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순서
<font color="#C1C1C1">① 가난과 싸우는 여성들</font>
<font color="#C1C1C1">② 젠더 비즈니스의 모범생</font>
<font color="#00847C">③ 여성들이 만드는 미래</font>
“슬라맛 파기!”(안녕하세요!)
5월22일 인도네시아 브카시에 있는 ‘자바라 아카데미’. 이곳은 농식품을 생산·판매하는 사회적기업 ‘자바라’에서 운영하는 농업학교다. 연노란색 히잡(이슬람 여성들이 머리와 목 등을 가리기 위해 쓰는 것)을 쓴 티틱(22)이 37℃ 넘는 무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야외 작업장에서 수수알을 하나씩 뜯고 있었다. 기계를 쓰지 않고 수작업으로 공을 들인다. 판매용으로 나갈 수수를 수확하는 것이다.
가정 형편이 어려워 중학교까지만 다녔다는 티틱은 이곳에서 멈췄던 학업을 다시 하고 있다. “공동생활을 하며 유기농법, 농업관광, 전통 재배법을 배우고 있다. 자바라의 식품을 만드는 일도 한다. 그 덕에 한 달에 90만루피아(약 6만9천원)를 받는다. 이 중 50만루피아(약 3만8천원)를 집에 보낸다.” 티틱은 이곳에서 공부한 뒤 고향 치안주르로 돌아가 체험농장을 만들고 싶단다. 새롭게 가슴에 품은 꿈이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미래의 농부를 키우다</font></font>티틱 같은 ‘미래의 농부’를 키우는 자바라는 헬리안티 힐만(48) 대표가 2008년 8월에 설립한 사회적기업이다. 변리사인 헬리안티는 농업 종사자들의 법률 상담을 자주 하면서 농업에 관심이 쏠렸다. 다양한 작물과 종족·지역에 따라 다른 농사법을 알았다. 인도네시아에는 300여 종족이 있어 다양한 언어와 문화를 갖고 있다.
“인도네시아에 7천여 종의 벼가 있다. 현재는 팔리는 작물만 키우다보니 1천여 종으로 줄었다. 점점 사라지는 전통 작물을 보존하고 소작농들의 삶을 풍요롭게 할 방법을 고민했다. 그 고민 속에서 자바라가 탄생했다.”
그는 밀림, 섬 등 여러 지역을 다니며 많은 소작농을 만났다. 처음에는 언어도 문화도 다른 그들과 소통하는 게 쉽지 않았다. “사업에서 제일 중요한 게 사람과의 대화와 교류라고 생각한다. 여성이 가진 감수성과 소통력이 이런 활동에 큰 도움이 된다. 현재 자바라와 함께하는 소작농이 5만2천여 명이다.”
그는 농작물을 제품으로 만들기 위한 작업도 한다. 코코넛오일, 모링가 누들 등 자바라의 상품은 900종이다. 이 중 250종이 미국과 유럽에서 유기농 인증을 받았다. 10년 새 매출이 크게 올랐다. 2008년 매출이 3억8천만루피아(약 3천만원)였는데 2017년에는 415억1천만루피아(약 32억3천만원)를 기록했다. 미국, 일본, 한국 등 22개국에 수출하고 있다. 올해는 남아프리카 시장으로도 진출할 예정이다.
자바라의 헬리안티 대표뿐만 아니라 인도네시아에선 여성 사회적기업가의 활약이 두드러진다. 사회적기업을 지원하는 ‘인스텔라’의 공동설립자 디안 울란다리는 “지난해 지원한 사회적기업이 55곳인데 이 중 여성 최고경영자가 약 40%를 차지했다. 올해는 사회적기업이 78곳으로 늘어, 이들 기업의 여성 최고경영자 비율이 51%로 늘어났다”고 말했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생계 책임져야 하는 여성들</font></font>무슬림이 80%를 넘는 세계 최대 이슬람 국가인 인도네시아에는 여성 강제 조기 결혼 등 악습이 남아 있다. 교육과 금융서비스도 제한됐다. 하지만 최근 여권 신장 바람이 불면서 여성들의 사회활동이 늘고 있다. 국제 컨설팅·금융 자문업체 딜로이트 LLP가 최근 64개국 7천여 기업을 조사한 보고서를 보면, 2016년 인도네시아는 여성 임원 증가율이 4%를 훌쩍 넘었다. 아시아 11개국(한국·인도·인도네시아·대만·말레이시아·필리핀·중국·타이·싱가포르·일본·홍콩) 중에서 두 번째로 높은 증가율을 보였다. 반면 한국은 증가율이 1%도 안 된다.
