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6호(1999년 5월6일 발행)에 실린 구수정 베트남 통신원(현 한베평화재단 상임이사)의 글이 한국 사회에 큰 충격을 안겼다. 관동대학살·난징대학살 때 일본군의 만행과 흡사하지만, 대명사로 가려진 역사 속 ‘그들’은 한국군이었다. 베트남인들에게 ‘아, 몸서리쳐지는 한국군!’으로 각인된 우리의 치부를 자각하기까지, 베트남전이 끝나고도 그렇게 24년이 걸렸다.
1964년 9월부터 1972년까지 한국군 전투부대 31만2천여 명이 베트남전에 참전했다. 상대를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 전쟁터, 한국군은 공식 통계로만 아군이 치른 희생의 10배에 가까운 적군 4만1400여 명을 죽였다. 군인들에게 전쟁이란 원래 그런 것이다. 다만 상대를 죽이지 않아도 내가 죽지 않는 상황에서 “미군의 용병일 뿐인 한국군이” “미군보다 더 잔인하게 사람을 죽인”(제273호 1999년 9월2일 발행, 47쪽) 민간인 학살은 가해국인 우리가 진실을 규명하고 책임져야 할 전쟁범죄다.
베트남전 당시 청룡·백마·맹호 부대 등이 주둔한 5개 성(꽝남성·꽝응아이성·빈딘성·카인호아성·푸옌성)에서 한국군이 학살한 민간인 수는 9천 명 이상으로 추산된다. 보도 이후 사과하고 배상할 수 있었던 시간이 다시 19년, 한국 정부가 베트남인들에게 보여준 최선은 지난 3월 문재인 대통령이 한-베 정상회담 머리발언에서 ‘불행한 역사’에 유감을 표명한 정도다.
국가가 진실을 외면할 때, 시민사회는 민간법정을 통해 역사를 기억하고 미래를 견인해왔다. 1960년대 ‘베트남 전범재판소’부터 2000년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 국제법정’에 이르기까지, 민간법정은 가해국이 진실 규명으로 나아가도록 압박했다. 4월21~22일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민변)과 한베평화재단의 주도로 서울 마포구 문화비축기지에서 ‘베트남전쟁 시기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학살 진상규명’을 위한 시민평화법정이 열렸다. 재판부는 김영란 서강대 법학전문대학원 석좌교수(전 대법관)와 이석태 변호사(전 세월호특별조사위원장), 양현아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로 구성됐다. 법적 구속력은 없지만 피해자 2명이 한국까지 날아와 피해를 증언했고, 재판부는 유족의 청구를 대부분 받아들였다.
1968년 2월, 베트남 꽝남성 퐁니·퐁넛 마을과 하미 마을에서 열흘 간격을 두고 각각 민간인 학살이 벌어졌다. 베트남전쟁 시기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 80여 건 가운데 일부다. 2018년 4월에 이르기까지 꼬박 반세기, 두 사건의 피해자와 가해국은 아직 ‘진실’이라는 접점을 찾지 못했고, 결국 시민평화법정에서 원고와 피고로 마주했다. 한국 사회에서 신망받는 법률가들로 구성된 재판부가 베트남전 시기 대한민국의 불법행위와 인권침해에 대해 최초로 권위 있는 법률적 판단을 내렸다. 선고는 4월22일 이뤄졌고 판결문은 50일 이내에 공개하도록 돼 있는데, 이 미리 입수해 공개한다.
‘퐁니·퐁넛 사건’ 원고인 응우옌티탄(58)은 그해 2월12일 퐁니 마을에서 한국군 해병 제2여단(청룡부대) 제1대대 제1중대 소속 군인들에게 총격을 당했다고 주장했다. 대한민국은 사건 발생 시점에 제1중대가 해당 지역에 없었다고 맞섰다. 사건을 일으켰다 하더라도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이하 남베트남)과 관련이 많은 퐁니·퐁넛 마을 주민은 보호 의무가 있는 민간인이라 볼 수 없고, 정당한 교전 행위였다고도 반박했다. 재판부(재판장 김영란)는 22일 “제1중대가 퐁니·퐁넛 마을에서 70여 명의 민간인을 학살한 것으로 보이고, 그 과정에서 원고 응우옌티탄이 복부에 총상을 입은 사실이 인정된다”며 응우옌티탄의 손을 들어줬다.
대한민국은 민간인 학살 사실을 부인하면서, ‘설령’ 제1중대가 민간인들을 살해했더라도 ‘의도치 않은 어쩔 수 없는 희생’이며 ‘의도적인 집단학살’은 아니었다고 강조했다. 적과 아군을 구별하기 힘든 게릴라전이었다는 점 등 ‘베트남전의 특수성’을 강조했으나, 재판부는 이를 배척했다.
