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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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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춘 조기 석방의 불편한 진실

대법원 재판 지연으로 항소심 형량 절반도 안 채우고 풀려난 원조 ‘법꾸라지’…

국정 농단 단죄 흐지부지되나
등록 2018-08-14 14:47 수정 2020-05-03 04:29
지난 8월6일 새벽 김기춘 전 대통령비서실장의 석방을 반대하는 시위대가 그가 탄 차량이 출발하지 못하도록 막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 8월6일 새벽 김기춘 전 대통령비서실장의 석방을 반대하는 시위대가 그가 탄 차량이 출발하지 못하도록 막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 8월6일 새벽 서울 동부구치소 정문을 나서던 김기춘 전 대통령비서실장은 구속 기간 만료로 자유의 몸이 된 기쁨을 채 맛보기 전에 200여 명의 시위대와 맞닥뜨렸다. 옛 통합진보당 지지자 등으로 구성된 시위대는 김 전 실장의 석방을 규탄하는 시위를 격렬하게 벌였다. 그가 탄 승용차의 앞유리가 깨지고 차체가 찌그러질 정도였다.

시위대 손에는 김 전 실장을 통진당 해산 주범으로 규정한 팻말이 들려 있었다. 실제 김 전 실장은 2014년 통진당 해산을 주도했다. 이 당에 소속된 이석기 전 의원의 ‘내란음모 사건’ 등을 구실로 삼아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 눈엣가시였던 정당을 합법적으로 해산시켜버린 것이다.

그가 이끌던 청와대 비서실은 법무부를 움직여 헌법재판소에 정당해산심판을 청구한 뒤 치밀한 재판 전략으로 헌법재판관 8대1의 압도적인 해산 결정을 받아냈다. 주사파 운동권으로 활동하다 전향한 의 저자 김영환씨 등 통진당 내부 사정을 잘 아는 인사들을 대거 증인으로 동원해 보수 성향 재판관들의 심증을 굳히게 만들었다. 김 전 실장이 과거 중앙정보부 대공수사국장과 서울지검 공안부장 등으로 근무하면서 갈고닦은 ‘공안통’의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한 것이다. 그의 활약으로 국회의원 5명과 당원 5만여 명을 보유한, 진보정당의 맏형 격인 공당이 하루아침에 연기처럼 사라져버렸다. 옛 통진당 당원과 지지자들이 그의 ‘조기 석방’에 격렬하게 항의한 것은 나름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박영수 특검, “재판 빨리 마쳐달라”

김 전 실장의 석방을 반대한 것은 통진당 지지자뿐만이 아니다. 그를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작성과 실행 혐의로 구속 기소한 박영수 특별검사는 앞서 7월30일 ‘국정 농단 사건 재판을 빨리 마쳐달라’는 의견서를 대법원에 냈다. 박 특검은 의견서에서 “국정 농단 사건들을 기소한 지 1년6개월여가 지난 지금 재판 장기화로 다수의 주요 구속 피고인이 재판이 종료되기도 전에 구속 기간 만료로 속속 석방되고 있다. 국정 농단 사건의 신속한 해결을 희망했던 국민의 염려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고 밝혔다. 검찰도 8월1일 김 전 실장이 친정부 성향 문예인 등을 불법 지원한 ‘화이트리스트 사건’과 ‘세월호 보고 조작’ 혐의로 기소돼 재판받는 점을 들어 그의 구속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는 의견을 냈다.

김 전 실장뿐 아니라 함께 기소된 조윤선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도 9월 말에 구속 기간이 만료된다. 박 특검팀은 이들의 석방이 국정 농단 사건에 대한 단죄를 흐지부지하게 하는 계기가 될까 우려한다. 구속 기간 만료로 풀어준 피고인에게 다시 실형을 선고해 형기를 마치도록 하기는 결코 쉽지 않기 때문이다. 더욱이 김 전 실장은 78살의 고령이다. 서울 동부구치소에서 풀려날 때 멀쩡하게 걸어 나왔던 그는 앞서 1·2심 재판 때 환자복을 입고 휠체어에 의지해 법정에 나와 “사복 입을 기력도 없다” “바지 입다 쓰러졌다” “목욕도 못한다” 등 건강 상태가 좋지 않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는 대법원 상고심에서도 건강 상태가 좋지 않음을 부각시킬 것으로 보인다.

