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나서 상황극 같이 하실 분.”
2019년 8월 남성 ㄱ(39)씨는 채팅 애플리케이션(앱)에서 ㄴ씨를 만났다. 35살 여성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ㄴ씨는 관심을 보이는 ㄱ씨에게 합의하에 성관계하되 강간인 것처럼 연기하는 ‘강간 플레이’를 하자고 제안했다. “문을 두드리고 옆집에서 온 사람이라고 하면 문을 열어주겠다. 강간 플레이가 끝나면 애인 모드로 해준다.” ㄱ씨는 ㄴ씨가 알려준 주소로 찾아갔다. 그리고 그 집에서 맞닥뜨린 여성을 ‘강간’했다. 그러나 이는 상황극이 아닌 실제 상황이었다. 집에 있던 여성은 ㄴ씨가 아닌 엉뚱한 여성이었다. ㄴ씨는 그 여성인 척 가장한 이웃 남성(29)이었고, 세 사람은 서로 모르는 사이였다. 성폭력처벌법상 주거침입강간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ㄱ씨는 ‘ㄴ씨에 속아 강간 상황극인 줄 알았다’며 무죄를 호소했다.
6월4일 1심 결론이 나왔다. ㄱ씨와 ㄴ씨의 희비가 엇갈렸다. 대전지법 형사11부(재판장 김용찬)는 강간을 교사한 ㄴ씨에게는 징역 13년의 중형을, 정작 강간을 실행한 ㄱ씨에게는 무죄를 선고했다. 37쪽의 판결문을 통해 재판부의 판단을 따라가봤다.
‘미필적 고의’라는 높은 허들
쟁점은 ㄱ씨가 강간 상황극이 아니라 실제 강간임을 알면서도 이를 용인했는지, 즉 ‘미필적 고의’가 있었는지 여부였다. 미필적 고의란 어떤 행위로 인해 범죄에 해당하는 결과가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그 행위를 하는 것을 말한다. 재판에서는 채팅 앱을 통한 만남, 방문, 강간, 도주에 이르기까지 ㄱ씨가 실제 상황임을 알아차렸을 법한 정황들이 제시됐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옆집 사람입니다’라고 말하면 문을 열어주기로 한 약속이 완벽하게 지켜지지 않았고, 강간이 중단된 뒤 ㄱ씨는 112에 신고한 피해자의 휴대전화를 들고 도망갔다.
모든 상황을 종합한 재판부는 “상황극이 아닌 강간일 수 있음을 알고도 피해자를 강간한 것 아닌가 의심이 들기는 한다”면서도 “ㄱ씨의 미필적 고의를 인정하기 부족하고 이를 인정할 만한 증거가 없다”고 결론 내렸다. 충분한 증거가 제시되지 못하면 의심이 간다 해도 피고인 이익에 따라 판단하는 게 형사재판의 대원칙이다.
대신 모든 상황을 꾸며낸 ㄴ씨가 중하게 처벌됐다. 애초 ㄴ씨는 주거침입강간 교사 혐의로 기소됐다. 그러나 재판부는 ㄴ씨가 강간의 고의가 없는 ㄱ씨를 도구처럼 사용해 직접 강간을 저지른 거나 마찬가지라고 판단했다. 이에 ㄴ씨를 ‘교사범’(범죄 의사가 없는 타인이 범죄를 결의하여 실행하게 하는 자)이 아닌 주거침입강간죄의 ‘간접정범’(범죄 의사나 능력이 없는 타인을 이용해 자기의 범죄를 행하는 자)으로 처벌했다. 여기엔 또 다른 여성 두 명을 몰래 훔쳐보고 성적 혐오를 일으키는 카카오톡 메시지나 쪽지를 20여 차례 보낸 혐의(통신매체 이용 음란 등)도 추가됐다.
서혜진 변호사(한국여성변호사회 인권이사)는 “과실에 의한 상해는 과실치상으로 처벌 가능하지만 과실에 의한 강간은 처벌할 수 없다. ㄱ씨를 강간으로 처벌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미필적 고의가 입증돼야 한다. 형사처벌은 어려워도 민사상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는 있다”고 설명했다.
의문은 여전히 남아 있다. 강간은 폭행과 협박을 동원해 상대방 의사를 제압한 뒤 성관계에 이르는 중대한 범죄행위다. 강간 상황극을 하려면 서로 어느 정도 행위까지 용인할지 사전에 철저히 협의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상황극은 순식간에 범죄가 된다. 더군다나 신분을 속이기 쉬운 채팅 앱에서 처음 만난 사람과의 성행위라면.
