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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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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소대가리’라고요?

김정은 위원장에게 보내는 편지…

험한 말을 중지하고 한 걸음 물러서서 남쪽과 대화하길
등록 2019-09-04 15:05 수정 2020-05-03 04:29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방사포 앞에 서서 발사관을 만지며 웃는 모습을 8월25일 <조선중앙TV>가 공개했다. 연합뉴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방사포 앞에 서서 발사관을 만지며 웃는 모습을 8월25일 <조선중앙TV>가 공개했다. 연합뉴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당국자께

저는 한겨레평화연구소장을 맡고 있는 권혁철이라고 합니다. 1995년부터 기자로 일하며, 남북관계에 관심 갖고 기사를 썼습니다.

저는 김대중·노무현 정부, 이명박 정부 때 통일부와 국방부 출입기자를 하면서, 남북관계의 변화와 부침을 지켜봤습니다. 남북이 극한 군사 대결로 치달아 한반도가 전쟁 위기에 휩싸일 때도 있었습니다. 당시 저는 “가장 나쁜 평화라도 가장 좋은 전쟁보다 낫다”는 믿음을 바탕으로 ‘평화적 해결’을 촉구하는 기사를 썼습니다.

잘 활용하던 속담 중 하나

제가 북쪽 당국자에게 편지를 쓰는 것은 최근 남북관계 악화에 대한 남쪽 사회의 우려를 솔직하게 전달하고 싶어서입니다. 제가 북쪽 당국자에게 하고 싶은 말은 간단합니다. “험한 말을 중지하라. 한 걸음 물러서서 남쪽과 대화하라”입니다.

지난 8월15일 문재인 대통령의 8·15 경축사를 북쪽은 거칠게 비난했습니다. 북쪽은 문재인 대통령에 대해 인용하기조차 민망한 비난과 조롱을 마구 쏟아냈습니다. 이런 북쪽 태도에 많은 국민이 충격을 받았습니다. 문 대통령의 경축사를 “삶은 소대가리도 앙천대소할 노릇”이라며 원색적으로 비난했습니다. 남쪽 사람들이 “삶은 소대가리? 지금 이 시점에서 북쪽이 꼭 이렇게 말을 하느냐”고 묻습니다.

저는 수년간 통일부 출입기자를 하면서 등 북쪽 언론의 기사, 북쪽 정부기관의 성명 등을 원문 그대로 볼 수 있었습니다. 저는 ‘삶은 소대가리’가 익숙합니다. 북쪽 기사에서 자주 봤던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명박 대통령이 취임한 지 한 달 뒤인 2008년 4월에 처음으로 ‘삶은 소대가리’란 말이 나오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당시 북쪽은 에서 ‘이명박 역도’ 등의 표현을 동원해 이 대통령의 대선 공약인 ‘비핵개방 3천 구상’을 집중 비난했습니다. “남조선 경제와 민생 파탄으로 권좌에 들어앉자마자 사방에 외자 동냥바가지를 들고 돌아가는 주제에 그 누구의 ‘국민소득’에 대해 어쩌고저쩌고 하는 것은 삶은 소대가리도 웃다 꾸러미 터질 노릇이 아닐 수 없다”고 비꼬았습니다. “삶은 소대가리가 웃다가 꾸러미(꾸레미. 소 주둥이에 씌우는 망) 터지겠다”는 속담은 죽은 소조차 너무도 어이없어 한껏 입을 벌리고 웃다가 꾸레미까지 터지고 말겠다는 뜻입니다.

북쪽 당국자께서는 잘 아시겠지만, 오래전부터 북쪽 관영 매체가 남쪽 보도를 할 때 속담을 적극 활용해왔습니다. 1999년 3월 남쪽 국가정보원은 북쪽이 남북관계, 한-미 군사훈련 등을 비꼴 때 자주 등장하는 속담을 분석해 정리했습니다. 남북관계 속담으로는 “속이 검을수록 비단 두루마기를 입는다”(나쁜 마음을 품은 사람일수록 그것을 감추기 위해 온갖 술책을 꾸민다는 뜻), “시비질 좋아하면 달을 보고도 시비를 건다” “삶은 소대가리가 웃다 꾸레미 터질 노릇이다” 등이 있었습니다. 당시에도 ‘삶은 소대가리’가 등장하는 것으로 봐서, 북쪽이 최소 20년 넘게 이 표현을 대남 관계에서 즐겨 쓴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8월15일 충남 천안시 독립기념관에서 74주년 광복절 경축사를 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문재인 대통령이 8월15일 충남 천안시 독립기념관에서 74주년 광복절 경축사를 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김대중 대통령도 ‘파쇼광신자’ 비난

최근 주변 사람들이 ‘왜 북쪽은 거친 막말을 일삼고 남쪽 당국을 불신하느냐’고 제게 묻습니다. 저는 남북관계를 취재할 때 표면에 드러난 일이나 발언 못지않게 사안의 맥락과 배경, 전망에 주목했습니다.