대법원은 그의 사건을 전원합의체로 넘겨 시간에 쫓기지 않고 충분히 심리하겠다는 의지를 내비쳤다. 박영수 특검팀은 이런 대법원의 조처를 납득할 수 없다. 특검팀 관계자는 “블랙리스트 사건은 1·2심에서 핵심 쟁점을 놓고 충분히 다퉜기 때문에 대법원에서 오래 끌 이유가 없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나 최순실씨 재판을 기다릴 필요가 없는데도 대법원이 이 사건 심리를 서두르지 않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박근혜·최순실 특검법은 재판 기간과 관련해 1심은 공소제기일로부터 3개월, 2·3심은 앞선 선고일로부터 각각 2개월 안에 선고해야 한다고 규정한다. 첫 공소제기일로부터 7개월 안에 확정판결을 내리도록 한 것이다. 물론 사건 규모를 고려하면 7개월 안에 3심까지 끝내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기한을 정한 것은 국민적 의혹이 집중된 사건인 만큼 되도록 신속하게 처리하라는 취지였다. 하지만 대법원의 태도는 이를 전혀 염두에 두지 않고 있음을 방증한다.

국정원, 세월호… 잇따른 공작 의혹들
2014년 7월 김기춘 비서실장이 박근혜 대통령과 함께 청와대 행사장에 들어서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2014년 7월 김기춘 비서실장이 박근혜 대통령과 함께 청와대 행사장에 들어서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김 전 실장은 국정 농단 사건의 핵심 관계자일 뿐만 아니라 박근혜 정권의 민주주의 역주행을 진두지휘한 인물이다. 옛 통진당 지지자나 박영수 특검 같은 당사자들 말고도 그의 조기 석방에 분노하는 사람이 많은 이유다.

그는 2013년 8월 박근혜 정권이 국가정보원 댓글 조작 사건으로 위기에 몰렸을 때 구원투수로 청와대에 입성했다. 당시 채동욱 검찰총장이 이끄는 검찰은 원세훈 국정원장에게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를 적용해 구속영장 청구를 시도하는 등 대통령의 역린을 정조준하고 있었다. 김 전 실장은 대통령비서실과 국정원의 역량을 총동원해 채 총장을 낙마시켰다.

그의 진가는 이듬해 4월 세월호 참사 때 빛을 발했다. 그가 이끄는 청와대 비서실은 구조 실패에 대한 정권 책임론이 불거지는 것을 막기 위해 대대적인 공작에 나섰다. 김영한 당시 민정수석이 남긴 업무수첩의 그해 7월부터 10월까지 메모를 보면 그가 어떻게 비서실을 독려했는지 자세히 나온다. 먼저 7월13일 메모를 보면 그의 지시 내용이 “세월호 특별법-국난 초래-법무부, 당과 협조 강화” “좌익들 국가기관 진입 욕구 强(강)”이라고 요약돼 있다. 세월호 진상 규명을 위한 특별법은 국난을 불러오기 때문에 법무부와 여당과 협조해 대응해야 하고, 특별조사위원회에 진보 성향 인사들이 참여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는 취지다.

7월18일에는 그가 박 전 대통령의 ‘7시간 의혹’과 관련해 “알지도 알려고도 않는다. 자료 제출 불가”라고 지시한 걸로 나온다. 당시 야당을 중심으로 박 전 대통령의 7시간 관련 의혹을 조사할 움직임을 보이자 이에 대한 대응을 지시한 것이다. 김 전 실장은 당시 국회 운영위원회 등에 출석해 야당 의원들의 박 전 대통령의 7시간 행적을 묻는 질문에 “모른다. 대통령이 경내에 있으면 어디든지 대통령 집무실”이라고 답해 여론의 질타를 받았다.

