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것 보세요! 정말 흉물스럽죠?”
3월7일 일본 도쿄도 나카노구 히가시나카노역 인근 선로변. 일본의 ‘동네정치’를 취재하기 위해 도쿄를 찾은 취재진을 안내한 라이주 가즈유키 일본공산당 나카노구 의원이 밑동만 덩그러니 남은 채 잘려나간 벚나무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곳은 전후 복구 과정에서 재기를 염원하던 주변 주민들이 뜻을 모아 벚나무를 심은 곳이에요. 그만큼 이곳에 대한 지역주민의 애정이 남다릅니다. 해마다 봄이 되면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면서 명소로 자리잡은 덕에 주변 상권도 활기를 띠었습니다.” 이렇게 동네 주민들에게 소중한 공간을 구청이 나서서 짓밟으려 한 것이다. 봄을 시샘하는 칼바람이 ‘쉬이~’ 소리를 내며 살아남은 벚나무 사이를 휘감아돌 때마다 라이주 의원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한밤의 벚나무 습격 사건한밤중 ‘벚나무 습격 사건’이 일어난 건 지난해 12월이었다. 나무를 관리하는 나카노구와 토지를 소유한 JR(일본철도)이 주변 정리를 이유로 예고 없이 벌채에 나선 것이다. 이를 본 주민의 연락을 받고 라이주 의원이 급히 현장으로 달려갔다. 이미 몇 그루는 흉측하게 베인 뒤였다. 곧바로 지역주민 몇몇과 함께 맨몸으로 직원들을 막아 세운 뒤에야 깊은 밤의 기습 벌채는 중단됐다. 라이주 의원은 이튿날 “어떻게 주민들의 의견도 듣지 않고 일방적으로 나무를 자를 수 있느냐”며 구의회에서 문제를 제기했다.
라이주 의원과 뜻을 같이하는 동료 의원들도 나카노구에 벌채의 부당성에 대해 항의했다. 지역주민들은 곧바로 ‘벚꽃을 지키는 모임’을 만들어 힘을 보탰다. 결국 나카노구는 주민설명회를 열고 “벌채 이후 새로운 나무 조성을 포함한 인근 상권 활성화 방안을 마련하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구는 아무 방안도 내놓지 않은 채, 벌채를 재개하겠다고 일방적으로 통보했다. “구와 JR는 단순히 오래된 나무들이 철도 운행에 위협이 된다는 이유만으로 벌채를 강행하겠다고 했죠. 하지만 전문가들의 안전진단 한번 없이 자의적으로 내려진 결론이었습니다. 저희는 이곳에 늘어선 벚나무 가운데 어떤 나무가 무슨 위험을 갖고 있는지 전문가 진단을 받는 게 먼저라는 생각이었어요. 이 절차 없이는 단 한 그루도 추가로 벨 수 없다고 버텼습니다.” 결국 구는 전문가의 안전진단 이후 철도 운행에 심각한 위협을 준다는 진단을 받은 16그루만 베기로 했다. 모든 나무를 자르려고 했던 계획에서 크게 후퇴한 셈이다.
나카노구 주민들이 벚나무를 지켜낼 수 있었던 건 “주민 손으로 동네를 지키자”고 제안한 라이주 의원, 그의 제안에 관심 갖고 참여한 주민, 주민들의 구심점 역할을 한 ‘벚꽃을 지키는 모임’의 세 박자가 맞아떨어진 덕분이다. 자치단체장이 주민 뜻과 정반대의 길을 가려 할 때 이를 막고 바로잡는 힘을 구의원과 동네 주민들이 함께 만들어낸 것이다. 무엇보다 주민들의 자발적 참여가 변화를 이끌어낸 힘의 원천이었다.
구의원을 ‘선배’라 부르는 주민라이주 의원과 함께 취재에 응한 ‘벚꽃을 지키는 모임’ 회원 시노다 마리코는 “구의원은 지역주민과 구정을 연결해주는 가교 역할을 한다. 라이주 의원을 통해 구청에 주민과의 약속을 지키라고 끈질기게 요구했고, JR를 향해서는 사전 설명회조차 없이 일방적으로 벌채에 나선 것을 비판했다”고 말했다. 시노다의 설명에 연신 고개를 끄덕이던 ‘히가시나카노를 재미있게 만드는 모임’ 대표 야노 시노도 거들었다. “지역주민들의 삶이자 염원이 담긴 나무를 벤다는 것을 인정할 수 없었죠. 주민들이 서명운동을 벌이고 구의원과 함께 구청에 지속적으로 나무를 베지 말아달라고 요구했어요. 결국 일부만 벌채할 수 있도록 했죠.”
