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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미 편지는 친밀감 ‘익스프레스’

격렬한 두 지도자의 냉정한 편지, ‘첨단 외교 방식’으로 등장한 아날로그 친서 외교
등록 2019-06-29 13:41 수정 2020-05-03 04:29
<조선중앙통신>이 공개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친서를 읽는 모습. 연합뉴스

<조선중앙통신>이 공개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친서를 읽는 모습. 연합뉴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 2월 베트남 하노이에서 열린 북-미 정상회담 결렬 이후 처음으로 친서를 주고받아 북-미 대화 재개 가능성이 열렸다.

친서 읽는 사진까지 공개

6월12일 트럼프 대통령은 김정은 위원장의 친서를 아름답고 따뜻하다고 평가하고, 김 위원장과 좋은 관계를 갖고 있다고 말했다. 이전에도 트럼프 대통령이 김 위원장에 대한 믿음과 호감을 여러 차례 밝힌 바 있지만, 6월 말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 한-미 정상회담, 한-중 정상회담 등 연쇄 정상회담을 앞둔 상황이어서 눈길을 끌었다.

김 위원장은 6월23일 트럼프 대통령이 보낸 친서를 읽고 “훌륭한 내용이 담겨 있다”고 만족감을 표했다. 그는 “트럼프 대통령의 정치적 판단 능력과 남다른 용기에 사의를 표한다”면서 “흥미로운 내용을 심중히 생각해볼 것”이라고 말했다. 북한 언론은 이를 보도하면서 김 위원장이 트럼프 대통령의 친서를 읽는 사진까지 공개했다. 이는 김 위원장이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 이후 미국의 태도 변화가 있음을 주민들에게 공식적으로 알리고 다시 미국과 대화에 나서겠다는 뜻을 대내적으로 밝힌 것으로 해석됐다.

북-미 정상 친서 교환 이후 두 지도자가 주도하는 톱다운(하향) 방식의 비핵화 협상이 여전히 유효할 것이란 기대가 나왔다. 통일부는 6월27일 북한과 미국이 정상 간 친서 교환으로 대화의 새로운 모멘텀을 마련했다고 평가했다. 통일부는 이날 ‘최근 북한 정세 동향’ 자료에서 “김정은 위원장은 트럼프 대통령의 친서에 대해 ‘만족 표시’ 등 긍정적 반응을 보였고, 미국 측도 대화 재개에 적극적 입장을 표명했다”고 설명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6월26일 아시아 순방을 떠나기 전 기자들에게 아시아 순방 기간에는 김정은 위원장을 만나지 않겠지만, “다른 형태(in a different form)로 그와 이야기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날 백악관 관계자는 다른 형태와 관련해 “김 위원장과 더 많은 서신을 주고받는 얘기를 했을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

지난해부터 북-미 대화, 남북관계의 결정적 순간에 친서가 눈길을 끌었다. 2018년 남북관계는 김 위원장의 친서로 시작해 친서로 마무리했다. 김 위원장은 2018년 2월 평창 겨울올림픽에 김여정 노동당 제1부부장을 보내 문재인 대통령에게 친서를 전달했다. 2017년까지 전쟁위기설이 떠돌던 한반도는 친서 전달 이후 분위기가 바뀌어, 세 차례 남북 정상회담이 열렸다. 지난해 12월30일 김 위원장은 문 대통령에게 친서를 보내 한반도 비핵화 의사 등을 밝혔다.

기자들 앞에 선 트럼프 대통령. AP 연합뉴스

기자들 앞에 선 트럼프 대통령. AP 연합뉴스

김일성도 김정일도 선호

김 위원장은 북-미 비핵화 협상 과정에서도 친서를 적극 활용했다. 그가 트럼프 대통령에게 보낸 친서들이 두 차례 북-미 정상회담 개최의 마중물 구실을 했다. 지난해 5월 첫 북-미 정상회담 개최를 준비하다 양쪽이 충돌해 트럼프 대통령이 갑자기 회담을 취소했다. 이에 김 위원장은 트럼프 대통령에게 친서를 보내 사태를 수습하고 북-미 싱가포르 정상회담을 성사시켰다. 올해 초에도 두 사람은 친서를 주고받은 뒤 2차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을 열었다.

