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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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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혐·여혐 둘 다 싫다고요?”

20대 여성 이여성이 말하는 여성 공약
등록 2022-03-05 16:31 수정 2022-03-06 06:45
2022 페미니스트 주권자행동 회원들이 2022년 2월12일 오후 서울 종로 보신각 앞에서 열린 집회에서 대선 후보들에게 바라는 점을 적은 손팻발을 들고 있다. 한겨레 박종식 기자

2022 페미니스트 주권자행동 회원들이 2022년 2월12일 오후 서울 종로 보신각 앞에서 열린 집회에서 대선 후보들에게 바라는 점을 적은 손팻발을 들고 있다. 한겨레 박종식 기자

미세먼지 없는 파란 하늘 아래 초록 펼침막이 보였다. 아홉 글자가 선명하다. ‘이번 대선 나만 답답해?’
2022년 3월1일 서울 마포구 홍익대학교 앞 야외 ‘광장마당’에 200명가량이 모였다. ‘세상을 바꾸는 2022 대선공동행동’(대선공동행동)이 주최한 ‘3·1 정치파티’에 모인 사람들이다. 대선공동행동은 2022년 2월 지역 시민사회단체들과 개인들이 꾸린 단체다. ‘미래의 비전 대신 네거티브와 막말이 난무하는 대선을, 답답해서 두고 볼 수가 없다’는 데 동의하는 이들이 알음알음 모였다고 한다.
참가자들은 ‘정권 교체 아니면 정권 재창출’ ‘정권 재창출 아니면 정권 교체’라는 돌림노래를 멈춰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선에서 지워지고 사라진 노동자, 농민, 여성, 청년, 장애인, 성소수자들의 목소리를 되살려야 한다!” “누구를 뽑을 것인가를 말할 때가 아니라, 시민 스스로 정치와 나라를 책임지기 위한 목소리를 내야 할 때다!”
2016년 ‘박근혜 탄핵’ 촛불집회에 같이 다녔던 지역주민들이 모여 만든 시민단체 ‘동서울시민의힘’ 회원들도 이날 참석했다. 김신옥진 집행위원장은 “대선 후보 TV토론을 보면 주요 후보들이 서로 ‘거짓말하지 말라’는 공방만 하고 정작 성평등·노동권 같은 중요한 가치는 말하지 않는다”며 “대선에서 사라진 목소리를 함께 내고 싶어서 참여했다”고 말했다.
‘정치파티’의 마지막 순서는 거리행진이었다. 참가자들은 맨 앞에 ‘기미년엔 독립선언, 임인년엔 주권선언’이라고 쓴 펼침막을 세웠다. 지나가던 한 시민이 참가자들의 구호를 듣고 혼잣말하듯 말했다. “인정, 인정. 나도 누굴 뽑을지 모르겠어.”
제20대 대통령을 뽑는 투표일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한겨레21>은 대선을 앞두고, 그동안 선거 국면에서 주요한 ‘표’로 계산되지 않은 유권자들의 목소리를 들었다. 대선 후보들이 좀처럼 발언하지 않는, 국민 개개인의 삶과 한국 사회의 미래를 위해 짚고 넘어가야 할 이야기다. 총 25명을 인터뷰했고 그 인터뷰 내용을 바탕으로 20대 여성, 장애인, 빈민, 비정규직 노동자, 기후위기 활동가, ‘차별금지법 활동가’ 등 7명이 직접 말하는 형식으로 재구성해 글을 싣는다. 이들은 말한다. 주어진 양자택일형 시험을 거부하고 문제의 오류부터 지적해야 한다고. _편집자주

“오늘 여성정치에 대한 질의를 할 것이기 때문에 죄송하다는 말씀 먼저 드리고 시작하겠다.”(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

“(구조적 성차별은) 여성과 남성을 집합적으로 나눠 양성평등이란 개념으로 접근할 것이 아니다.”(윤석열 국민의힘 후보)