저는 먼저 북쪽의 막말 표현은 오래전부터 있어왔던 일이라고 설명합니다. 심지어 햇볕정책을 추진한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도 한때 ‘파쇼광신자’ ‘괴뢰통치배’ ‘남조선 집권배’ 등의 표현으로 비난했습니다.

북쪽처럼 국가가 공식 석상에서 막말을 지속적으로 하는 경우는 매우 드뭅니다. 저는 구조적인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북쪽은 한국전쟁 휴전 이후 미국의 핵전력과 주한미군의 존재에서 안보 위협을 느낍니다. 미국 언론인 셀리그 해리슨은 이런 북쪽의 안보 위기를 ‘상시포위심리’라고 했습니다.

북쪽 경제 사정은 나쁘고 국제 정치에선 고립되고, 안보는 상시포위심리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북쪽은 이를 극복하려고 미국이나 남쪽에 대한 증오와 투쟁심을 북한 주민들에게 고취시키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또 북쪽 막말은 국제사회에서 주목을 끌고 메시지 전달 효과를 높입니다. 제가 보기에 북쪽 막말은 즉흥적 말실수가 아닙니다. 대내적으로 지지 기반을 확보하고 대외적으로 발언권을 확보하려는 치밀한 생존 전략입니다.

저는 ‘도무지 알 수 없는 북쪽 속내’를 파악하려면 먼저 처지를 바꿔 생각해보자고 설명합니다. 서 있는 곳이 달라지면 보이는 풍경도 바뀝니다.

북쪽 자리에서 보면, 지난 2월 베트남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 결렬의 책임이 상당 부분 남쪽에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북쪽은 ‘영변 핵시설 폐기’를 2018년 9월 평양공동선언에 넣었습니다. 그동안 핵문제는 북-미 관계에서만 다루겠다던 북쪽이 태도를 바꾼 것입니다. 당시 남쪽 정부가 북-미 협상의 중재자 역할을 자임했기에 북쪽이 영변 핵시설 폐기 카드를 남쪽에 먼저 밝히면 남쪽이 동맹국인 미국을 잘 설득해줄 것으로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노이에서 뜻밖에도 미국이 ‘영변 핵시설 폐기+알파(α)’를 들고나와 북-미 정상회담이 결렬됐습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4월 최고인민위원회 시정연설에서 “오지랖 넓은 중재자 행세를 하지 말라”고 한 것은 믿었던 남쪽에 대한 강한 실망감으로 볼 수 있습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6월12일 싱가포르에서 만나 악수하는 장면. AFP 연합뉴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6월12일 싱가포르에서 만나 악수하는 장면. AFP 연합뉴스

무한 군비경쟁 자극하는 ‘안보 딜레마’

둘째는 남쪽이 남북관계 개선 의지가 있는지 의구심을 갖고 있습니다. 북쪽은 올해 신년사에서 ‘대가 없는 개성공단과 금강산관광 재개’ 뜻을 밝혔습니다. 남북 경제협력에 적극 나서달라는 메시지를 남쪽에 보냈지만, 국제사회의 대북제재를 이유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남쪽에 불만이 쌓였을 겁니다.

셋째는 6월 한-미 연합기동훈련, 한-미 연합잠수함훈련, 8월 한-미 연합군사훈련 ‘동맹 19-2’ 등 한-미 연합연습과 F-35A 스텔스전투기, 글로벌호크 도입 등 남쪽의 첨단 무기 구입에 대한 반발입니다. 북쪽은 예전부터 한-미 연합연습을 북침 전쟁 연습으로 규정하고 ‘평화와 전쟁 연습은 양립될 수 없다’며 이 기간에는 한국, 미국과 일절 대화를 하지 않았습니다.

