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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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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지도자가 ‘주인공’이 되려고 할 때

창작자가 이야기 주인공이 될 때의 위험성은 정치에도 적용돼
정치 지도자는 다른 사람을 주인공으로 만드는 사람이어야
등록 2023-01-27 13:21 수정 2023-02-02 04:24
압도적 힘을 가진 초절정 고수는 변덕이 죽 끓듯 한다. 그런 고수 중의 한 명이 영화 <동사서독>(1995년)에 나오는 황약사다. 영화사 제공

압도적 힘을 가진 초절정 고수는 변덕이 죽 끓듯 한다. 그런 고수 중의 한 명이 영화 <동사서독>(1995년)에 나오는 황약사다. 영화사 제공

“창작자는 글의 주인공이 아니에요. 주인공이 주인공다울 수 있게 신경을 쓰는 것이 창작자이지 글에 직접 뛰어들어 주인공이 되려 하면 안 됩니다. 지금 작품을 보면 주인공이 안 보이고 드러나지 말아야 할 작가가 불쑥불쑥 등장해요. 이러면 주인공은 허깨비가 됩니다.”

이야기가 완성되는 연출과 창작의 마지막 단계에서 학생들에게 종종 하는 말이다. 시놉시스나 콘티 단계에서는 보이지 않는데 구체적인 장면 연출과 대사 말귀를 통해 이런 일이 분명하게 드러나는 경우가 많다. 이야기의 뼈대를 잘 꾸며놓고 막판에 인물의 행동과 말이라는 살과 피를 입히는 순간 인물이 살아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죽어버린다. 살아 움직이며 제 삶을 살아가는 주인공이 아니라 창작자의 허수아비가 된다. “이 대사는 작가인 당신 말인가요? 아니면 주인공의 말인가요?”

압도적 힘을 가진 자들의 변덕

작가가 자기 원할 때 이야기에 들어가서 주인공을 허깨비로 만들어 자기 말을 하고 주인공이 자기 말대로 움직이면 빠져나와 이야기에 주인공이 있는 척하는 이 자리는 ‘주인’의 자리다. 그렇기에 작가가 주인공 자리를 탐하는 것을 넘어 주인공을 조종하면서부터 그는 이야기의 주인이 된다. 이것은 아주 위험하다. 이야기에 주인공 이외에 주인이 있다는 것을 독자가 아는 순간 그 주인공의 자율적 생명은 끝나고 살아 움직이는 것으로서의 이야기는 망가지기 때문이다. 주인이 없어야 주인공이 존재하며 이야기가 산다.

주인은 운명을 결정하는 사람이다. 이야기의 관점에서 본다면 운명을 결정하는 권력이 바로 주권이다. 운명을 스스로 결정짓기 위해 애초에 필요한 것이 부정이다. 내가 내 삶의 주인이더라도 시작은 내가 한 것이 아니다. 다른 존재에 의해 시작‘된’ 것이고 나는 거기에 던져진 존재다. 그렇기에 그 시작된 것에 그저 충실하기만 해서는 결코 주인이 될 수 없다. 던져진 존재로서는 주어진 상태를 바꿔 자신의 ‘시작’을 만들어야 한다. 자신이 새로운 것을 시작해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주인이 됐다고 할 수 있다.

주인은 언제든 부정할 수 있는 자여야 한다. 심지어 내가 시작한 것이라도 그것을 부정하고 새로 시작할 수 있어야 한다. 타자에 대한 부정뿐만 아니라 주권의 핵심에는 ‘자기 부정’이 있다. 주권은 부정, 즉 죽음을 정하는 힘이다. 남에 대해서건 혹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건 주권의 핵심은 삶을 박탈할 수 있는 힘, 생살여탈권인 셈이다.

여기서 왜 주인이 이야기의 파괴자가 되는지가 나온다. 자기 자신이나 남의 생명을 언제든 박탈할 수 있다는 점에서 주인의 가장 큰 특징이자 특권이 나온다. 변덕이다. 자기 부정이 반드시 합리적이고 이성적일 필요는 없다. 충동적이어도 된다. 물론 몇몇 현자는 이것은 주인이 아니라 충동/욕망의 노예 상태라고 비판하겠지만 법에 구애되지 않는 생살여탈권의 핵심은 ‘언제든’ ‘마음대로’에 있다. 변덕이야말로 권력의 쾌감이다.