이처럼 지방자치에선 주민의 실생활에 영향을 주는 문제가 다뤄진다. 그렇기에 주민들이 자신의 삶과 직결된 문제에 일상적으로 관심을 기울이고 참여해야 한다. 나카노구 사례는 주민과 구의원이 함께하는 동네정치가 어떻게 지역주민의 삶에 크고 작은 영향을 끼치는지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일본에서 만난 지방자치 전문가들은 한결같이 지방자치 발전의 핵심은 ‘주민 참여’와 ‘자치 역량 강화’에 있다고 입을 모은다. 그런 면에서 후지카와 고타로 일본 지방자치네트워크연구소 연구원의 충고에 귀기울여볼 만하다. “주민이 각 지역 상황에 맞게 대안을 만들고, 지방정부가 한눈팔지 못하게 매섭게 감시하는 힘을 길러야 합니다. 이를 위해선 지방의회 의원과 지역주민이 수직이 아닌 수평적 관계에서 단단한 유대를 맺는 것이 중요하죠. 나카노구는 구의회와 주민이 수평적 관계에서 자치의 힘을 키워나간 모범 사례라고 볼 수 있습니다.” 실제 시노다와 야노는 동네에서 함께 나고 자란 라이주 의원을 ‘라이주 센빠이(선배)’라고 부른다. 야노는 “라이주 의원은 구의원이면서 동시에 주민의 한 사람이자 어떻게 지역 문제에서 싸워나갈 수 있을지 그 방법을 가르쳐주는 좋은 선배이다”라고 말했다. 지방자치가 시작된 지 20년이 넘었지만, 여전히 자기 동네 구의원과 시의원의 이름을 모르는 이가 대부분인 한국의 상황에서 곱씹어볼 만한 얘기다.
‘골목 상권’ 되살린 주민의 힘도쿄와 인접한 지바현 지바시 주오구에서도 주민의 힘으로 동네를 바꿔보려는 노력이 빛을 발했다. 은 3월10일 주민 스스로 지역화폐를 만들어 쇠락해가던 상권을 되살린 주오구 니시치바역 인근 유리노키 상점가를 찾았다. 이곳은 1990년대 말부터 손님들이 신도시의 백화점과 쇼핑가로 빠져나가면서 극심한 불황을 겪었다. 그랬던 동네가 조금씩 되살아난 건 2000년 지역주민들이 구의회와 함께 ‘피너츠’라는 지역화폐를 만들면서다. 피너츠 도입에 앞장섰던 노무라 가큐 피너츠 운영 책임자는 “지역주민들이 먼저 마을 살리기를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고민했고, 지방의회·지방정부와 머리를 맞댄 끝에 나온 것이 피너츠다”라고 말했다. 이 지역의 특산품인 땅콩에서 유래한 피너츠는, 일한 시간만큼 적립하고 나중에 생산물이나 다른 이들의 노동과 교환할 수 있는 지역화폐다. 피너츠를 사용하려면 소비자와 상점 모두 ‘피너츠클럽’에 가입해야 한다. 피너츠클럽에 가입한 소비자는 상점에서 물건값 대신 피너츠를 내고 해당 상점에서 잡일을 도와준 뒤 다시 피너츠를 적립한다.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소비자는 상점 주인과 끈끈한 유대관계를 맺고 더 자주 이용하게 된다.
주민, 지방의회, 지방정부는 피너츠를 매개로 힘을 합쳐 ‘골목 상권’ 활성화를 이끌어냈다. 노무라는 “주민들이 먼저 동네의 활력을 되찾기 위해 지역화폐 도입을 고민했다”며 “지역의 돈이 밖으로 빠져나가지 않고 지역 안에서 쓰이며 골목 경제가 기적처럼 되살아났다”고 말했다. 피너츠클럽은 2000년 상점 30여 개가 중심이 돼 시작된 뒤, 2017년 말 현재 100여 개 상점과 3천여 명의 소비자가 참여하는 거대한 ‘마을 경제 공동체’로 자랐다. 유리노키 상점가에서 40년 넘게 미용실을 운영하는 스미다마 유지로는 “피너츠가 만들어지기 전에는 폐업 위기까지 내몰렸지만, 지금은 매출의 30% 가까이가 피너츠에서 나온다. 이곳뿐만 아니라 인근 상점들 대부분이 지역화폐의 덕을 톡톡히 보고 있다”고 말했다.
