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전쟁 당시 국내 언론은 ‘월남통신’ ‘맹호통신’과 같은 이름으로 베트남전쟁의 상황이나 국군의 소식을 전했다. 그뿐 아니라 병사들의 편지가 신문 지면에 실리기도 했다. 국민은 신문으로 날마다 베트남 소식을 알 수 있었고, 국민이 보낸 위문편지도 신문으로 중계됐다. 1966년 5월에는 주베트남 해병 제2여단 청룡부대와 숙명여대가 자매결연을 해 “정다운 오누이로 서로 돕기를 다짐”했다는 소식도 실려 있다. 베트남전쟁 파병 병사에 대한 위문 열기는 전 국민적이었다.
국가가 덧씌운 ‘용맹’ 이미지베트남 파병 병사는 공산주의로부터 자유세계를 수호하는 용사이기도 했지만, 이른바 ‘베트남 특수’라 하는 국가 발전의 주역이기도 했다. 한국은 베트남전쟁에 참전해, 대외 원조 삭감 정책으로 전환하던 미국으로부터 군사원조 삭감 중지와 1억5천만달러의 장기차관 도입에 성공했다. 이로써 5만5천 명 규모의 전투요원과 노무자·기술자 등 민간인 1만6천 명이 베트남에 파견됐고, 베트남과의 무역액이 늘어남과 동시에 베트남 특수라는 새로운 무역 외 수입이 생겼다. 군납과 파월 장병·기술자의 송금액은 1966년 한 해 동안 6949만달러, 1966~70년의 총액은 6억2502만달러에 달했다. 1965년 수출 총액이 1억7500만달러였음을 떠올린다면 ‘베트남 특수’가 국가경제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쳤는지 가늠할 수 있다.
국민의 열렬한 환송과 위문을 받으며 파병된 병사들은 그 뒤 어떻게 되었을까? ‘월남에서 돌아온 새까만 김 상사’는 의젓하게 훈장을 달고 돌아왔다는데, 김 상사는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 안타깝게도 한국 사회에서 베트남전쟁 참전 병사는 냉전·안보주의를 표방한 수구·보수단체 집회의 주요 구성원이라는 이미지로 각인되어 있다. 자유세계를 수호한 용맹한 병사이자 조국 발전의 초석에서 보수 집회의 주요 구성원이 되기까지, 그들의 삶은 매끄럽게 이어져 있을까?
우선 지적해야 할 점은, 애초 ‘맹호’ ‘청룡’ 같은 ‘용감한 병사’ 이미지 자체가 국가적 선전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1960년대에도 징집 회피나 저항이 적지 않았다. 1964~68년 병역 대상자 가운데 기피자의 비율은 18.5%나 됐다. 참전 병사들의 면담을 토대로 한 여러 연구를 참조하면, 이들이 베트남전쟁에 참여하는 데 ‘반공 이데올로기’는 크게 작용하지 않았고 경제적 이유가 컸다. 병사들에게 이데올로기보다 구체적인 것이 전장의 죽음이었으며, 죽음만큼의 무게를 가진 것은 남은 가족들의 생계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전장으로 나아갔던 이들의 귀환과 그 후의 삶은 어땠을까?
‘파월 용사’와 ‘보수 집회’ 사이귀국 후 참전 군인의 단체가 처음 만들어진 것은 1966년께다. 당시 ‘파월장병전우회’는 구직 활동도 하고, 전우도 찾아주는 친목단체 수준이었다. 1980년대 초 단체가 세력화될 조짐을 보이자 신군부가 재향군인회 산하 임의단체를 해체하면서 겨우 명맥을 유지하던 월남참전전우회도 해체됐다. 당시 대통령인 전두환씨도 베트남전쟁 참전 군인이었는데도 전쟁에 대한 평가나 보훈사업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무엇보다 고엽제 피해가 한국에 알려지는 과정을 보면, 한국 사회에서 참전 병사가 얼마나 소외되었는지 분명히 알 수 있다. 1987년 미국을 비롯한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가 미국 제조회사를 상대로 제기한 소송 결과가 나오고, 외국으로 이민 간 참전 군인이 이를 제보해 1991년부터 주요 사회문제로 떠오른다. 급기야 1992년 9월엔 고엽제 피해자 대책 마련 촉구를 위해 ‘파월 용사’들이 경부고속도로에서 점거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요컨대 고엽제 피해 문제제기는 국가의 체제 밖에서 먼저 터져나온 것이다.
