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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LGBT!  가장 평등한 이력서

성소수자 채용 플랫폼 만든 일본 청년 사회적기업가 호시 겐토
등록 2018-06-07 04:30 수정 2020-05-02 19:28
지난 5월15일 일본 도쿄에서 만난 호시 겐토(오른쪽)와 성소수자 채용 플랫폼 ‘잡레인보우’를 통해 취업한 나카소네 다다시. 호시는 지난해 6월 손정의 일본 소프트뱅크 회장이 육영재단을 설립해 선발한 일본의 차세대 리더 96명 가운데 한 사람으로 뽑혔다.

지난 5월15일 일본 도쿄에서 만난 호시 겐토(오른쪽)와 성소수자 채용 플랫폼 ‘잡레인보우’를 통해 취업한 나카소네 다다시. 호시는 지난해 6월 손정의 일본 소프트뱅크 회장이 육영재단을 설립해 선발한 일본의 차세대 리더 96명 가운데 한 사람으로 뽑혔다.

6·13 지방선거를 앞두고 한국에선 ‘동성애·동성혼 개헌 반대 국민연합’이라는 혐오단체가 활동하고 있다. 이들은 6·13 지방선거에 출마한 광역단체장·교육감 후보 140여 명을 설문해 ‘동성애·동성혼에 반대한다’고 밝힌 후보들을 공개했으며, ‘동성애가 흡연보다 해롭다’(김문수 서울시장 자유한국당 후보) 등 혐오발언을 서슴지 않는 후보를 지지하고 있다. “세계 곳곳에서 성적 지향과 성별 정체성을 이유로 개인에게 가해지고 있는 폭력적이고 차별적인 행위들에 대해 심각한 우려를 표명”한 2011년 6월 유엔인권이사회 결의안에 ‘찬성표’를 던진 한국에서 버젓이 벌어지는 일이다.

가장 앞서나가는 일본

유엔인권이사회 결의안 채택 때 한국과 똑같이 찬성표를 던진 일본에는 ‘LGBT 정치인’이 있다. LGBT는 레즈비언, 게이, 양성애자, 트랜스젠더의 초성을 딴 말로 성소수자를 일컫는다. 2003년 최초의 트랜스젠더 지방의원 가미카와 아야(50)가 일본 도쿄도 세타가야구에서 당선됐다. 이후 LGBT 지방의원들이 꾸준히 나왔고, 2015년 11월 도쿄의 시부야구와 세타가야구는 동성혼의 효력을 인정하는 ‘동성커플 파트너십 인정서’를 발급하기 시작했다. 지난해 7월엔 LGBT 지방의원들의 모임 ‘LGBT 지자체 의원 연맹’이 발족했다. LGBT와 관련해서 일본은 한·중·일 가운데 가장 앞서나가는 국가다.

지난 5월15일 일본 도쿄에서 만난 호시 겐토(25)는 LGBT와 관련해 일본이 한국을 압도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인물이다. 호시는 2016년 LGBT를 위한 기업 평판 공유 사이트 ‘잡레인보우’(jobrainbow.net)를 만들었다. 잡레인보우를 통해 일본 기업 내에 은밀하게 잠복해 있던 LGBT 차별과 혐오 사례가 드러났다. 스타벅스 일본이 대표적이다. LGBT 직원이 잡레인보우에 나쁜 평가를 올린 것을 계기로 스타벅스 일본은 동성 배우자에게 이성 배우자와 동일한 복리후생을 제공하고, LGBT 차별 금지 규정을 새로 만들었다. 호시는 지난 3월 미국 경제잡지 가 선정한 ‘2018 아시아의 30살 미만 리더 30인’에 뽑혔다.

호시를 사회적기업가로 만든 것은 LGBT로서, 사회적 소수자로서 차별당한 경험이었다. “중학교 때 게이라는 이유로 이지메(집단괴롭힘)를 당했고, 결국 학교를 제대로 다니지 못했어요. 그때는 LGBT라는 단어가 있는지도 몰랐죠. 대학에 들어가서 LGBT 동아리를 했고 그 공동체 안에서 비로소 안전하다고 느꼈어요.” 그런데 20대 LGBT에게는 10대의 사회적 차별보다 더 무서운 ‘경제적 차별’이 기다리고 있었다. LGBT임을 밝히고 취업할 수 있는 곳이 거의 없었다. LGBT 처지에선 생계유지가 불가능했다. “취업 시기가 되어 트랜스젠더 선배가 구직 활동을 포기하는 것을 보았어요. 면접관에게 ‘너 같은 사람은 필요 없으니 돌아가라’라는 폭언까지 들었대요.” 호시가 제시한 자료에 따르면, 구직할 때 외모·복장·행동 등 겉으로 표현되는 성적 특징이 법적 성별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어려움을 겪는다고 응답한 비율이 비LGBT는 6%에 불과한 반면 동성애자는 44%, 트랜스젠더는 70%였다.

마이크로소프트(MS)사에서 인턴십을 하며 LGBT 사회에 존재하는 취업 정보 격차의 문제에 눈뜬 것도 호시가 잡레인보우를 창업한 계기였다. “마이크로소프트사 안에 LGBT 동아리가 있어요. 직원 20명이 멤버였죠. 레즈비언 직원이 동성 파트너랑 결혼해 회사로부터 축의금도 받았어요. 이것은 사내에 들어가지 않으면 모르는 정보잖아요. 이런 정보를 LGBT 사회와 공유해야겠다고 생각했죠.”

