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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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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성, 가난을 누르다

빈곤·성차별 맞서 도약 준비하는 네팔의 여성 사회적 기업가들을 만나다
등록 2018-05-23 10:20 수정 2020-05-03 04:28




연재 순서


<font color="#00847C">① 가난과 싸우는 여성들 </font>
지난 5월9일 네팔의 수도 카트만두 외곽의 바테단다 시내에서 엄마와 딸로 보이는 두 여성이 도코를 등에 짊어지고 걸어가고 있다.

지난 5월9일 네팔의 수도 카트만두 외곽의 바테단다 시내에서 엄마와 딸로 보이는 두 여성이 도코를 등에 짊어지고 걸어가고 있다.

“사내 녀석들이 낄낄대며 학교에 갈 때/ 난 낫 들고 엉엉 울며 정글로 갔네/ 키가 크든 작든, 가난하든 부자든 똑같은 사람이라고?/ 그럼 가난한 이들을 사지로 내몰지 말아야지/ 평생 도코(네팔 여성이 등에 짊어지는 큰 바구니)를 져야 하지만/ 난 용기를 잃지 않고 계속해서 네팔의 딸로 살아갈 거야”

가난과 성차별에 찌든 네팔 농촌 여성들의 애환과 희망을 노래한 이 시가 한 노르웨이 여성 학자의 눈에 띈 것은 2014년이었다. 당시 네팔의 수도 카트만두에 머물던 이 학자는 우연히 이 시를 보게 됐고, 수소문 끝에 지은이를 찾아냈다. 그의 이름은 풀마야 타망(47). 카트만두에서 동쪽으로 35킬로미터 떨어진 산골마을 바테단다에 사는 평범한 아낙네였다. 학교는 근처에도 가보지 못한 채 어릴 때부터 농사일에 전념한 전형적인 네팔 농촌 여성이었다. 하지만 빈곤과 성차별에 맞선 그의 삶은 결코 평범하지 않았다. 학자는 그의 이야기를 네팔 전역과 노르웨이에 소개했고, 풀마야는 같은 해 네팔의 대표적 사회적 기업가에게 주는 수리아 네팔 아샤 사회적 기업가상을 받았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남편 대신 생계 책임지는 여성</font></font>
2014년 네팔의 대표적 사회적 기업가에게 주는 상을 받은 풀마야 타망이 5월9일 자신이 운영하는 게스트 하우스 앞에 서 있다.

2014년 네팔의 대표적 사회적 기업가에게 주는 상을 받은 풀마야 타망이 5월9일 자신이 운영하는 게스트 하우스 앞에 서 있다.

은 7월4일 서울에서 열리는 2018 아시아청년사회혁신가국제포럼에 소개될 풀마야를 만나기 위해 지난 5월9일 바테단다를 찾았다. 작렬하는 태양과 비포장도로의 먼지를 뚫고 도착한 그의 게스트하우스는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산의 설경이 멀리 보이는 가파른 언덕에 자리잡고 있었다. “나마스테!” 멀리서 온 이방인에게 그가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수줍게 드러낸 하얀 이가 구릿빛 피부와 대비돼 더욱 선명하게 빛났다.

3남1녀의 막내로 태어난 그는 어렸을 때 학교에 가는 것은 꿈도 꾸지 못했다고 한다. 가난에다 남존여비의 악습까지 남아 있는 네팔 농촌에서 여자아이를 학교에 보내는 것은 사치로 여겨질 때였다. 그가 농촌 여성의 삶에 의문을 제기한 것은 결혼한 뒤부터다. 극심한 가난 속에서도 남편들은 술과 담배를 즐기고 심지어 마약까지 손을 댔다. 여성들은 그런 남편을 대신해 생계를 책임져야 했다. 네팔 농촌은 여성이 ‘슈퍼우먼’이 되기를 강요했다. “그렇다면 여성들이 가장의 권한과 지위를 누리는 게 맞지 않나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어요. 여성이 경제적 주체가 되면 살림살이가 분명히 더 나아질 것이라 믿었죠.”

