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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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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아 “엄마 배 속 같은 산…내가 치고 있던 벽이 좀 사라졌다”

지리산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 하염없이 산 사람들 이야기를 쓰는 <아버지의 해방일지> 소설가 정지아 인터뷰
등록 2023-11-17 15:35 수정 2023-11-23 23:12
“나한테는 산이 고향인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냥 엄마 배 속 같은 곳이다.” 구례 자택에서 만난 정지아 작가. 김진수 선임기자 jsk@hani.co.kr

“나한테는 산이 고향인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냥 엄마 배 속 같은 곳이다.” 구례 자택에서 만난 정지아 작가. 김진수 선임기자 jsk@hani.co.kr

전라남도 구례군. 전국에서 가장 이름난 우리밀 생산지, 전국구 빵집이 있는 곳, 피아골 단풍의 고장, 최근에는 소설가 정지아의 고향으로도 입에 오르내린다. 구례 중심가에서도 한참 들어간 산기슭에 작가의 집이 있었다.

가을 해는 서둘러 움직였고 오후가 되자 시시각각 산그늘이 길게 땅을 덮쳐왔다. 마당에서 가장 먼저 손님을 맞은 커다란 반려견 ‘치타’는 연신 낯선 사람의 손을 핥았다. 온몸에 털이 빠진 레드말라뮤트 ‘호랑이’도 손길을 갈구했다. 정지아 작가는 “호랑이가 정말 찬란하게 아름다웠는데 늙어서 털이 빠졌다”고 무상하게 말했다. 집 안에는 고양이 ‘그냥이·저냥이’ 커플과 그들이 낳은 ‘애플·구글’이 있었다. 커다란 거실 창 바깥으로 가을 지리산이 한눈에 들어왔다. 2011년부터 작가는 구례에서 어머니를 돌보며 옆집에서 살았다.

정 작가의 아버지 정운창(2008년 작고)씨는 조선노동당 전남도당 조직부부장, 어머니 이옥남(97·이옥자)씨는 남부군 정치지도원이었다. ‘지아’라는 작가의 이름은 부모가 빨치산 활동을 했던 지리산의 ‘지’와 백아산의 ‘아’를 따왔다. 25살에 부모 이야기를 담아 쓴 책 <빨치산의 딸>은 이적표현물로 판금 조치를 당했고 작가는 수배됐다.

아버지의 장례식 풍경을 담은 소설 <아버지의 해방일지>(창비 펴냄)는 2022년 9월부터 지금까지 32만 부가 팔려나갔다. 요즘도 매달 1만 부씩 판매돼 스테디셀러로 자리잡아가고 있다. “한국소설 주 독자층이 30~40대 여성인 데 반해, 이 책은 40~50대 남성 독자가 많다”고 출판사 쪽은 전했다. 2023년 10월27일 오후, 작가의 집에서 이야기를 나눴다.

정지아 작가와 사람을 좋아하는 반려견 호랑이. 김진수 선임기자 jsk@hani.co.kr

정지아 작가와 사람을 좋아하는 반려견 호랑이. 김진수 선임기자 jsk@hani.co.kr

부모보다 지리산이 그리웠던 딸

―이름에 지리산이 들어가는 사람의 삶은 어떤지 궁금하다.

“제 부모님이 빨치산이지 나는 빨치산의 딸일 뿐인데, 사람들이 자꾸 나를 지리산과 연관시킨다.”(웃음)

―지리산은 한국의 명산이고, 드라마가 나올 정도로 유명하다.

“(드라마는) 거꾸로 본 것 같다. 지리산은 사람을 죽이는 산이 아니고 살리는 산이다. 지리산에 살러 들어오는 자연인도 많지 않나. 물이 많고 들이 넓으니 사람이 깃들여 살 수 있는 거다. 먹고살 방법이 있으니까 빨치산도 그렇게 오래 있을 수 있었던 거고.”

―본인에게 지리산은 무엇인가.

