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노동당 기관지 4월4일치 1~2면.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양강도 삼지연군을 현지 지도한 기사가 실렸다. 삼지연군은 백두산 입구에 있다. 북한에서 이곳은 김일성 주석의 “항일혁명활동 성지” “우리 인민의 마음의 고향”이라고 한다. 또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출생지로 선전하는 곳이다.
김정은 위원장은 지난해에만 세 차례 이곳을 방문했다. 그는 2013년 11월 집권 2년 만에 고모부(장성택) 처형을 결심할 때도, 김정일 국방위원장 3주기와 맞물려 본격적인 김정은 시대 출범을 앞둔 2014년 11월에도 이곳을 찾았다. 지난해에는 1차 북-미 정상회담 한 달 뒤인 7월과 평양 남북 정상회담을 한 달 앞둔 8월 삼지연군을 방문했다.
이번 시찰에서 김 위원장은 “삼지연군 꾸리기는 우리의 앞길을 가로막으려는 적대세력들과의 치열한 계급투쟁, 정치투쟁”이라고 말했다. 이를 두고 미국 주도로 이뤄지는 국제사회의 대북제재에 대한 불만을 우회적으로 드러냈다는 해석이 나왔다. 한발 더 나아가 김 위원장이 중요한 고비 때마다 이곳을 찾았다는 점에서 베트남 하노이 2차 북-미 정상회담이 합의 없이 끝난 뒤 중대 결심이 임박한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오기도 했다.
4월, 한반도 정세 분수령 예상이런 판단의 근거로 최대한의 절약과 자력갱생의 혁명 정신을 강조하는 최근 보도가 꼽혔다. ‘한 그램의 시멘트, 한 토막의 나무, 한 개의 못이라도 소중히 여길 것’(3월30일치), `자력갱생 간고분투의 혁명정신 발휘’(4월1일치), `자력갱생의 보검으로 인민의 낙원을 일떠세우시어’(4월2일치). 이 보도를 두고 북한이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 결렬 이후 강경 노선 선회를 내부적으로 결정하고 강화될 대북제재에 대비하려는 것으로 분석했다.
4월11일 미국 워싱턴에서 한-미 정상회담이 열린다. 같은 날 평양에서는 남쪽의 국회 격인 북한 최고인민회의 제14기 1차 회의가 열린다. 한반도 정세가 4월에 분수령을 맞을 것이란 예상이 많다. 민감한 시기라, 김 위원장의 삼지연 방문은 다양한 해석을 낳았다.
김 위원장의 삼지연 방문을 강경 노선 선회 같은 ‘포스트 하노이’ 정책 징후로 봐야 할까? 그렇지 않다는 해석이 만만찮다. 김 위원장이 북-미 정상회담이 ‘노 딜’(No deal·결렬)로 끝난 뒤 한 달여 만에 백두산이 있는 삼지연군을 찾은 것은 포스트 하노이 정책 방향의 일면을 보여준다는 데는 이견이 없다.
이번에 김 위원장이 방문한 장소가 눈길을 끈다. 건설 중인 삼지연군 읍지구 주택단지와 삼지연들쭉공장, 삼지연군 초급중학교, 삼지연감자가루생산공장 등을 둘러봤다고 이 4월4일 전했다. 김 위원장이 둘러본 곳은 민생 현장, 경제 현장이다. 통일부 당국자는 4일 김 위원장의 삼지연군 방문에 대해 “올해 첫 경제 현장 방문으로서의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김 위원장은 삼지연에서 20㎞가량 떨어진 ‘혁명의 성지’ 백두산에는 오르지 않았다. 이는 지난해 4월 ‘핵·경제 병진’ 대신 선택한 ‘경제건설 총력 집중’ 노선을 유지하겠다는 뜻이다. 11일 최고인민회의 제14기 1차 회의를 앞두고 ‘경제 집중 노선’을 거듭 확인하는 행보로 풀이된다. 최고인민회의는 지난해 예산 결산, 올해 예산 통과와 정부 조직 개편, 중대 국가 방침을 결정한다.
그는 삼지연 방문에서 먹는 문제 해결을 강조했다. 양강도 지역은 90%가 산지라 감자 농사 비중이 높다. 김 위원장은 “(감자가루)공장에서 수천t의 감자가루를 생산해 산같이 쌓아놓은 풍경을 환한 미소 속에 바라보시며, 온 나라 인민들이 덕을 볼 수 있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고 은 전했다. 또 김 위원장은 ‘2만t가량의 저장고 안에 빈자리를 찾아볼 수 없도록 가득히 쌓인 감자산을 보고 하늘의 별이라도 따온 듯 기뻐하면서’라고 (2018년 10월30일치)은 전했다. 그는 권력승계 완료 직후인 2012년 4월15일 평양에서 열린 열병식에 참가해 첫 공개 연설을 하면서 “다시는 인민들이 허리띠를 졸라매지 않고 사회주의 부귀영화를 누리게 하겠다”고 약속한 바 있다.
김 위원장의 삼지연 방문은 하노이 2차 북-미 정상회담 합의 무산 이후 미국의 압박에 맞서면서도, ‘경제 집중 노선’을 고수하며 “자력갱생 대진군”을 동력으로 경제적 어려움을 타개하겠다는 의지가 담겼다는 풀이가 많다.