은행에서 일했던 제지에 세티아완(29)은 회사를 그만두고 2015년 소상공인에게 금융 등을 지원하는 사회적기업 ‘간뎅탄간’을 설립했다. “인도네시아 소상공인 80%가 은행 거래를 할 수 없다. 벌이도 일정치 않고 담보도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높은 이자를 내야 하는 사금융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제지에는 가난의 굴레에 갇힌 소상공인을 도울 자금 투자자를 모으고 지역의 가난한 소상공인들을 찾고 멘토링을 할 트러스티(trustee·기금 위탁 운영자)를 모집했다. 그리고 소상공인 600여 명에게 자본금을 빌려줬다. 이들 소상공인 80%가 가족 생계를 책임지는 여성이다.
“학교에서 작은 매점을 하는 65살 할머니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처음에 400만루피아(약 31만원)를 빌렸는데 그걸 6개월 안에 갚고 다시 1천만루피아(약 77만원)를 빌렸다. 그분은 대출받은 돈으로 다른 메뉴를 개발해 팔아 장사가 잘됐다고 한다.”
브카시에 사는 리린(32)은 노점에서 인도네시아 음식 론통(쌀을 바나나 잎에 싸서 찐 것) 등을 판다. 론통 한 개에 2천루피아(약 154원)이다. “집을 사면서 은행에서 빌린 돈을 다달이 350만루피아(약 27만원)씩 갚아야 한다. 앞으로 13년 동안 내야 한다. 중학생과 초등학생인 두 아이의 학비도 많이 든다. 남편의 월급이 400만루피아(약 31만원)인데 빚 갚고 나면 남는 돈이 없다. 생활비를 마련하기 위해 나도 일을 해야 한다.”
지난해 리린은 간뎅탄간에서 1천만루피아(약 77만원)를 대출받았다. 그 덕에 세탁기를 사서 세탁 일도 함께 한다. 벌이가 전보다 좋아졌다. “경제적 부분이 점점 나아지고 있다. 그리고 간뎅탄간을 통해 만난 트러스티가 이어준 다른 소상공인들과 커뮤니티를 만들었다. 형제가 새로 생긴 것 같다. 그들과 장사하면서 힘든 점도 이야기하고 출입금 장부 쓰는 것도 배운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미숙아에게 모유 주는 ‘락타셰어’</font></font>간뎅탄간의 트러스티인 네나(40)는 같은 지역에 사는 가난한 소상공인을 돕는 일을 시작했다. “남편들이 일정한 직업이 없어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여성이 많다. 그들은 집에서 과자를 만들거나 바느질한 걸 판다. 장사를 하고 싶어도 자본금이 없어 어려움을 겪는다. 이런 분들이 일할 수 있게 돕고 싶었다. 이웃의 어려움을 그냥 지나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의사인 메랄다 닌디아스티(37)는 2017년 5월 모유 기증자와 수급자를 이어주는 사회적기업 ‘락타셰어’를 만들었다. 아이를 낳은 여성들의 모유 수유를 상담하면서 모유가 부족한 사람과 반대로 모유가 많은 사람을 연결하는 일을 하고 싶었다. 애플리케이션으로 모유 관련 의학 상담을 해주고 지역별 모유 연결망을 만들었다. “지금까지 300∼400명이 모유를 기증했고, 모유를 받은 사람은 45명이다. 그중 엄마가 몸이 좋지 않아 모유를 먹지 못한 아이가 있다. 3.5kg으로 태어났는데 두 달 새 몸무게가 2.9kg이 됐다. 이 아이는 기증자 4명에게 모유를 받아 생후 5개월 때는 몸무게가 7.1kg으로 늘었다. 엄마를 잃은 미숙아도 있는데 한 기증자에게 두 달 동안 20ℓ의 모유를 받았다. 건강하게 잘 자라고 있다.”
메랄다는 모유 저장고 대여와 수유부 용품 판매 사업도 하고 있다. 이 사업의 수익금 3∼5%를 락타셰어 운영비로 쓰고 있다. 기증자의 모유 검사비도 이것으로 충당한다. “내 진료실에 오는 환자뿐 아니라 모든 사회 구성원을 위해 서비스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지금 하는 이 일은 인도네시아의 미래인 아이들을 위한 것이라고 믿는다. 모유가 필요한 아이들이 모유를 먹으며 건강해지고 안정감을 얻을 수 있다. 난 오늘보다 내일 더 많은 사람들을 도울 것이다.”
보고르에 사는 산드라 알피나(27)는 2015년 5월부터 케일 등 채소를 스낵으로 만드는 사회적기업 ‘순크리스프스’를 운영하고 있다. 석유·가스 채굴업체에서 일했던 남편 리키(30)도 회사를 그만두고 지난해부터 그의 일을 돕고 있다. “남편과 같은 업종에서 일했다. 직장 다닐 때는 야근도 자주 하고 바빠서 내 몸을 챙길 여유가 없었다. 몸도 마음도 지쳐갔다. 2014년 9월 회사를 그만뒀다. 그 뒤 건강한 식생활을 하다보니 자연스럽게 건강식품에 관심 갖게 됐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아이들을 위해 건강식품 만들기</font></font>산드라는 건강에 좋은 채소와 유기농 식품을 찾아다녔다. 자신이 직접 건강에 좋은 식품을 만들고 싶었다. 주위에는 해로운 식품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슈퍼마켓에 화학첨가물이 많이 들어간 과자가 많다. 아직까지 인도네시아에는 식품첨가물 허용 기준 등 규제가 없는 실정이다.”