그러나 구체적인 협의나 인적사항 확인 절차는 없었다. 강간 당시 피해자는 “하지 말라”고 저항하면서도 겁에 질린 나머지 소리조차 지르지 못했는데 ㄱ씨는 그런 피해자를 보고 ‘강간당하는 척 연기하는 건 아닌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상황극이 맞는지 피해 여성에게 끝끝내 묻지 않았다.
“우연한 사정들의 결합”
재판부는 ㄱ씨에게 “주의를 제대로 기울이지 않은 중과실이 있다”고 짚으면서도 죄는 물을 수 없다고 판단했다. 원나이트(하룻밤) 상대를 찾는 채팅 앱에서 상대방 인적사항까지 확인하는 경우는 드물다는 점, ㄴ씨가 피해 여성인 척 주소나 공동현관 비밀번호까지 알려준 점, 문을 두드려도 답이 없자 포기하고 귀가하려던 ㄱ씨에게 ㄴ씨가 강간 상황극이 맞다고 재차 확인시킨 점, ‘옆집 사람입니다’라고 말하자 피해자가 문을 열어줬다고 피고인이 일관되게 진술하는 점 등을 근거로 들었다. “이례적이고 우연한 사정들이 결합”해 ㄱ씨가 강간 상황극으로 믿을 수밖에 없었다는 판단이다.
연속적인 우연에 기댄 재판부 판단은 악용될 여지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여자들의 섹스북> 저자이자 성교육 전문가인 한채윤씨는 “실제 강간한 사람은 책임을 지지 않았다”며 “(앞으로 이런 성관계에 사전 협의 과정을 생략해도 된다면) 당사자가 합의하에 한 일인지 아닌지 증명할 책임은 누가 져야 하나” 되물었다.
피해자가 강하게 저항하지 않으면 강간이 성립하지 않는다는 사회 통념을 그대로 반영한 판단에도 비판이 나온다. 재판부는 “피해자 반항이 그리 강하지 않아 (ㄱ씨는 피해자가) 강간당하는 연기를 하는 것으로 오해하고 강간범으로서 연기를 계속했다”고 봤다. 성폭력 피해자 대리 경험이 많은 한 변호사의 비판은 이렇다. “반대로 생각해볼 수도 있다. 피해자가 상황극에 참여하려는 의사가 있었다면 더 적극적으로 소리를 지르거나 반항하는 연출을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이런 판단 방식은 피해자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결과만 낳는다.” 피해자 반응을 기준으로 범죄 성립 여부를 따지는 게 무의미하다는 취지다.
확산하는 유사범죄, ‘몰랐다’면 끝일까
이번 사건과 같은 ‘사칭 범죄’는 사이버공간에서 벌어지는 성적 괴롭힘의 한 유형이다. 시민단체 한국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에 접수된 상담 사례를 살펴보면,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자신과 아무 관계 없는 피해자의 사진과 인적사항을 올린 뒤, 타인에게 ‘나는 야한 말을 좋아한다’ ‘○○를 해달라’며 언어적·물리적 성폭력을 유도하는 사례가 꾸준히 들어오고 있다. 피해자는 영문도 모른 채 명예훼손과 물리적 성폭력으로 인한 공포에 시달리게 된다. 서승희 한국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 대표는 “게시글을 올린 사람만 문제이고, 폭력에 가담한 사람은 ‘몰랐다’ ‘속았다’고 주장하면 아무 죄도 묻지 못한다는 것이냐”며 “유사범죄를 막으려면 당신도 죄가 있다는 메시지를 줄 만한 최소한의 처분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검찰은 “ㄱ씨에 대한 무죄 선고는 놀이, 상황극, 플레이라는 이름으로 ㄱ씨에게 면죄부를 준 것이나 다름없다”며 6월11일 항소장을 제출했다. 2심 재판이 곧 시작된다.
고한솔 기자 sol@hani.co.kr
한겨레21 인기기사
한겨레 인기기사
“명태균에 아들 채용 청탁…대통령실 6급 근무” 주장 나와
‘미국 최고 의사’ 84살 김의신 “암에 좋은 음식 따로 없어, 그 대신…”
법원, KBS 박장범 임명 효력정지 가처분신청 기각
탄두가 ‘주렁주렁’…푸틴이 쏜 ‘개암나무’ 신형 미사일 위력은
읽고 쓰고 살고…86살 ‘활자 청춘’ “텍스트힙이 뭐지요?” [.txt]
관저 유령건물 1년8개월 ‘감사 패싱’…“대통령실 감사방해죄 가능성”
비행기 창밖 “불꽃놀인가?” 했는데 미사일…위태로운 중동하늘
‘야스쿠니 참배’ 인사 온다는 사도광산 추도식…‘굴욕 외교’ 상징될 판
“대통령 술친구 이긴 ‘김건희 파우치’…낙하산 사장 선임은 무효”
‘골때녀들’의 진심과 내가 만났다 [.t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