피해자들의 구체적이고 일관된 진술“퐁니·퐁넛 사건에서는 70여 명의 민간인이 살해되었는데, 이와 같이 수십 명의 민간인이 살해된 사건을 두고 과연 ‘의도치 않은 어쩔 수 없는 희생’이라고 볼 수 있는지 자체가 심히 의심스럽다. 나아가 퐁니·퐁넛 사건의 경우 피해자 거의 대부분이 노인·여성·어린이들이었고, 심지어 1살 미만의 영아까지 살해되었으며, 이들은 비무장 상태였다는 점까지 감안해본다면, 퐁니·퐁넛 사건을 ‘의도치 않은 어쩔 수 없는 희생’으로 볼 수 없다고 판단된다. 여기에 이 사건 1중대는 퐁니·퐁넛 마을 주민들을 특정한 곳에 모이게 한 후 집단적으로 살해한 사정까지 더해 본다면, 퐁니·퐁넛 사건은 ‘의도치 않은 어쩔 수 없는 희생’이라기보다 오히려 ‘의도된 집단학살’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시민평화법정에는 같은 이름을 가진 또 한 명의 응우옌티탄(61)도 원고로 법정에 나왔다. 1968년 2월22일 베트남 꽝남성 하미 마을에서 한국군 해병 제2여단 제5대대 제26중대 소속 군인들에게 공격을 당해 왼쪽 귀와 다리, 허리를 다친 피해자다. 100명 이상이 숨진 ‘하미 사건’에 대해서도 대한민국은 제26중대가 사건을 일으켰다는 증거가 없고, 남베트남과 많은 관련이 있는 하미 마을 주민들을 민간인이라 볼 수 없으며, 정당한 교전 행위였다는 주장을 펼쳤다. 그러나 재판부는 “26중대가 마을 내 5곳에 사람들을 모은 후 135명으로 추정되는 주민들에게 총격을 가한 것으로 인정된다. 그 과정에서 원고 응우옌티탄도 상해를 입었다”고 판시했다.
대한민국은 “신빙성 있는 증거가 부족하다”고 주장했다. 재판부는 “피해자들이 한국군의 총격 살해 사실을 상당히 구체적이고 일관되게 진술하고 있고, 베트남 정부도 하미 사건 위령비를 유적지로 인증했다”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대한민국은 “하미 마을 주민은 민간인이 아니었다”고도 항변했다. 재판부는 “하미 마을 주민들이 무장한 상태에서 제26중대에 적대적인 무력을 행사한 사실이 증명되지 않는다면, 보호받을 가치가 있는 민간인에 해당된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판단했다. ‘어떤 사람이 민간인인지 여부가 의심스러운 경우 민간인으로 간주한다’는 제네바협약 제1추가의정서 제50조를 적용했다.
시민평화법정 재판부는 두 응우옌티탄의 피해 사실을 인정하는 데 그치지 않았고, 피고들의 청구를 광범위하게 수용했다. 국가배상법 배상 기준에 따른 배상금을 지급하고, 원고들의 존엄과 명예가 회복되도록 공식 사과를 주문한 것은 물론, 책임 인정·진상 조사·민간인 학살 전시를 권고했다.
시민평화법정 재판부는 이 사건을 “중대한 인권침해”이자 “전쟁범죄 성격을 띠는 사건”이라고 규정했다. 따라서 “사실 인정을 바탕으로 한 국가 차원의 공식적인 입장 표명은 반드시 필요하며, 이는 피해자의 존엄과 명예회복을 위한 필수불가결한 조처”라고 지적했다.
두 사건 외에 베트남전 기간에 벌어진 민간인 살인·상해·폭행·성폭력 등 일체의 불법행위에 대해서도 진상 조사를 권고했다. “철저한 조사로 진상 규명을 하는 것은 피해자들과 관련한 진실을 밝히는 일일 뿐만 아니라, 전쟁에 참여한 대다수 한국군의 명예를 지키는 일이기도 하다”는 지적이다.
두 명의 응우옌티탄은 전쟁기념관 등 베트남전 참전이 홍보되는 공공시설에서 민간인 학살 사실도 함께 전시할 것을 청구했다. 대한민국은 “불법행위를 반복하지 않기 위한 책임의 범위는 군인들에 대한 국제인권법 교육 등으로 충분하다”고 주장했다.
전쟁기념관에 베트남 학살 전시하라이에 대해 재판부는 “문명국가의 군대라면 당연히 국제인도법을 군인에게 교육해야 하기 때문에 이를 특별한 책임을 지는 것으로 볼 수 없다”며 원고들의 학살 사실 전시 청구를 받아들였다. 재판부는 “국가의 중대한 인권침해 문제의 경우, 진실 규명이 이루어진 이후 규명 사실을 역사 교과서나 기념일, 기념시설 등을 통해 후속 세대에 전달하고, 현재화시키는 것이 반드시 요구된다”며 “현재화를 통해 중대한 인권침해로 발생한 처참한 결과들을 구성원들이 인식하고, 이를 반복하지 않기 위한 노력을 계속해나갈 수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전정윤 기자 ggum@hani.co.kr전화신청▶ 02-2013-1300 (월납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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