그는 농촌 여성의 사회적·경제적 지위 향상을 위한 행동에 나서기로 결심했다. 그동안 남성들의 전유물이었던 계를 여성들과 만들기로 한 것이다. 적은 돈이라도 십시일반 모아 기금을 마련한 뒤 순서를 정해 빌려주면 가계에 큰 보탬이 될 것이라 생각했다. 여성들은 남편들과 달리 술과 담배를 즐기지 않기 때문에 더욱 알뜰하게 돈을 모을 수 있을 것이라 확신했다.

하지만 네팔 농촌에서 여성이 계주가 되는 것은 금기였다. 여성의 사회적 활동을 터부시하는 남존여비의 악습 탓이었다. 풀마야가 계를 조직하려 한다는 소식을 들은 마을 남성들은 그를 사기꾼으로 몰아가며 방해했다. 심지어 살해 위협까지 하는 남성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농촌 여성들도 사람인데 마치 집에서 기르는 가축처럼 대접받는다. 난 내 딸들이 나처럼 살기를 원치 않는다. 내 유일한 희망은 우리 가족이 행복하게 사는 것이다!” 돕기 꺼리는 남편에게 그는 이렇게 말하며 적극적인 지원을 요청했다. 딸을 끔찍하게 사랑하는 남편도 결국 아내를 돕기로 했다. 남편은 친구들에게 돈을 빌려 곗돈을 마련해주고 관공서에 제출할 서류 작성을 도왔다. 풀마야는 마을 여성들을 적극 설득해 계모임을 조직하는 데 성공했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계모임의 ‘보건소 건설’ 프로젝트 </font></font>
풀마야 타망의 게스트하 우스에서 바라본 바테단다의 산골마을 전경. 주민 대 다수가 다랑이논을 경작하는 농민들이다.

풀마야 타망의 게스트하 우스에서 바라본 바테단다의 산골마을 전경. 주민 대 다수가 다랑이논을 경작하는 농민들이다.

그가 조직한 계는 다른 일반 모임과 성격이 달랐다. 단순 대출 사업에 그치지 않고, 자녀 교육과 가정폭력 등 어머니들의 공통적인 고민을 해결하는 데 힘썼다. 이처럼 모성에 부합하는 그의 활동은 금세 마을 여성들의 호응을 얻었다.

그의 계모임은 입소문을 타고 네팔 전역에 알려졌고, 카트만두에 있는 한 자선단체가 36만루피(약 360만원)를 쾌척하는 경사를 맞기도 했다. 풀마야는 이 돈으로 물소(버팔로) 10마리를 사서 가난한 여성들에게 나눠줬다. 물소를 받은 여성들은 이자를 내는 대신 자녀를 학교에 보내는 조건이었다. 물소를 정성스레 키운 여성들은 3년여 만에 물소 대금을 다 갚았다. 그들의 자녀는 학교를 무사히 마친 뒤 카트만두와 외국으로 일자리를 얻어 나갔다. 풀마야의 ‘물소 프로젝트’는 2013년 물소 48마리 규모로 확대됐고, 농촌에 자녀 교육에 대한 관심을 퍼뜨리는 데 큰 몫을 했다.

풀마야의 계모임은 이후 홈스테이 사업 등으로 확대됐다. 네팔에는 에베레스트산이라는 자연이 준 선물이 있었다. 풀마야가 살고 있는 바테단다는 에베레스트산의 설경을 감상할 수 있는 지리적 이점이 있어 유럽의 트레킹 애호가들이 즐겨 찾는 곳이다. 풀마야도 에베레스트산을 마주 보는 언덕에 2층짜리 건물을 지어 게스트하우스를 한다.