물론 새로운 시작을 위해 한 번 근본적인 변화가 있고 그다음 이어지는 것이 있다면 이것은 변덕이 아니다. 결단일 것이다. 반면 변덕은 언제든 뒤집은 것을 또 뒤집을 수 있음이다. 어제 내린 결정을 오늘 뒤바꿀 수 있고 그렇게 바꾼 것을 내일 또 바꿀 수 있다. 이렇게 돼야 변덕이며 이 변덕이 언제든 가능해야 그는 ‘주인’이다. 아킬레우스나 헤라클레스, 황약사(김용의 무협지 <사조영웅전>의 등장인물)와 같은 무협지의 몇몇 초절정 고수와 같이 압도적 힘을 가진 자들을 특징짓는 것이 바로 ‘변덕’ 아닌가.

주인은 이야기의 파괴자

주인의 본질이 변덕이라는 점은 주인을 통해서는 좀처럼 서사가 만들어지지 않음을 의미한다. 변덕이란 새로운 시작을 명분으로(진정한 변덕은 이조차 필요로 하지 않겠지만) 지금까지의 이야기에 종언을 선포하는 것이다. 즉 주인은 갑자기 개입해 이어지던 것을 끊어버리고 새로운 시작을 요구한다. 그리고 그 시작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언제든 다시 개입해 끝낸다. 흔히 생각하는 것과 정반대로 주인은 이야기를 만들고 이어가는 자가 아니다. 주인은 끊임없이 지루해하며 이야기의 새로운 시작에만 흥미를 가진다. 변덕이 권력이자 본질인 주인은 이야기의 파괴자다.

이야기 창작과 비슷한 것이 있다. 나라를 통치하는 정치다. 작가와 마찬가지로 정치 지도자는 나라의 주인도 아니고 나라라는 이야기의 주인공도 아니다. 정치 지도자가 주인공이 되면 그 나라 백성의 삶은 망가진다. 그는 정쟁과 전쟁의 영웅일 수는 있으나 나라의 지도자일 수는 없다. 그의 정쟁과 전쟁에서 다른 사람들은 장기판의 ‘말’에 불과하지 각자 자기 이야기의 주인공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반면 정치의 영웅/주인공은 시민이 주인공이 되게 하는 사람이다.(정치와 같이 타인이 탁월해지는 것이 곧 자신의 탁월함이 되는 직업 중 하나가 ‘가르치는 일’일 것이다.)

바로 이 점에서 가장 골치 아픈 지도자는 자기가 이 나라의 ‘주인’이라고 생각하는 지도자다. 나라뿐만 아니라 조직이나 정당도 마찬가지다. 자기가 주인공이라고 생각하는 지도자는 나라를 자기 것처럼 아끼고 보살피고 보전하려 할 것 같지만 주인의 위치는 잠정적으로 그 모든 것을 끝장내고 파괴하는 것에 있다. 나라 전체가 언제든 모든 것을 처음으로 돌릴 수 있는 예외적 상태인 비상상황에서 하루하루 연명할 뿐이다. 북한이 대표적이다. 어제까지 군의 최고 지위에 있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강등돼 사라졌다 얼마 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다.

주인을 제외한 나머지는 누구든지 주인도 주인공이 될 수 없다. 주인의 변덕에 맡겨진 삶, 이 삶은 그게 얼마를 이어가건 ‘연명’하는 것이며 이것은 ‘삶’이 아니라 ‘죽음’의 상태가 지속됨에 불과하다. 죽음이 주인의 변덕에 맡겨졌다는 것은 ‘나’라는 존재가 내 운명의 주인이 될 수 있는 ‘죽음 양식’을 선택할 자유를 박탈당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는 주인의 변덕에 따라 죽임을 당할 뿐 자신의 의지로 죽을 수 없다. (바로 이 점에서 장 아메리는 저서 <자유죽음>에서 죽음을 두고 ‘살아가면서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것에 대하여’라고 부제를 붙였다.)

변덕스러운 주인에 대항해 태어나는 ‘주인공’

이 변덕스러운 주인의 자리에 대항할 때 태어나는 것이 바로 ‘주인공’이다. 주인공은 이야기를 통해서만 존재할 수 있다. 주인이 이야기를 파괴함으로써 존재를 증명한다면 주인공은 이야기 ‘안’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 그렇기에 주인공은 제멋대로 변덕을 부려 이야기를 지배하고 급기야 파괴하려는 주인에게 저항한다. 이야기가 존재하지 않으면 주인공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주인이 끊임없이 시작하기만 한다면 주인공은 시작을 이어가고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자이다. 그렇기에 주인이 운명을 결정한다면 주인공은 운명을 거부하고 맞선다. 그때 비로소 이야기가 시작된다.

