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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희와 달리 충직한 가신 없는 이재용

총대 멘 가신 있었던 이건희는 형사처벌 위기 피했지만 이재용은 구속…

측근 특별대우가 역설적으로 가신을 사라지게 한 듯
등록 2018-10-06 18:31 수정 2020-05-03 04:29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맨 왼쪽)이 9월18일 평양에서 열린 남북 정상회담 첫날 만찬에서 현송월 삼지연 관현악단장(가운데), 가수 지코와 함께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청와대 제공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맨 왼쪽)이 9월18일 평양에서 열린 남북 정상회담 첫날 만찬에서 현송월 삼지연 관현악단장(가운데), 가수 지코와 함께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청와대 제공

‘이재용이 구속된 것은 아버지(이건희 회장)와 달리 가신이 없기 때문이다.’ 2017년 2월17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박영수 특별검사팀에 의해 구속된 직후 검찰 관계자들이 내놓은 촌평이다. 이건희 회장은 충직한 ‘가신’(家臣)들의 도움으로 형사처벌 위기를 모면했지만, 이재용 부회장은 그런 헌신적인 참모가 없어 구속을 피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가신’은 높은 벼슬아치의 집에 딸려 있으면서 그 벼슬아치를 받드는 사람을 가리키는 봉건시대 용어다. 글로벌 기업 이미지와는 조금도 어울리지 않지만, 이 회장은 과거 곤경에 처했을 때 이 가신들의 덕을 톡톡히 봤다. 2003년부터 2007년까지 무려 5년이나 걸린 ‘삼성에버랜드 전환사채 헐값 발행’ 사건 수사가 대표적이다. 당시 이 회장은 그룹 경영권을 장남인 이재용 부회장에게 물려주기 위해 에버랜드 전환사채를 헐값에 넘긴 혐의로 고발당했으나, 에버랜드 경영진이 대신 총대를 멘 덕에 기소를 면했다. 허태학, 박노빈 두 전·현직 사장은 검찰의 집요한 추궁에도 “회장님은 전혀 모르시는 일”이라고 딱 잡아뗐다.

이건희의 대표 가신 이학수와 김인주

에버랜드 경영진의 거짓 진술은 이학수 당시 삼성그룹 부회장과 김인주 사장의 ‘작품’이었다. 둘은 이 회장의 대표 가신으로 꼽힌다. 2007년 전 삼성 법무팀장 김용철 변호사는 양심고백을 통해 에버랜드 전환사채 헐값 발행 사건의 수사, 재판 과정에서 에버랜드 경영진의 증언 조작 장본인으로 이 두 사람을 지목했다.

김 변호사의 고백 중에는 이학수 부회장과 김인주 사장의 비중을 알 수 있는 대목이 여럿 있었다. 김 변호사는 언론 인터뷰 등에서 “권력은 최고 권력자와 떨어진 거리의 세제곱에 반비례한다”는 재미있는 말을 했다. 이건희 회장을 가장 가까이서 보좌하는 이학수 부회장의 막강한 권력을 표현한 말이었다. 이학수 부회장의 방은 당시 서울 태평로에 있던 삼성 본관 28층, 이건희 회장실 바로 옆이었다고 한다. 재무를 총괄하던 김인주 사장의 방은 27층에 있었다.

김 변호사의 양심고백으로 시작된 ‘삼성 비자금 사건’ 수사에서도 이학수 부회장과 김인주 사장은 가신의 진가를 발휘했다. 조준웅 특검의 수사로부터 이 회장을 보호하는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이 회장은 에버랜드 전환사채 헐값 발행의 주범으로 기소됐지만 대법원에서 무죄판결을 받았다.