“제가 분명히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여성청년도 유권자라는 거다.”(심상정 정의당 후보)

-2022년 3월2일 대선 후보 TV토론회

눈이 번쩍 뜨였습니다. 드디어 내 이름을 불러주는 후보가 나타났어요. 심상정 후보가 3월2일 열린 마지막 티브이(TV) 토론에서 ‘여성청년’을 언급했을 때. 대선 투표를 일주일 앞두고서야 비로소 ‘유권자’로서 내 존재가 공론장에서 처음 각인되는 느낌이었달까요. 네, 제 이름은 ‘이여성’입니다.

대선 기간 내내 ‘20대 여성’인 나는 유권자, 아니 한 명의 시민으로서도 존중받지 못하고 있다고 느꼈습니다. 그래도 지금까진 정치인들이 선거 때면 성평등에 관심 있는 시늉이라도 했잖아요. 달라진 건 2021년 4월 서울·부산 보궐선거 이후입니다. 보수정당에 대거 투표한 20대 남성은 갑자기 모든 성별을 망라한 청년의 대표가 됐죠. 그들이 호소해온 모든 불행과 불안은 페미니즘, 그리고 페미니스트인 20대 여성 탓이 됐고요.

정치권과 언론이 이름 붙인 ‘이대남’이란, 사실 주류·기득권·정상성 바깥에 있는 모든 타자와 소수자에게 적대적인 집단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청년’은 물론이고 실제 20대 남성이 지닌 다양성을 포괄하지도 못합니다. ‘이대남’이 조명받는 동안 사회에서 모든 ‘소수자’들은 주변으로 밀려났지요. 엔(n)번방 방지법, 비동의 강간죄, 스토킹처벌법, 낙태죄 폐지처럼 여성들이 오래 싸우며 밀어올린 구체적인 생존의 의제들은 폐기됐습니다.

거대 양당의 행보에 무력감을 느낍니다. 국민의힘은 청년 공약에 ‘여성가족부 폐지’와 ‘무고죄 처벌 강화’를 올렸습니다. 대놓고 여성청년의 목소리는 듣지 않겠다고 선언한 꼴입니다. 민주당 청년선거대책위원회는 구조적 차별인 여성혐오(misogyny)를 단순히 불쾌한 감정을 토대로 한 ‘남성혐오’와 동일시해 ‘남혐·여혐 둘 다 싫어 위원회’를 만든다고 했습니다. 이재명 후보는 페이스북에 직접 ‘페미니즘과 거리를 둬야 한다’는 취지의 글을 공유하기까지 했고요. 20대 여성 지지율을 의식한 탓인지, 이 후보는 뒤늦게 3월2일 마지막 TV토론회에서 당의 잘못된 ‘미투’ 대처를 사과하긴 했지만요. 정권재창출이든 정권교체든 여성을 ‘바깥’으로 밀어버려야만 가능한 것인지 궁금합니다.

내게 가장 중요한 이슈는 ‘n번방 방지법’ 강화를 포함해 디지털성폭력에 제대로 대응하는 것, 그리고 권력형 성범죄를 막는 것입니다. 우리에겐 일상이자 생존의 문제입니다.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도 대선 후보라면 마땅히 말해야 하는 공약 아닐까요?

지인들과의 채팅창에는 “마땅한 길이 보이지 않으니 결국 우리는 ‘탈조’(탈조선, 한국을 떠나는 일) 해야 한다”는 씁쓸한 자조가 오갑니다. 울며 겨자 먹기로 여당에 기우는 이들도 눈에 띕니다. 투표를 앞두고 나는 거대 양당체제 바깥에서 싸우는 이들을 떠올리며 또 다른 가능성을 가늠해봅니다.

박다해 기자 doall@hani.co.kr

20대 여성의 이야기를 종합했습니다.
*이효진 젠더정치연구소 여·세·연 활동가, 신민주 <판을 까는 여자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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