가족에게 못한 커밍아웃을 회사에서

세계적으로 볼 때 LGBT는 인권 의제를 넘어 경제 전략이 된 지 오래다. 구글·애플·스타벅스·나이키·아디다스 등 글로벌 기업은 LGBT를 기업 브랜드 가치를 높이는 마케팅 수단으로 활용해왔다. 이른바 ‘레인보우 마케팅’이다.

일본 기업도 여기에 보조를 맞추고 있다. 2015년 일본 광고회사 덴쓰는 일본 LGBT 시장 규모가 6조엔(약 60조원)이라는 조사 결과를 발표하며 ‘핑크 머니’(LGBT의 구매력을 말함)에 주목했다. 2016년 11월 일본에서 처음 LGBT 친화 기업 목록인 ‘프라이드 인덱스’가 발표됐다. 마이크로소프트나 유니레버 등 글로벌 기업 말고도 일본항공·파나소닉·소니·후지쓰·라쿠텐 등 일본 토종 기업까지 모두 53곳이 LGBT평등지수 최고 레벨인 ‘골드’를 받았다. 지난해 5월엔 2020년 도쿄 올림픽·패럴림픽 조직위원회가 올림픽에 물품·서비스를 제공하는 모든 기업에 LGBT 직원에 대한 차별 금지 규정을 요구했다.

2016년 창립한 잡레인보우가 ‘고급’ 취업 정보와 LGBT 친화 기업 평판을 공유하는 사이트였다면, 2017년 6월 연 ‘아이추즈’(ichoose.jp)는 LGBT 구직자와 LGBT를 채용하기 원하는 기업을 연결하는 구인·구직 플랫폼이다. 이곳에서 LGBT는 자신의 성정체성을 분명히 밝히는 ‘성평등 이력서’를 기업에 제출할 수 있다. 아이추즈가 제공하는 성평등 이력서를 보면 ‘성별’의 경우 남성과 여성 말고도 트랜스젠더여성(MTF), 트랜스젠더남성(FTM)을 포함해 6가지 추가 항목이 제시됐다. 아이추즈 기업 구인광고에는 LGBT를 위해 운영하는 복리후생 제도와 소수자 친화적인 사내 문화를 소개하는 항목이 필수로 포함돼 있다. 지난 1년 동안 80여 기업이 아이추즈를 통해 ‘LGBT 인재’를 원한다는 광고를 게시했다. “절반 정도는 대기업이에요. 우리 전략은 대기업 중심입니다. 작은 기업이 많으면 사람들이 잘 안 찾아 브랜드 가치를 높일 수 없으니까요. 의도적으로 대기업, 외국계 기업, 정보기술(IT) 기업 등을 받으려고 합니다.”

이날 호시와 함께 만난 나카소네 다다시(21)는 잡레인보우 덕분에 가족에게도 하지 못한 커밍아웃을 회사에서 할 수 있었다고 했다. 그가 지난 4월부터 인턴십을 시작한 공간 대여 업체 ‘겐자야’는 잡레인보우로 LGBT 직원을 채용하겠다는 구인광고를 냈다. “자기 자신을 감추지 않고 일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게 회사의 모토예요. 게이라는 사실을 감추고 아르바이트를 할 때는 느끼지 못했던 안정감과 업무 만족도를 경험하고 있어요.”

직원 50여 명의 소규모 기업인 겐자야에서 나카소네는 동료들과 함께 LGBT 사업을 구상하고 있다. 대학교 3학년인 그는 인턴십을 마치면 정규직 사원으로 채용될 것 같다고 말했다. 일본의 성소수자단체(Nijji Diversity)가 조사한 결과를 보면, LGBT가 LGBT 친화적인 기업에서 일할 때 근로 의욕은 27%포인트, 생산성은 30%포인트 올랐다. 호시는 자신의 성적 지향을 회사에서 인정받는 일의 중요성에 대해 “모든 사람은 자기답게 일할 때 행복하다. LGBT도 마찬가지다. 일반적으로 LGBT는 성정체성을 숨기고 사는 것을 당연시하는데, 궁극적으로는 성정체성 자체가 무의미한 사회가 좋은 사회다”라고 말했다.

LGBT답게 일하는 것

잡레인보우의 성장세는 가파르다. 매출액을 공개하지는 않았지만 밀려드는 일을 기존 직원 4명으로 감당할 수 없어 다음달까지 3명을 추가 고용한다고 했다. “일본 경제가 살아나면서 노동인구 부족 문제를 LGBT 채용으로 해결하는 부분도 있어요. 도쿄올림픽을 계기로 인권경영 붐도 일어났고요. 하지만 ‘LGBT 프렌들리 정책’이 인권경영이나 기업 사회공헌 정도에 머물면 안 돼요. 기업의 경쟁력을 키우는 데 LGBT 고용이 이득이 된다는 공감대를 확산시킬 겁니다.”

도쿄(일본)=글·사진 진명선 기자 toran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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