하지만 이재용 부회장은 아버지와 달리 ‘인복’이 없었다. 오너 일가를 제외하고 사실상 그룹 내 1·2인자로 알려졌던 최지성 전 삼성미래전략실 실장(부회장)과 장충기 전 삼성미래전략실 차장(사장)은 이학수 전 부회장과 김인주 전 사장의 존재감에 훨씬 미치지 못했다. 이들은 검찰과 특검 수사 대응 전략을 제대로 마련하지 못해 검찰과 특검의 공격으로부터 이 부회장을 보호하지 못했다. 특검에 앞서 검찰 수사 단계에서 이미 뇌물 제공 혐의를 입증하는 장 전 사장의 문자메시지와 박상진 전 삼성전자 사장의 전자우편 등 주요 증거가 확보됐는데도,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 겁박을 당해 최순실씨 쪽을 지원했다’는 취지의 진술을 고집했다.

전략이 허술하면 상대에게 허를 찔리기 마련이다. 가장 약한 고리는 박상진 전 사장이었다. 박 전 사장은 최순실씨 쪽에 승마를 지원하는 일을 총괄했다. 그는 검찰에 처음 소환됐을 때 “박 전 대통령의 레이저 눈빛이 무서웠다”는 등 청와대로부터 겁박당했다는 취지로 진술했다. 검찰은 일단 그의 진술을 그대로 조서에 남긴 뒤 집으로 돌려보냈다.

삼성 가신들의 ‘전통’

최지성 전 삼성전자 미래전략실장(위쪽)과 장충기 전 미래전략실 차장이 국정 농단 사건 재판에 각각 출석하는 모습. 사진공동취재단/ 한겨레 김성광 기자

최지성 전 삼성전자 미래전략실장(위쪽)과 장충기 전 미래전략실 차장이 국정 농단 사건 재판에 각각 출석하는 모습. 사진공동취재단/ 한겨레 김성광 기자

검찰의 공격은 두 번째 소환 때 본격화됐다. 검찰은 박 전 사장에게 이미 압수수색으로 확보한 증거를 제시했다. 이 증거는 삼성이 최순실씨의 위상을 잘 알고 그룹 현안을 해결하기 위해 최씨 쪽을 지원했음을 입증하는 것이었다. 검찰은 박 전 사장의 진술을 이 증거와 일일이 비교하면서 그를 몰아붙였다.

박 전 사장은 ‘멘붕’에 빠졌다. 그는 검찰의 세 번째 소환에 “맹장 수술을 받아야 한다”며 응하지 않았다. 검찰의 예상치 못한 공격에 허를 찔리자 일단 시간을 벌어보겠다는 의도였다. 검찰의 바통을 이어받을 특검 수사가 좀더 수월할 것이라는 판단도 작용했다. 특검은 수사 기한이 정해져 있기 때문에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에 더 집중할 것으로 판단했다.

하지만 이는 오판이었다. 박영수 특검의 공격은 더 거셌다. 박영수 특검팀은 삼성 사건을 국정 농단 사건의 핵심으로 규정했다. 한국 사회의 고질적 적폐인 정경유착을 박근혜 정권의 국정 농단을 가능하게 만든 토양으로 본 것이다. 특검팀은 삼성과 재계로부터 “박근혜·최순실 특검이 아니라 삼성 특검”이라는 볼멘소리를 들을 정도로 삼성 사건을 파고들었다.

특검팀의 날선 공격에 삼성은 속수무책이었다. 최지성, 장충기, 박상진 ‘3인방’은 특검 조사에서 최순실씨의 딸 정유라씨 승마 지원에 ‘이재용 부회장이 개입돼 있다’는 취지의 진술을 했다. 이 부회장이 박 전 대통령 독대 뒤 정유라의 존재를 알고 승마 지원을 지시했다는 취지였다. 이는 이건희 회장 때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대 ‘사건’이었다. 오너 일가를 보호하기 위해서라면 자신이 구속되는 한이 있더라도 거짓 진술도 마다하지 않는 게 삼성 가신들의 ‘전통’이었다. 3인방은 이를 깨뜨린 최초의 가신인 셈이었다. 삼성은 큰 충격을 받았다. 삼성 안에서 3인방을 비난하는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뒤늦게 사태의 심각함(!)을 깨달은 3인방은 나중에 열린 1심 재판에서 특검에서 한 진술을 모조리 뒤집었다. 이재용 부회장을 보호하려는 전략이었지만 이는 오히려 독이 됐다. 재판부는 이들의 진술 번복에 ‘괘씸죄’를 적용해 최지성·장충기 전 사장에게 실형을 선고하고 법정 구속했다(박상진 전 사장은 집행유예). 이들은 2심에서 이 부회장과 함께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퇴직할 나이에 옥살이 대신할 이유 있겠나”