그는 “삼지연군 꾸리기는 우리 국가의 위력, 경제적 잠재력의 과시”라고 밝혔다. 경제제재로 어려운 형편을 자력갱생으로 극복하고 미국의 일괄타결 요구를 수용하지 않겠다는 뜻이 읽힌다. 최근 북한은 중국, 러시아, 베트남 같은 사회주의국가들과 협력을 강조하고 유엔 기구에 식량 지원을 요청하며 대북제재 장기화에 대비하고 있다.
4월 안에 북-러 정상회담 가능성도 나온다. 김 위원장의 의전 담당인 김창선 국무위원회 부장이 지난 3월 모스크바를 방문했고, 블라디미르 콜로콜체프 러시아 내무부 장관은 지난 4월1일 평양을 방문했다. 올레그 멜니첸코 러시아 상원의원은 “김 위원장이 가까운 미래에 러시아를 방문할 것”이라고 말했다.
북 풍계리 사찰 수용, 미 부분 제재 완화 전망도북한의 포스트 하노이 정책 방향은 4월11일 열리는 최고인민회의 제14기 1차 회의나, 이 회의를 전후로 열릴 것으로 예상하는 노동당 회의들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날 것으로 보인다.
문재인 대통령은 4월11일 미국 워싱턴에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한-미 정상회담을 한다. ‘러시아 스캔들’로 국내 정치에서 발목이 잡혔던 트럼프 대통령이 그 상황을 벗어나면서 북-미 협상에 더 적극적으로 나설 가능성이 있다.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도 라디오 인터뷰에서 “몇 달 내에 3차 북-미 정상회담 성사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이 하노이에서 김 위원장에게 건넸다는 이른바 ‘빅딜 문서’가 ‘선 핵폐기, 후 보상’의 리비아식 해법이라, 북한과 미국의 생각 차이가 아주 크다. 이 간격을 어떻게 메우느냐가 관건이다.
문정인 대통령 통일외교안보특보는 북한이 공언한 풍계리 핵실험장 폐기 사찰을 수용하는 ‘첫걸음’을 뗀다면 미국도 부분적 제재 완화 등으로 호응할 것으로 전망했다. 문 특보는 4월4일 오전 한 국제학술회의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풍계리 핵실험장의 3분의 2를 파괴했다고 밝힌 사실 등을 언급하며 “(북한이) 사찰·검증을 통해 증명할 수 있다면 ‘긍정적 시그널’이 될 것이고, 트럼프 대통령도 이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여 북한의 첫걸음에 대응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북한이 그런(풍계리 사찰 수용 등) 행동을 보여준다면 당연히 미국 측은 상응 조치, 즉 (부분적) 제재 완화를 해줄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어 “개성공단이나 금강산 관광 재개 등 남북경협에 대한 제재를 풀어줄 여지가 있고, 문재인 대통령이 이를 트럼프 대통령에게 설득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행사에서 이도훈 외교부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은 “(비핵화) 협상의 근본적인 해결책은 제재가 아니다”라고 강조하면서, 비핵화 외에 평화체제, 북-미 관계 정상화, 신뢰 구축 등을 함께 논의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북-미 대화가 재개된다면 ‘첫 수확’을 얻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한-미 정상회담 이후 북한과 미국의 빈틈을 메우는 한국의 중재가 성공적으로 진행된다면, 대북특사를 보내거나 원포인트(One Point) 남북 정상회담 성사 가능성도 제기된다. 정성장 세종연구소 연구기획본부장은 “한국 정부가 한-미 정상회담 전 대북특사를 파견하거나 원포인트 판문점 남북 정상회담 개최로 김 위원장이 모든 비핵화 조치와 그에 따른 요구 사항을 협상 테이블에 올려놓도록 설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문 대통령은 트럼프 대통령이 한-미 정상회담 합의문이나 기자회견 형태로 ‘북한이 미국과 비핵화 로드맵에 합의하고 영변과 다른 지역의 핵시설 그리고 중장거리 미사일과 핵탄두 폐기를 시작한다면 미국도 북한의 비핵화 진전에 상응해 제재를 완화할 것’이라는 입장을 천명할 수 있도록 설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게다가 문 대통령이 트럼프 대통령으로부터 ‘북한이 비핵화 조치와 국제사회의 상응 조치에 대해 미국과 포괄적인 합의를 할 준비가 되어 있다면 평양을 방문해 김정은 위원장을 만날 의향이 있다’는 입장을 이끌어낼 수 있다면 이는 매우 큰 외교적 성과가 될 것이다. 북한으로서는 트럼프 대통령의 방북이 성사된다면 이를 김 위원장의 ‘탁월한 외교적 성과’로 선전할 수 있기 때문에 미국과의 협상에 더 적극적으로 나설 것이다.”(정성장 본부장)
통일부는 4월 중순쯤 남북 접촉을 예상한다. 4일 통일부 당국자는 ‘한-미 정상회담 전 남북 고위급 회담’ 등이 열릴 가능성에 대해 “북한도 대내적으로 (정치)행사가 있고, 북-미 협상도 추동해야 되는 측면도 있다. 우리도 한-미 정상회담이 잡혀 있는 등 전반적인 (상황을) 봐야 한다”고 말했다. 북한의 4월 정치행사(11일 최고인민회의, 15일 김일성 주석 생일)나 11일 한-미 정상회담 이후에 접촉하겠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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