“지리산은 나한테 삶의 총체, 추상같은 거였다. 엄마의 청춘이 있는 곳이고 아버지가 산에 들어갔을 때 우리 할머니가 맨날 울면서 바라봤던 산이기도 하고 엄마의 친구가 죽은 곳, 엄마의 전남편이 죽은 곳, 엄마의 첫아기가 죽은 곳이다. 역사라는 추상의 실체, 이런 게 나한테는 지리산이다.”

―수배당했을 때 부모보다 지리산이 보고 싶었다고 했다.

“빨갱이의 딸인 걸 다 아는 좁은 동네니까 떠나고 싶었고, 그래서 구례가 그리웠던 적은 없는데 섬진강과 지리산은 그렇게 그립더라. 늘 보고 자라서 내 미의식이라거나 이런 게 다 길러진 곳이 산이다. 나한테는 구례가 고향이 아니고 산이 고향인 듯한 느낌이었다. 바다는 되게 불안하다. 내 감수성, 감각, 미의식 이런 게 다 산의 변화 속에 길러진 것 같고, 그러니까 그냥 엄마 배 속 같은 곳이다. (산이 나를 품어서) 내가 치고 있던 벽이 좀 사라졌다.”

―지리산 중에도 끌리는 곳이 있다면.

“세석평전. 지리산인데 평원이고 뾰족뾰족한 게 아니라 평야처럼 산등성이가 쭉 펼쳐 있어 고원 같은 느낌이고 거기에 철쭉이 피면 그렇게 아름답다. 한국에 없는, 백두산 같은 데 느낌이 살짝 난다.”

―백두산에 가봤나.

“2005년 남북작가대회(‘6·15 공동선언 실천을 위한 민족작가대회’) 때 가봤다. 산의 개념이 달라서 거긴 정말 고원이더라. 그걸 보면서 통일이 돼야 하는구나 생각이 들었다.”

―작가가 대범해서 그런 곳을 좋아하는 건가.

“대범할 때가 있고 소심할 때가 있다. 큰일 앞에서― 감옥에 갈 수 있지 않으냐― 그런 걸 결정할 때나 누구의 죽음 앞에서는 대범한데, 사소한 것, 치과 가는 것부터 시작해서 길 건너는 것, 그런 거 앞에서는 소심하다.”(웃음)

“누님, 하염없이 살았소”

―요즘 지리산에 환경 이슈가 많다. 중산리 양수댐 건설 계획지구에 정지아 작가 생가가 있어서 보존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수몰지구는 아니다. 반대하는 쪽에서 서명을 요청해 친척들한테 전화해봤더니 그분들은 다 찬성이었다. 거기 사시는 분들이 찬성하는 일을, 거기 살지도 않는 사람이 뭐라 말할 계제가 아니라고 판단했다. 지리산이 망가지는 것을 보는 건 안타깝지만 나는 늘 사람이 우선이다. 지리산이 이렇게 인구에 회자할 수 있는 것도 거기에 사람이 살았기 때문이고. 물론 옛 모습 그대로 보존되는 게 좋지만 내가 나서서 옳지 않다고 말하기는 좀 그래서 가만히 있기로 했다.”

―여기 와서 처음엔 후회도 했을 것 같다.