이재용 부회장도 자신의 참모들이 아버지 때의 가신들과 ‘결’이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걸까. 당시 수사 상황을 잘 아는 특검 관계자들에 따르면 이 부회장은 특검에 소환됐을 때 자신이 구속될 것을 어느 정도 예감했다고 한다. 어느 날 조사 도중 점심을 먹을 때의 일이다. 짜장면을 시킨 이 부회장에게 파견 검사가 ‘더 맛있는 음식을 주문해도 된다’고 했다. 이 부회장에 대한 일종의 배려였다. 하지만 이 부회장은 정중히 거절하며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 “제가 여기에 오래 있을 것 같아서 그러면 안 될 것 같습니다.” 이 부회장은 두 번째 영장실질심사를 받을 때 ‘영장전담판사의 표정을 보고 구속될 줄 알았다’고 나중에 검사들한테 말했다고 한다.

이재용 부회장에게 아버지 때의 가신이 없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세상이 그만큼 변했기 때문이다. 10년 전 삼성에버랜드 사건 때는 가신들이 총대를 멘 이유가 나름 있었다. 그때만 해도 허위 진술을 하더라도 괘씸죄가 적용되지 않아서 재판에서 집행유예로 줄줄이 풀려났다. 하지만 지금은 법원 분위기가 달라졌다. 오너 일가를 대신해 죄를 뒤집어쓰면 재판에서 예외 없이 실형이 선고돼 꼼짝없이 옥살이를 해야 한다. 국내 대기업의 한 고위 임원은 삼성의 분위기를 이렇게 전했다. “삼성의 핵심 참모들은 대부분 고액 연봉에 성과급까지 두둑하게 챙겨 재산이 많다. 더 이상 회사에 다닐 이유가 없다. 아무리 오너 일가가 잘 대해준다 하더라도 곧 퇴직할 나이에 옥살이를 대신해줄 이유가 뭐 있겠나.” 측근에 대한 특별대우가 역설적으로 충직한 가신을 사라지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검찰은 지난 9월27일 삼성 그룹의 노동조합 결성을 방해한 고위 임원과 실무자 등 32명을 무더기로 기소했다. 검찰은 수사 결과를 발표하면서 80년 동안 지속돼온 삼성의 ‘무노조 경영’이 마침내 법의 심판을 받게 됐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검찰이 ‘삼성 앞에만 서면 작아진다’고 조롱받던 시절을 생각하면 격세지감마저 느껴진다.

이병철 때부터 이어져온 ‘무노조 경영철학’

하지만 이번 수사 결과에 빠진 게 있다. 삼성 오너 일가에 대한 수사다. 기소된 이들은 실무자와 중간관리자, 고위 임원뿐이다. 이들이 삼성에 입사하기 전부터 반노조 범죄를 기획했을 리는 만무하다. 이들이 입사 후 알아서 노조 파괴를 실행했을까. 이들은 고 이병철 회장 때부터 이어져온 삼성 총수 일가의 ‘무노조 경영철학’을 실행했을 뿐이다. 더 이상 삼성 오너 일가를 위해 총대를 멜 가신도 없는데, 검찰의 ‘칼’이 또다시 무뎌진 탓일까.

이춘재 기자 cj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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