물론 이야기를 파괴하려는 주인의 힘과 변덕에 저항하는 주인공이 실패하고 패배하는 경우가 더 많다. 그래도 바로 그 패배가 이야기됨으로써 주인공은 살아나고 반대로 주인은 패배한다. 이것이 그리스 비극이 인류에게 알려주는 이야기의 힘이며 인간이 주인공이 돼야 하는 이유다. 삶을 파괴하고 죽음으로 몰아가려는 신의 변덕, 신들의 변덕에 맞서는 것, 그 자체가 이야기이며 이 이야기가 존재하는 순간부터 그는 패배해 죽임을 당하더라도 주인공이 되기 때문이다. 비극의 핵심은, 인간은 운명을 이길 수 없으니 순응하라거나 운명에 맞서라는 것에 있지 않다. “패배를 노래하고 이야기하라.”

물론 변덕스러운 것은 신뿐만이 아니다. 근대가 선언한 신의 죽음 이후 그 자리를 차지한 것은 자기 자신이다. 즉 가장 변덕스러운 것은 자기 자신이다. 특히 자기 삶에 대해서는 변덕을 마음껏 부려도 된다. 내 인생 내가 망치겠다는데 무슨 상관이냐고 하면 할 말이 없다. 변덕을 부릴 때 아무도 나를 지배하지 못하고 오직 내가 나를 지배하는 느낌이 든다. 그러나 바로 이때가 자신이 주인공인 이야기가 파괴되는 순간이다. 절세 무공을 지닌 자라도 변덕의 노예(이런 점에서 많은 현인이 주인과 자유를 ‘언제든’과 ‘마음대로’에서 찾지 않았다. 변덕스러운 존재로서의 주인이란 실상은 변덕의 노예일 뿐이기 때문이다)로 살아온 자가 다시 주인공이 되는 유일한 길은 자신의 변덕에 대한 ‘후회’뿐이다. 후회를 통해 지나간 삶 전체를 다시 돌아봄으로써 마지막 순간에야 겨우 자기 삶 전체를 하나로 엮어내는(이렇게 하나로 짜여 엮인 게 이야기다) 주인공이 된다. 인간에겐 마지막 순간까지 주인공이 될 기회가 주어지는 셈이다.

정치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는 것은 더욱 까다롭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이야기의 창작가와 마찬가지로 정치 지도자는 타인인 시민이 주인공이 되게 함으로써 비로소 주인공이 될 수 있다. 훌륭한 지도자란 자기가 주인공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시민이 주인공이 되도록 하는 자이다. 정치 지도자의 본령은 자기만 탁월해지는 것이 아니라 시민이 탁월해지도록 힘쓰는 데 있다. 무협지처럼 혼자 절인지용을 뽐내는 주인공이 아니다.

변덕 부리고, 정책 손바닥 뒤집듯 하고

따라서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내가 지금 쓰는 이야기의 ‘장르’를 잘 알아야 한다. 홀로 고고하게 살고 싶은 사람이라면 지도자가 될 것이 아니라 일찌감치 초야에 묻혀 안빈낙도하는 이야기의 주인공이 돼야 한다. 반대로 쉴 새 없이 대중 앞에 나와 자신의 지식과 날카로움을 자랑하고 싶으면 그 이야기의 주인공이 돼야 한다. 정치할 게 아니라 말이다. 또 거리낌 없이 호방함을 뽐내고 싶은 자라면 그 이야기의 주인공이 돼야 하지 정치 지도자가 되려 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정치야말로 주인공을 넘어 주인이 되려는/될 수 있다는 유혹이 강한 장르다. 권력, 그것도 국민을 참칭하며 주권에 다가서는 권력이기 때문이다. 가뜩이나 권력을 가지면 변덕을 부리고 싶어진다. 변덕을 부려도 아무 일도 안 벌어지기 때문에 주인이 된 것 같은 더할 나위 없는 쾌감이 온다. 거리낌이 없어진다. 아무 말이나 해도 되고 정책을 손바닥 뒤집듯이 바꿔도 된다. ‘아랫사람’이 수습하면 되고 수습하지 못한다면 그건 주인인 내 문제가 아니라 주인을 제대로 보필하지 못하는 ‘아래’의 문제가 된다. 주권에서 주인은 언제나 무오류의 존재다. 그렇기에 나라이건 조직이건 제 삶이건 가장 큰 유혹은 (변덕스러운) 주인이 되려는 것이며 변덕스러워도 되는 조건이 갖춰지는 것이다. 이때 자신도 조직도 나라도 위험해진다.

엄기호 사회학자·청강문화산업대학 교수*엄기호의 이야기 사회학: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생겨나는 시대와 사회에 대한 고민을 나눕니다. 격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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