참전 병사들은 보상만 못 받은 것이 아니다. 전세계는 1968년 베트남전 반전 시위에 동참했다. 그러나 한국은 이 시기 반전운동, 문화혁명에서 배제됐다. 한국에서 베트남전쟁의 재평가가 이뤄진 것은 1990년대에 이르러서다. 공식적으로는 1998년 김대중 전 대통령의 유감 표명이 있었고, 1999~2000년에 베트남전진실위원회와 의 ‘베트남전쟁 민간인학살 진상규명운동’은 베트남전쟁의 정당성을 아래서부터 허물었다. 이러한 관점은 당시 정부 논리와 배치됨에 따라, 참전 병사에게는 존재 당위를 위협하는 것으로 느껴졌다. 국가에서 적절한 보상을 받기도 전에 피해자의 정당성마저 잃어버릴 위기에 놓인 것이다.
‘파월 용사’와 ‘보수집회’ 사이에는 많은 갈등이 있다. 국가주의·발전주의가 그들의 이미지를 만들어냈지만, 귀국 후 그들은 합당한 보상을 받지 못했다. 1975년 전쟁이 끝난 뒤 국민적 관심은 급속히 식어갔으며, 전쟁 피해는 고스란히 그들의 몫이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같은 참전 군인이라도 영관급 장교와 일반 병사의 전쟁 기억과 이후의 삶은 달랐다. 그러나 국민의 눈에 그들은 똑같은 군복을 입은 ‘태극기 할아버지’로 비친다. 과연 현재 한국 사회에서 그들의 경험과 기억은 치유의 방향으로 재생되고 있는 걸까? 사회에서 소외와 배제를 당해왔음에도 박정희에 대한 향수나 수구·보수집회로 귀결되는 ‘서사’는 그들의 것일까?
기억의 주체가 된다는 것은 국가가 만들고 주입한 전쟁의 의미를 거부하고 스스로 의미를 규정한다는 뜻이다. 병사들의 전쟁은 전공이나 외화 유치로 기억되지 않는다. 박물관이 기록하지 않는 전장의 두려움, 전우를 잃은 슬픔, 인간성이 파괴된 경험이 그들이 기억하는 전쟁이 아닐까.
자신의 기억을 말할 때 참전 병사는 더 이상 국가 발전을 위한 용사가 아니다. 그들은 죽음이 두려웠던 평범한 청년이며, 부모형제의 생계를 걱정했던 가난한 아들이며, 전우를 가슴에 묻은 선량한 친구이며, 전쟁 후에도 끝나지 않은 육체적·정신적 고통을 지니고 살아가는 전쟁 피해자다. 그런데 피해자가 된다는 것은 때때로 가해자 위치에 서게 됨을 뜻한다. 병사들은 국가에 대해서는 피해자지만, 베트남인에게는 가해자이기 때문이다.
청년을 전장에 몬 국가의 책임4월21~22일 서울 마포구 성산동 복합문화공간 ‘문화비축기지’에서 열리는 시민평화법정은 베트남전쟁의 기억을 다시 쓰는 일이다. 국가 주도의 서사가 아닌 시민이 만들어내는 역사다. 하루 전인 20일에는 ‘가해자의 자리에 선다는 것’이라는 주제로 학술대회도 열린다. 이 자리는 베트남전쟁에 관한 공적 기억을 되묻고, 현재의 의미를 발견하자는 목적으로 마련됐다. 나아가 우리가 만난 참전 군인들의 목소리를 전하고 그들의 기억으로 다시 쓰는 베트남전쟁의 역사를 함께 나누고자 한다. 청년을 전쟁에 동원한 국가의 책임을 묻고, 동시에 우리에게 남은 책임을 마주하는 시간에 ‘지금-여기’에 연루된 모두를 초대한다.
이지은 시민평화법정 조사팀전화신청▶ 02-2013-1300 (월납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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