“처음에는 많이 아쉬웠다. 글을 못 쓸 것 같았다. 예술가라는 게 가장 선진적인 세계의 흐름 속에 서 있어야 당대의 문제를 간파하고 소설로 쓰는 거지 않나. 이 신자유주의 시대에 여기는 반봉건 시대라고 웃으며 얘기한다. 여기 군민의 반 이상이 농사지어서 이윤을 낸다. 물론 이윤은 거의 못 내지만, 이게 봉건주의 아닌가. 장사하는 사람도 별로 장사꾼 마인드가 없다. 갈치조림 먹으러 갔는데 ‘오늘은 갈치 없네, 동태탕 먹어’ 이런다. 밥을 한 공기만 달라, 그러면 ‘그거 묵고 워치케 힘을 쓴다요, 다 묵으씨요’ 이러면서 기어이 두 개 갖다주고 남기면 막 혼낸다. 이런 데서 내가 제대로 글을 쓸 수 있겠나 싶어 처음엔 되게 우울했고, 진짜 뭐 그냥 문학이 끝난 것 같았다. 하지만 나이 들어보니 인터넷이나 사회관계망서비스(SNS)가 워낙 발달했기에 촌구석에서도 자기가 관심만 가지면 세상의 흐름을 다 알 수 있고, 신자유주의의 핵심인 서울에 답이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뜻밖에 이 촌구석에 치열한 경쟁으로 벌어지는 다양한 문제에 대한 해답이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빨치산의 딸>은 무려 25살 때 썼는데.

“그게 실록이긴 하지만 어쨌건 내 머리를 거쳐서 나온 글이다. 잊힌 역사를 복원해야 한다는 사명감 같은 것도 있었지만 지나고 생각하니까 개인적으로 한풀이가 필요했던 것 같다. 내 부모는 그렇게 나쁜 사람이 아니고 정당한 혁명가였다, 이런 선언 같은 것이 내게 좀 필요했다. 내 인생에는 결과적으로 더 좋았다고 생각한다. 거기에 짓눌리지 않을 수 있어서― 조금 편파적일 수도 있고 총체적 시각이 없기도 하지마는― 어쨌건 당대 활동을 했던 내 부모 같은 사람의 시각으로는 그러했다, 는 정도로 이제 그 책을 받아들이면 될 것 같다.”

―기억에 남는 얘기가 있다면.

“그때 들었던 얘기 중 뭔가 이데올로기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일화 몇 개를 단편소설로 쓰기도 했고, 이번 소설에도 그런 얘기가 조금씩 등장한다. ‘하염없이’라는 표현도 사실은 엄마의 옛 동료를 만나서 들었다. (남부군 총사령관) 이현상의 부관이던 류화열 선생을 만나러 남해에 갔을 때 류 선생이 엄마를 보자마자 ‘누님, 하염없이 살았소’ 그러면서 하염없이 울더라. 그 ‘하염없이’라는 말이 저 양반의 평생을 압축한 말이구나 싶었다. 그런 장면이 머릿속에 여러 개 있다. 사실 <빨치산의 딸>은 나한테 그 이야기들, 우리 시대에는 들을 수 없는 그런 무거운 이야기들로 마음에 얹혀 있는 거, 그렇게 큰 의미로 남은 것 같다. 아직도 다 쓰진 않았다, 그 얘기들을. 지리산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의 한 맺힌 일화를 이해하는 과정이 내 창작의 과정이었다.”

―<아버지의 해방일지> 명대사는?

“긍게 사람이제, 오죽하면 글겄냐. 근데 이거 우리 아빠만 쓰는 말이 아니고 나이 드신 분들은 다 쓰는 말이다. 젊은 사람들은 ‘네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 하는데, 이건 청춘의 언어고. 살아보면 나 하나도 내 뜻대로 못 바꾸는 게 인간이다.”

―엄마보다 아빠를 더 좋아한 거 같다.

“성격이 똑같다. 우리 엄마는 내 편이면 나쁜 게 하나도 안 보인다. 그러면 우리 아버지랑 나는 똑같이 ‘당신 같은 자들이 사회주의를 망쳤다’고 한다. ‘내부 비판을 해서 사회주의가 독재를 못하도록 만들어야지 당신 같은 자들 때문에 사회주의가 다 망한 거 아니냐’는 주의였다. 나도 그렇다. 아버지와 나는 ‘사실을 사실 그대로 인정하는 것’ 이게 1번이다.”