김 위원장이 트럼프 대통령을 상대로 친서 외교를 펼치는 것은 최고지도자가 직접 해결하는 톱다운 방식이 북-미 대화에서 효과적이란 것을 알기 때문이다. 북한은 실권이 없는 실무자나 존 볼턴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같은 강경파 때문에 대화와 협상이 꼬이면 트럼프 대통령에게 친서를 보내 직접 해결을 요청했다.

북한은 왜 친서 외교를 펼치는 걸까?

북한은 자본주의국가처럼 기자회견이나 공개 연설 등 대외 메시지 전달 방식이 다양하지 않다. 간혹 언론에서 발표한 내용이 왜곡되거나 축약된 상태로 상대에게 전달되기도 한다.

이 때문에 북한 최고지도자는 상대 최고지도자에게 진심을 전할 때 직접 쓴 편지를 선호해왔다. 1990년대 초·중반 김일성 주석,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 빌 클린턴 대통령이 양국 관계 개선을 놓고 편지를 주고받았다. 2000년 이후 조지 W. 부시 대통령과 버락 오바마 대통령도 김정일 위원장과 친서를 주고받으며 북-미 관계 개선을 논의했다. 하지만 친서의 구체적인 내용이나 북한 반응 등은 공개되지 않았다.

친서는 곱씹어 생각하고 한 번 더 상대방의 입장을 헤아리는 편지다. 북한과 미국처럼 70년 넘게 적대와 갈등이 쌓인 관계라면, 분노와 복잡한 감정을 가라앉히고 침착하게 여러 번 고쳐 쓴 편지가 필요하다. 친서는 느리고 손이 많이 가더라도 진심을 담을 수 있다. 친서는 감정을 억제한 만큼 감동이 커진다. 특히 김정은 위원장, 트럼프 대통령처럼 감정이 격렬한 지도자에게 냉정한 편지가 유용하다. 친서는 의식(Ceremony)적인 측면이 있다. 인편으로 편지를 주고받는 것은 두 국가가 목적을 위해 노력한다는 걸 보여주는 극적인 효과가 있다.

유대관계가 없을 때

친서는 특히 유대관계가 없고 의사소통 경험이 부족한 나라끼리 많이 쓰인다. 오바마 전 대통령과 이란의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 최고지도자가 2014년 핵협상을 앞두고 비밀 편지를 주고받았다.

정상 간 친서는 강한 힘을 발휘한다. 한 글자 한 글자 정성 들여 눌러쓴 편지의 가치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돈 오버도퍼 전 기자가 쓴 책 을 보면, 1987년 6월 항쟁 당시 전두환 대통령이 6월19일 시위 진압에 군 병력을 동원하려고 했으나 로널드 레이건 당시 미국 대통령의 친서를 받고 철회했다고 나와 있다.

정상 친서는 외교 관례상 상호 비공개한다. 비공개를 전제로 한 친서에서는 솔직한 심정과 상대를 띄워주는 외교적 수사가 부담 없이 등장한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1985년 남북 정상회담을 추진하면서 김일성 주석에게 보낸 친서에서 “(김일성) 주석님께서는 광복 후 오늘날까지 40년에 걸쳐 조국과 민족의 통일을 위하여 모든 충정을 바쳐 이 땅의 평화 정착을 위해 애쓰신 데 대해, 이념과 체제를 떠나 한민족의 동지적 차원에서 경의를 표해 마지않는다”고 밝혔다. 이 내용이 당시 대북특사였던 박철언 전 정무장관의 회고록에서 공개되자 ‘종북의 원조는 전두환’이란 냉소가 나오기도 했다.

아날로그 방식인 친서 외교가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 아님을 거의 매일 자신의 일정과 감정을 트위터로 공유하는 트럼프 대통령이 보여주고 있다.

권혁철 한겨레평화연구소장 nur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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