그는 8월23일 “자살 방조죄. 단식은 만류해야지 부추길 일 ×(아니다). 국민적 비난이 가해지도록 언론 지도”라고 지시하는가 하면, 9월에는 세월호 유가족의 ‘대리기사 폭행 사건’이 일어나자 “남부지검 고발-엄정” “철저 지휘” “지휘권 확립토록” 등의 지시를 내렸다. 세월호 유가족을 궁지에 몰기 위한 이 공작으로 유가족들은 큰 상처를 받았다. ‘일베’ 등 극우 세력은 유가족들을 “자식들을 팔아 돈을 벌려고 한다”며 파렴치한 집단으로 몰고 갔다.

그의 석방이 예사롭지 않은 이유

김 전 실장은 2014년 11월 ‘정윤회 문건’ 사건이 터졌을 때도 검찰 수사를 문건 유출 수사로 둔갑시켜 무난하게 처리했다. 그는 이 과정에서 자신의 후계자를 발굴했다. 우병우 당시 민정비서관은 김 전 실장의 지시에 따라 최고권력자의 입맛에 맞게 사건을 처리하는 수완을 보여줬다. 그는 ‘리틀 김기춘’이라는 별명을 얻으며 곧바로 민정수석으로 발탁됐다.

김 전 실장은 정권의 눈에 거슬리는 인사들을 가만두지 않았다. 가능한 모든 자원을 동원해 철저하게 탄압했다. 이는 그가 박정희 정권을 비롯한 독재정권 아래서 ‘공안통’ 검사로 출세 가도를 달리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몸에 밴 것이다. 그는 블랙리스트 재판에서 이를 숨김없이 드러냈다. 그는 항소심 최후진술에서 “자유민주주의 수호라는 헌법적 가치를 위해 직무를 수행하다 벌어진 일”이라며 블랙리스트 관련 지시가 자신의 소신에 따른 것이었음을 분명하게 밝혔다.

그는 공안통으로 출세할 싹수를 일찌감치 보여줬다. 1974년 30대 중반에 중앙정보부 대공수사국장에 발탁된 뒤 이듬해 11월22일 직접 발표한 ‘북괴 간첩단 학원 침투 사건’이 대표적이다. 당시 일본에서 유학 온 동포 학생들이 북한의 지령을 받아 국내 대학에 침투해 ‘대남 공작’을 벌였다는 게 수사 결과였다. 그는 기자들과의 일문일답에서 “최근 수년간 대학가에서 벌어졌던 데모가 북괴 간첩의 배후 조종에 의한 것임을 증명한 케이스”라며 당시 학원가와 재야를 중심으로 벌어진 유신 반대 시위를 북한의 지령에 따른 것으로 몰아갔다. 하지만 2016년 서울고등법원은 당시 형사처벌을 받았던 피해자들 중 재심을 청구한 이들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중앙정보부의 고문에 의한 조작 사건이라는 이유에서였다. 대법원은 이듬해 3월 이들의 무죄를 확정했다.

김 전 실장은 자신이 지휘한 간첩 조작 사건의 피해자들이 인고의 세월을 보내는 동안 승승장구했다. 그는 1988년 최초의 임기제 검찰총장을 지냈고, 3년 뒤에는 법무부 장관에 올랐다. 검찰을 떠난 뒤에는 정치인으로 화려하게 변신해 보수정당의 극우화를 이끌었다.

탁월한 일처리 능력과 뛰어난 정무 감각을 갖춘 그는 과거 검찰의 주류 세력이 닮고 싶어 하는 ‘롤모델’이었다. 그가 2016년 말 국정 농단 사건 수사 대상에 올랐을 때 당시 검찰 고위 간부들 사이에서는 “(김 전 실장의) 말을 받아적기만 해도 훌륭한 보고서가 된다” “일 처리 능력만큼은 존경하지 않을 수 없다”는 등의 말이 나왔다. 일부 검찰 간부들은 “대통령비서실장의 역할에 충실했을 뿐”이라며 그를 변호하기도 했다. 그를 ‘민주주의 파괴자’로 보는 여론과 동떨어진 인식을 가진 집단이 법조계에 있다. 그의 ‘조기 석방’이 예사롭지 않게 보이는 이유다.

이춘재 기자 cj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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