사람들에게 중요한 의미 있는 공간으로 ‘공동체’로 불렸다. 문제는 같은 국가에 속한 공동체 바깥의 사람들이었다. 이들을 하나로 묶어내지 못한다면, 이들이 서로를 자기와 같은 구성원으로 여기지 못한다면 근대국가는 존재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근대국가는 공동체 바깥 사람들도 ‘하나’로 묶어놓은 새로운 공간을 창출했다. 그것을 사회라고 불렀다.

내 의견이 ‘들릴 권리’가 곧 ‘말할 권리’

그렇기에 근대로 들어와 권리에서 ‘함께’는 두 가지 의미를 갖게 됐다. 하나는 내가 나와 비슷한 사람들과 모여 공동체를 구성할 수 있는 권리다. 일시적으로 모이는 집회건 지속하는 결사건 나와 정체성이나 의견이 비슷한 사람들이 자유롭게 모여 소통하고 교류하는 공동체를 만들 수 있는 것이 ‘함께’의 권리다. 이론상 이 함께할 권리는 국가 존속을 위협하는 모임이 아니라면 거의 무조건적으로 보장받는다. ‘집회·결사의 자유’가 ‘표현의 자유’와 함께 가장 기본적이고 근본적인 권리로 여겨지는 이유다.

둘째는 누구나 그 지역에 거주하는 사람이라면 ‘사회’를 가질 권리다. 지금 한국 사회에서 ‘함께 산다’는 것에서 문제되는 것이 바로 후자다. 나와 같은 사람들끼리 공동체를 형성하는 것은 거의 문제되지 않는다. 지역에서 자발적으로 성소수자 단체를 결성하고 자체적으로 행사를 진행하는 것은 문제되지 않는다. 다만 길거리로 나와 퀴어축제를 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성소수자들이 퀴어축제를 하러 길거리로 나오는 것은 공동체가 아니라 사회를 요구하는 일이다.

장애인이 이동권이나 통합교실, 그리고 ‘복지 아닌 노동’을 요구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교육에 접근할 권리만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비장애인과 같은 교실에서 함께 공부하는 것, ‘보호’라는 이름으로 시설에 격리되는 것이 아니라 시설에서 나와 필요하다면 활동보조를 받으며 전철과 버스를 타고 지역을 이동하고 사람을 만나서 소통함은 ‘사회’를 요구하는 것이다. 국가가 이들의 생존을 보장함을 넘어 사회에서 자기 목소리를 내며 ‘활동’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따라서 사회를 요구한다는 것은 노동하고 작업하고 나아가 다른 이와 교류하며 자기 목소리를 내는 활동을 할 수 있다는 의미와 다름없다. 목소리를 내는 것, 즉 말한다는 것은 그냥 소리치는 것과는 다르다. 소리를 지르는 게 아니라, 말하는 것은 들리는 사람이 있음을 전제한다. 산꼭대기에서 “야호!”를 외치거나 대나무숲에서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를 외치는 일은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냥 소리를 지르는 것이다.

그렇기에 말한다는 것은 누군가에게 들릴 수 있어야 함을 의미한다. 그렇기에 말할 권리(Right to Speak)는 들릴 권리(Right to be Heard)라고 한다. 후자가 전자보다 훨씬 더 권리의 본질적 의미가 무엇인지를 담고 있다. 권리는 철저하게 인간 사이에서 상대와의 사이-안(in-between)에서 성립하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회를 요구한다는 것은 내 공동체를 넘어 공동체 바깥의 다른 사회 구성원에게도 내 목소리가 들릴 것을 요구한다는 말이다. ‘의견’을 가진 존재가 되어 그 ‘의견’으로 세상을 새롭게 한다. 물론 어떤 이들의 의견은 상투어 반복에 지나지 않지만 말이다.

2023년 9월18일 서울 중구 한국장애인고용공단 서울지역본부 로비에서 피플퍼스트 활동가들이 경찰에 연행됐다. 당시 활동가들은 ‘동료지원가 사업’ 예산을 삭감한 이정식 고용노동부 장관 면담을 요구하는 점거 농성 중이었다.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유튜브 채널 갈무리

2023년 9월18일 서울 중구 한국장애인고용공단 서울지역본부 로비에서 피플퍼스트 활동가들이 경찰에 연행됐다. 당시 활동가들은 ‘동료지원가 사업’ 예산을 삭감한 이정식 고용노동부 장관 면담을 요구하는 점거 농성 중이었다.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유튜브 채널 갈무리