사업을 처음 하는 산드라는 새롭게 배워야 할 게 많았다. 사업 세미나도 가고 경영관리 등을 공부했다. “지난해 12월 인도네시아 비즈니스 커뮤니티 포럼에 가서 ‘100g의 고기가 우리 식탁에 오기까지’라는 다큐멘터리를 봤다. 과도한 육류 소비로 인한 지구온난화, 동물복지 문제를 알게 되었다. 그걸 본 뒤 채식주의자가 됐다.” 그리고 산드라가 사업하면서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이윤을 사회와 나누는 것이다. 현재 수익금의 3%는 기아 아동을 돕는 일에 쓴다.
여성 리더로서 경력을 쌓아가는 산드라는 주위 사람들에게도 좋은 롤모델이 되었다. “인스타그램에 내가 하는 일을 올리면 팔로어들이 ’나도 같이 하자’ ‘여자가 사업하는 모습이 멋있다’라고 글을 올린다. 나로 인해 영감을 받아 일을 시작한 분도 있다.” 산드라는 좀더 회사가 성장하면 수유실이나 엄마 직원들이 소통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할 계획이다. 여성들이 일하기 편한 사회적기업을 만들고 싶은 것이다.
자카르타·브카시·보고르(인도네시아)=<font color="#008ABD">글·사진</font> 허윤희 기자 yhher@hani.co.kr<font color="#A6CA37">사회적기업 지원 ‘인스텔라’ 공동설립자 디안 울란다리 인터뷰</font>
여성연대의 힘으로
디안 울란다리(38·사진)는 2017년 사회적기업을 지원하는 ‘인스텔라’를 만들었다. 인스텔라는 그동안 인도네시아에 있는 사회적기업 78곳에 사업 개발을 지원하고 투자자를 연결해줬다. 그는 지난 17년 동안 예술·교육 분야에서 컨설팅, 마케팅, 홍보 업무를 한 경험을 바탕으로 사회적기업의 멘토 역할을 하고 있다. 7월4일 서울시청 다목적홀에서 열리는 아시아청년사회혁신가포럼에 사회자와 패널로 참여할 예정이다. 5월23일 그를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만났다.
인도네시아 사회적기업의 현주소는.
사회적기업이 뭔지 모르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최근 젊은 사람들이 외국 유학에서 돌아와 사회적기업을 많이 만들고 있다. 사회문제를 개선하기 위해 사회적기업이 필요하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인도네시아에 사회적기업이 2천 개가 넘는데 자카르타에 30%, 그 외 지역에 70%가 있다.
인도네시아 여성들은 어떤 문제를 겪고 있나.
빈곤·건강·교육, 세 가지 문제를 꼽을 수 있다. 가난해서 아파도 병원에 못 가고 학교도 못 다닌다. 예를 들어 아들과 딸이 있는 집에서 한 명만 학교에 보낼 수 있다면 아들만 학교에 보낸다. 딸은 일찍 결혼을 시키거나 돈을 벌게 한다. 제도적 제약도 있다. 주부는 통장 하나도 마음대로 만들지 못한다. 남편의 세금납부번호가 필요하다.
여성 사회적기업가를 위해 어떤 활동을 하는가.
여성 사회적기업가뿐 아니라 일반 기업의 여성 최고경영자(CEO)를 위한 커뮤니티를 만들었다. 사회활동을 하며 자신이 겪은 일을 이야기하고 힘든 점에 대해 조언을 구한다. 그 자리에서 여성들은 “괜찮아, 네가 잘못한 게 아니야. 그럴 수 있어”라며 위로해준다. 서로 응원하고 지지하며 여성 연대를 만들어간다.
인도네시아 사회적기업의 성장 가능성을 어떻게 보나.
요즘 사회적 이슈가 낙후된 교육 환경과 건강이다. 이런 사회문제를 해결하려는 사회적기업이 생겨나고 있다. 이들의 활동이 아직은 미약하지만 앞으로 크게 성장할 것으로 기대한다.
사회적기업이 갖춰야 할 요건은 무엇인가.
사회적기업이 되기 위해서는 사회문제를 의식해야 할 뿐만 아니라 직원 복지도 고려해야 한다. 직원들이 일과 가정에서 균형 잡힌 삶을 살 수 있도록 애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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