1997년 중앙대 문예창작학과 석사학위 수여식에서 아버지 정운창씨와 정지아 작가, 그리고 어머니 이옥남씨.(왼쪽부터) 정지아 작가 제공

1997년 중앙대 문예창작학과 석사학위 수여식에서 아버지 정운창씨와 정지아 작가, 그리고 어머니 이옥남씨.(왼쪽부터) 정지아 작가 제공

삶으로 다 보여주는, 아름다운 사람들

―언론인 송건호의 일대기를 다룬 <나는 역사의 길을 걷고 싶다>를 썼다.

“소박하더라, 사람이. 대단한 투사나 운동권이 아니고 기자로서 할 수 없다는 생각에서 펜을 꺾었을 뿐이고, 기자 정신으로 버틴 거고, 소박한 생활인이었다. 나는 그런 사람들이 우리 운동권의 모델이 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삶으로 다 보여주는 사람들. 송건호 선생하고 이돈명 선생은 어쨌건 인간적으로도 아름답다고 생각해서 기꺼이 썼다. 좋은 사람이지만 재미는 없다.”(웃음)

―송 선생을 가리켜 ‘아름다운 사람’이라고 했는데.

“이데올로기를 거창하게 내세우는 게 아니라 자기 직업 속에서 할 도리를 하다가 도저히 견딜 수 없을 때 떨치고 나왔던 사람이었다. <동아일보>에서 해직돼 나와서도 기자의 도리를 지키려 평생 노력했고. 아마 맘만 먹었으면 좀더 높이 올라갔겠지만 그런 걸 전혀 탐내지 않았다.”

―아름다움의 정의는 뭔가.

“각각의 사정을 헤아릴 줄 아는 마음의 넓이와 연민이 있는 사람, 그래서 쉽게 누구를 뭐라 탓하지 않고 각자의 사정을 헤아릴 줄 아는 사람. 요즘 세상에도 아름다운 사람이 많다. 김장하 선생 같은 분도 아름답지 않나. 김사인 선생 같은 경우도 분노할 때는 정말 분노도 하지만 대체로 누군가의 사정을 헤아리려 노력하고 따뜻한 마음을 쓸 줄 아는 사람이다. 빨갱이라고 다 아름답지 않다. 권력을 탐하는 자도 있고, 속물적인 사람도 있고, 그러니까 김일성같이 저렇게 되기도 하는 건데. 그래도 빨갱이 중에 아름다운 사람이 좀더 많다. 어쨌건 내 아버지나 그런 분들은 참 아름다운 분이었다고 생각한다. 닮고 싶은데, 나는 욕심도 있고, (좋아하는 술 조니워커) 블루도 먹어야 하고.”(웃음)

정지아 작가의 책들.

정지아 작가의 책들.

목숨이 붙은 한 더 나은 세상 위해 싸워야

―작가의 아버지가 빨갱이가 아니라 휴머니스트였다고 표현하는 기사도 있었다.

“(아버지는) 휴머니스트이긴 하지만 빨갱이이기도 했다. 나는 편견 없는 평등주의자, 이렇게 표현하는데. 내 아버지 말 속에 다 담겼다고 생각한다. ‘나는 사회주의를 위해 목숨을 건 게 아니다. 사람은 언제나 목숨이 붙어 있는 한 더 나은 세상을 위해 싸워야 한다. 그때는 그 대안이 사회주의였을 뿐이다.’ 그러니까 사회주의가 실패한 것도 받아들였고. 그러나 여기서 포기할 게 아니라 또 다른 대안을 찾아야 하는 거다. 그것이 아버지를 설명하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지금 시대의 어둠은 어떻게 보는가.

“길게 봐야 한다. 나는 요즘 이렇게 한탄하는 것도 좀 과하다고 생각한다. 어쨌건 빨갱이 얘기가 그렇게 나오는 이 책(<아버지의 해방일지>)이 팔린다. 판금도 안 하고. 공공기관 이런 데도 강연하러 다닌다. 세상은 어떻게 해도 예전처럼 돌아갈 수는 없다. 나는 대중을 믿으면 된다고 생각한다.”

구례(전남)=이유진 선임기자 fro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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