최근 북쪽이 이 문제에 더욱 강경한 태도를 보이는 이유는 한-미 연합연습과 한국의 첨단 무기 도입은 “6·12 조-미 공동성명과 판문점선언, 9월 평양공동선언에 대한 노골적인 무시이며 공공연한 위반”(8월6일 외무성 대변인 담화)이라고 보기 때문일 것입니다. 북쪽은 7, 8월 단거리탄도미사일과 방사포 등을 계속 쏘았습니다. 북쪽 단거리 발사체 발사는 한-미 연합연습에 대한 반발이란 분석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북쪽은 한-미 연합연습이 끝난 지 나흘 만인 8월24일 새벽 초대형 방사포를 시험발사했습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지난해 정상회담에서 문재인 대통령에게 ‘더 이상 새벽잠 설치는 일 없도록 해주겠다’던 약속은 어디로 간 것일까요?

최근 북쪽 군사행동이 한-미 연합연습에 단순 반발하는 차원이 아님이 분명해졌습니다. 최근 쏜 북쪽 단거리미사일과 방사포의 비행거리가 200~600㎞입니다. 남쪽에 대한 군사적 위협이 명백합니다. 남쪽 군사시설, 주요 시설, 주한미군 시설을 한순간에 초토화할 수 있는 능력을 과시한 것입니다.

저는 한-미 연합연습과 남쪽 첨단 무기 도입과 북쪽의 미사일·방사포 시험발사가 맞물려 한반도에서 ‘안보 딜레마’ 상황이 벌어질까 걱정입니다. 안보 딜레마란 나의 안보 능력 강화가 상대의 안보 불안을 자극해 무한 군비경쟁과 모두의 안보 불안으로 귀결될 수 있다는 뜻의 국제정치학 용어입니다.

현실에서 안보 딜레마는 한쪽의 군사 준비가 다른 한쪽이 보기엔 방어 목적인지 공격 목적인지 알 수 없을 때 나타납니다. 남북 양쪽은 군비 증강을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에 앞선 필수 과제’(남쪽)이거나 ‘나라의 자주권과 안전, 인민의 행복한 미래를 굳건히 담보해나가기 위한 성스러운 국방건설사업’(북쪽)이라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남북 모두 상대의 군비 증강을 공격적인 군사 위협으로 인식합니다.

일본에 맞선 남북 공조 제안에…

남북은 안보 딜레마를 피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남북은 험한 말을 중지하고 무조건 한 걸음 물러나서 만나야 합니다. 지난해 9·19 남북 군사 분야 합의서에 담긴 남북군사공동위원회를 열어 북쪽 우려(남쪽 첨단 무기 도입, 한-미 연합연습)와 남쪽 우려(북쪽 미사일·방사포 시험발사)를 협의할 수 있습니다. 이 합의서는 “쌍방은 상대방을 겨냥한 대규모 군사훈련 및 무력 증강 문제, 다양한 형태의 봉쇄 차단 및 항행 방해 문제, 상대방에 대한 정찰 행위 중지 문제 등에 대해 ‘남북군사공동위원회’를 가동하여 협의해나가기로 하였다”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지금 남쪽은 일본과 경제전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8월5일 “남북 간의 경제협력으로 평화경제가 실현된다면 우리는 단숨에 일본 경제의 우위를 따라잡을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또 8월15일 광복절 경축사에서 평화경제를 북쪽에 제안했습니다. 일본과 맞서 남북 공조를 제안한 것입니다.

하지만 북쪽은 8월16일 “삶은 소대가리도 앙천대소할 노릇” 같은 막말로 제의를 거부했습니다. 저는 적어도 일본 문제는 남북 공조, 민족 공조가 가능하다고 봤기에 무척 아쉽고 안타까웠습니다.

남쪽에는 “어려울 때 돕는 친구가 진짜 친구”란 말이 있습니다. 북쪽은 “우리 민족끼리”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일본에 맞서 우리 민족끼리 힘을 합치면 남쪽에서 북쪽 이미지도 좋아질 것입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평화와 번영으로 나가는 성서로운 여정에 언제나 지금처럼 (문재인 대통령과) 두 손을 굳게 잡고 앞장에 서서 함께해나갈 것”(2018년 9월19일 평양정상회담 기자회견)이라고 8천만 겨레와 전세계에 천명하셨습니다. 저는 이 말씀이 여전히 유효하다고 믿습니다.

권혁철 한겨레평화연구소장 드림

권혁철 한겨레평화연구소장 nur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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