15년 전 20여 명으로 시작한 풀마야의 계모임은 현재 회원수가 300여 명으로 불어났다. 풀마야는 지금 의료 서비스 사각지대에 있는 마을 사람들을 위해 보건소를 세우는 프로젝트를 하고 있다. 국제 엔지오(NGO)들이 기부한 땅 위에 그동안 모은 기금으로 건물을 짓고 있다. “여성들은 가족에 대한 애착이 남성보다 강하다. 엄마들이 나서면 많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 그는 수줍게 웃으며 말했지만, 그의 포부는 당차고 울림이 컸다.

풀마야의 성공에는 아시아를 무대로 활동하는 소셜벤처 엔지오 ‘체인지퓨전’의 지원도 큰 몫을 했다. 타이에 근거지를 둔 체인지퓨전의 네팔 지부인 ‘체인지퓨전 네팔’은 풀마야를 비롯한 네팔의 여성 사회적 기업가 지원에 발벗고 나섰다. 이 조직을 이끄는 루나 타쿠르 슈레스타(41)는 네팔을 대표하는 활동가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가난 극복의 힘 ‘모성애’ </font></font>
지난 5월8일 네팔 카트만두 시내의 한 가게에서 ‘체인지퓨전 네팔’ 대표 루나 타 쿠르 슈레스타(오른쪽 둘째)가 여성 소상공인들과 함께 제품을 들어 보이고 있다

지난 5월8일 네팔 카트만두 시내의 한 가게에서 ‘체인지퓨전 네팔’ 대표 루나 타 쿠르 슈레스타(오른쪽 둘째)가 여성 소상공인들과 함께 제품을 들어 보이고 있다

봉제공장을 운영하며 네팔 여성들의 경제적 자립을 돕는 샨티 슈레스 트나가 5월8일 자신의 공장에서 만든 연꽃을 설명하고 있다.

봉제공장을 운영하며 네팔 여성들의 경제적 자립을 돕는 샨티 슈레스 트나가 5월8일 자신의 공장에서 만든 연꽃을 설명하고 있다.

그는 미국에서 유학한 뒤 뉴질랜드의 한 호텔에서 일하다가 10년 전 한 엔지오 활동가를 만난 뒤 엔지오 활동에 뛰어들었다. 그는 네팔 여성들의 열악한 경제적 지위에 주목했다. 지난 5월8일 카트만두에서 만난 그에게 여성을 집중 지원하는 이유를 묻자 이렇게 답했다. “남존여비의 악습 탓에 네팔에서 여성은 더 가난에 시달린다. 하지만 가난을 극복하는 힘은 여성이 더 강하다.” 아이를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하려는 모성애가 가난을 극복하려는 의지를 강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는 2015년 4월에 네팔에서 대지진 참사가 났을 때 여성들이 겪은 고통을 설명했다. 네팔에서만 6천 명의 사망자를 낸 대지진으로 경제가 초토화됐다. 여성들은 일자리를 잃은 남성을 대신해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처지가 됐다. “교육을 전혀 받지 못한 여성들이 당장 돈을 손에 쥘 수 있는 일이 뭐가 있겠나. 많은 네팔 여성이 성매매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루나는 그때 여성의 경제적 자립을 위한 사업을 하기로 결심했다.

사치나 라마(33)와 샨티 샤키아(46), 시타 타망(36)은 루나가 지원을 시작한 첫 소상공인들이다. 이들은 천연 염색과 금속 액세서리, 목각 인형 등 네팔의 전통 공예품을 만들어 팔아서 1년에 3천달러(약 320만원) 정도의 수입을 올린다. 네팔 노동자의 한 달 평균 임금이 100달러 수준임을 고려하면 고소득에 해당하는 수입이다. 루나는 이들에게 글로벌 경쟁력을 키울 수 있도록 영어를 가르치고, 타이 방콕으로 데려가 새로운 유행을 배울 수 있는 기회도 주었다.