되고 싶은 존재가 되다

물론 목소리가 들린다는 것을 보장한다고 해서 다른 구성원들이 의무적으로 들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나/우리의 말을 들을지 국가가 결정하고 강제할 수는 없다. 국가가 해야 하는 일은 들릴 권리를 보장해주는 거지 그 규모까지 강제하는 것은 아니다. 말을 듣는 사람이 얼마나 늘어나는가는 전적으로 나/우리의 활동으로 결정된다. 그렇기에 사회를 요구한다는 것은 곧 사회 안에서 활동함을 의미한다. 이 활동을 통해 말이 들리게 하기 때문이다. 국가가 할 일은 이 ‘활동’을 보장하고 보조해주는 것이다. 요컨대 자기들 목소리가 들릴 수 있게 이야기를 만드는 것은 사람의 몫이지만 그런 이야기를 만들고 들리는 장을 마련하는 것은 국가의 몫이다.

말하고 활동하는 사람이 근대사회의 주체인 ‘시민/거주민’이다. 근대는 모두가 이 시민으로 자유로워졌다고 말한다. 사람이 자유로워졌다는 것은 그의 삶이 다양한 가능성에 개방됐음을 의미한다. 태어나서 정해진 하나의 직업이나 신분 위치가 아니라 다양하게 ‘변신’하며 개방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됐다. 리처드 세넷의 말처럼 그는 ‘되고 싶은 존재’가 될 수 있다. 다양한 가능성이 그에게 열린다. 다양한 가능성이 열리기 위해 사람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것이 ‘이동의 자유’이며 ‘만남의 자유’이다. 만남을 통해 의견을 말하고 노동한다. 한 사람의 변화와 그 가능성은 전적으로 이동과 만남의 자유에 의해 열린다. 자유는 인간 삶에 그 어느 시대에서도 상상할 수 없었던 ‘역동성’을 부여했다.

또한 자유의 역동성은 사회를 활성화하는 역할을 한다. 자유로운 개인은 결코 ‘고립된 개인’을 뜻하지 않는다. 개인들의 자유로운 움직임에 의해 만나고 흩어지는 과정에서 다른 사람과 ‘연합’하고 새로운 것을 도모하며 경험을 확장할 수 있다. 경험이 확장된 사람들이 더 활발히 연합할수록 더 창의적인 것이 출현한다. 이 역동적인 연합의 장이 사회라고 할 수 있다. 이상적으로 말해 둘이 만나면 세 가지의 새로운 생각이 만들어지는 것, 그 공간을 사회라고 할 수 있다. 이 가능성의 공간이 바로 사회다.

활동은 적극적으로 외부에 나가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반대로 활동을 통할 때 세계로부터 물러나는 것, 즉 성찰 혹은 관조도 가능해진다. 처음부터 활동적 삶이 없이 관조적 삶으로 넘어가는 사람은 많지 않다. 관조를 통해 ‘정신적 삶’이라는 더 높은 경지를 실천하고 살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그 아래에 ‘활동적 삶’이 깔려 있어야 한다. 나아가야 물러날 수 있다. (여기서 활동적 삶이란 활동적으로 산 삶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렇게 활동적으로 살 수 없었기 ‘때문에’ 더 치열하게 더 높은 수준의 정신적 삶으로 나아간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여기서도 활동적 삶은 관조적 삶의 배경을 이룬다.

시설이 아닌 이동, 복지 아닌 노동

그렇기에 사회를 요구한다는 것은 활동적 삶(Vita Activa)을 요구하는 것(그의 짝으로 관조적 삶을 요구하는 것)이다. 이들이 시설 아닌 이동을 말하고 복지 아닌 노동을 말하는 이유다. 사회로부터 격리돼 목숨을 보호받으며 생존하는 것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낯섦과 만나고 그 만남에 대한 관조를 통해 성장의 가능성을 요구하는 것이다. 모든 사람은 성장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에서 자유롭고 평등해야 한다.

그러므로 지금 시점에서 이것을 물어야 한다. 누가 사회를 요구하는가? 사회는 누군가에게는 필요 없고 누군가는 요구한다. 자유와 활동을 위해 사회를 요구하던 자들이 사회를 얻은 이후, 자신들만을 위한 기득권의 성채(=공동체)를 만들어 사회를 비용이 많이 드는 거추장스러운 것으로 여긴다. 반면 ‘복지’라는 이름으로 공동체에 갇혀 아직 사회를 갖지 못해본 사람들은 지금이야말로 모두를 위한 자유를 위해 사회를 요구한다. 새로운 이야기는 아마 이들에 의해 만들어질 것이다.

엄기호 사회학자·청강문화산업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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