이들은 어엿한 사업가로 인정받기까지 여성이라는 이유로 더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여성인 내가 스스로 생계를 책임질 수 있다는 사실이 기쁘다. 네팔에서는 여성이 자립할 수 있는 기반을 갖기가 어렵다. 내 딸들이 나를 보며 꿈을 키울 수 있도록 열심히 사업할 것이다.” 두 딸을 둔 샨티가 눈물을 글썽이며 영어로 말했다. “네팔에서는 여성들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편견을 깨는 게 목표다.” 사치나가 밝게 웃으며 샨티의 말을 거들었다.

루나의 또 다른 ‘멘티’인 샨티 슈레스트나(52)는 봉제공장을 운영한다. 뉴질랜드에서 수입한 양털로 가방과 지갑, 신발 등을 만들어 판다. 공장의 특징은 직원 55명이 모두 여성이라는 점이다. “학교교육을 받지 못한 여성들도 자신의 특기를 잘 살리면 충분히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주기 위해서다.” 공장장이자 직원인 샨티는 여성만 고용한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네팔 여성에 대한 고정관념 깨기 </font></font>
샨티 슈레 스트나가 운영하는 공장에서 여성들이 바느질을 하고 있다.

샨티 슈레 스트나가 운영하는 공장에서 여성들이 바느질을 하고 있다.

그의 공장에서 생산한 제품은 유럽과 미국으로 수출된다. 매출 규모는 1년에 20만~30만달러(약 3억2400만원) 수준이다. 직원들은 숙련도에 따라 한 달에 800달러까지 받는다. “네팔에서 여성이 이 정도 수입을 올리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 카트만두에서 자녀를 사립학교에 보낼 수 있고, 비싼 아파트의 월세도 낼 수 있다. 상당한 돈을 저축할 수도 있다.” 그는 사업으로 네팔 여성에 대한 고정관념을 바꾸는 게 꿈이다. “네팔에서 여자로 태어나면 학교도 못 가고 집에서 일만 하다가 어린 시절을 다 보낸다. 결혼한 뒤에도 마찬가지다. 내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사는데도 남편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다. 내 딸에게는 이런 삶을 물려주지 않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다.”

세계 최빈국으로 꼽히는 네팔은 지난해 20년 만의 지방선거를 성공적으로 치르고 새로운 도약을 준비하고 있다. 이 만난 네팔의 여성 사회적 기업가들은 이 나라의 새로운 도약이 성공할 것이라는 예감을 갖게 했다.

네팔=<font color="#008ABD">글 </font>이춘재 기자 cjlee@hani.co.kr
<font color="#008ABD">사진 </font>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

<font color="#A6CA37">2018 아시아 청년 사회혁신가 포럼</font>


젠더와 사회적기업


한겨레신문이 주최하고 과 씨닷이 주관, 서울시가 후원하는 2018 ‘아시아청년사회혁신가국제포럼’(ANYSE)이 7월4일 서울시청 다목적홀에서 열린다. 지난 2014년 ‘청년, 아시아의 미래를 열다’라는 주제로 아시아 사회적기업의 미래를 모색하는 자리를 처음 마련한 이후 올해로 5회째를 맞는 행사다. 그동안 교육과 주거, 공동체 영역에서 아시아 사회적기업의 역할과 과제를 함께 토론하고 고민해온 포럼은 이번에는 ‘젠더(성)’를 주제로 머리를 맞댄다.
젠더는 최근 전세계적 이슈로 떠올랐다. 2017년 미국 할리우드 여성 배우들의 성폭력·성희롱 피해 연쇄 폭로로 시작된 ‘미투’(MeToo) 열풍은 올해 초 현직 검사인 서지현씨의 폭로를 계기로 우리나라에서도 들불처럼 번지고 있다. 2017년 ‘세계 성 격차 보고서’(Global Gender Gap Report)에 따르면 한국은 조사 대상 144개국 중 118위에 머물 정도로 성 불평등이 여전히 심각하다. 이번 포럼은 성 불평등을 해소하는 데 사회적기업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고, 어떤 과제를 갖고 있는지 등을 논의하는 기회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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