지역화폐를 연결고리로 동네 주민 간의 신뢰와 유대를 넓힌 것도 피너츠가 가져다준 마법 가운데 하나다. 이날 스미다마 옆에서 잡일을 도운 이는 동네 주민이다. 그는 이곳에서 머리를 일반 손님보다 10% 정도 싸게 자른 뒤, 시간이 날 때 미용실 일을 도와준다. 스미다마는 “급하게 일손이 필요할 때 도움을 줄 수 있는 이웃이 생기면서 주민 사이의 공동체 의식도 크게 강화됐다”고 말했다.
주민이 움직여야 동네가 바뀐다이 사례에서 살펴볼 수 있듯, 지방자치는 주민 스스로 힘을 기르고 지혜를 모아 동네를 바꿔나가는 것이 핵심이다. 이는 하루아침에 이뤄지는 게 아니다. 주민과 지방의회·지방정부가 오랜 시간 함께 힘을 모아야 가능하다. 그래서 후지카와 연구원의 말은 더욱 귀 기울일 만하다. “먼저 주민들이 생활에서 부딪히는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지 다양한 방법을 찾아보고 실험해야 합니다. 지방의회는 이들의 힘을 한곳에 모으는 구심점을 만들고, 지방정부에 주민의 뜻을 끊임없이 전달해야 합니다. 여기에 지방정부가 동의하고 조례 제정 등 제도적 뒷받침을 할 때 비로소 지방자치가 완성됩니다.”
일본의 작은 동네에서 확인한 이 단순한 ‘명제’가 한국에서도 증명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쥔 것은 결국 주민이다. 한국인들이 일본인들처럼 참여의식을 갖고 자기 동네의 문제 해결에 나설 수 있을까. 일본에서 확인한 분명한 사실은 주민이 움직이지 않으면 동네가 바뀌지 않는다는 것이다. 지방자치는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도쿄·지바(일본)=글 김연기 기자 ykkim@hani.co.kr
사진 이경주 한겨레TV PD leepd@hani.co.kr
오야마 도모코 일본공산당 도쿄도의원단 간사장 인터뷰
“생활밀착형 동네정치로 유권자 신뢰 얻었다”
복지와 육아가 전문 분야다. 어떻게 정치에 입문하게 됐나.
신주쿠 구립보육원 보육사 출신이다. 아이들이 올바르게 성장하려면 보육 조건의 정비가 필요하다. 내가 몸담은 보육원뿐만 아니라 신주쿠구 전체 아이들을 책임진다는 각오로 정치에 뛰어들었다.
일본공산당을 선택한 이유는?
보육사 선후배들과 학습회 모임 활동을 했다. 당시 존경할 만한 보육사 선배들이 일본공산당 입당을 권유했다. 일본공산당은 사람 한명 한명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정당이다. 보육사가 된 뒤에 만난 일본공산당 보육사 선배들 역시 아이 하나하나를 소중하게 생각했다. 나와 일본공산당이 지향하는 미래가 같았기에 일본공산당을 선택했다.
최근 지방의회에서 일본공산당의 약진이 뚜렷하다.
도쿄도의회 선거에서 2007년 8명, 2011년 17명, 2017년 19명이 당선되며 꾸준히 세를 넓혔다. 그 과정에서 보육뿐만 아니라 초·중등학교 급식 무상화, 고령자 생활 개선, 공공주택 확보 등 지역 생활밀착형 풀뿌리 정치에 초점을 맞췄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유권자들 사이에서 일본공산당에 대한 저항이 사라졌다. 과거에는 일본공산당과 연대하는 것을 태생적으로 싫어하는 이가 많았지만, 편견이 사라지고 일본공산당을 있는 그대로 봐주는 이가 늘었다. 이것이 유권자의 신뢰를 이끌어낸 힘이다.
일본공산당의 지방정치가 주민과 생활 중심으로 바뀐 계기는 뭔가.
물론 일본공산당에는 마르크스주의라는 기본 사상이 있다. 하지만 민의가 반영되지 않은 사상은 허수아비와 다를 게 없다. 주민들이 진정으로 바라는 것을 찾아 일본공산당이 문제를 해결하고 개선해나가야 한다는 의식이 당 전체에 굳게 자리잡으면서 민생 중심으로 당이 추구하는 방향이 바뀌었다.
한국에선 6월에 지방선거가 있다. 진보정당의 지방의회 진출이 쉽지 않은 상황인데 이들에게 조언을 해준다면.
지방의회의 존재 이유는 주민들이 생활하면서 겪는 불편이나 고민, 요구사항을 듣고 이를 정책으로 개선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다양한 주민들과 상담한다. 현 제도로 해결이 가능한 고민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것도 있다. 여하튼 정치를 바꾸지 않으면 풀 수 없는 문제가 많다. 소수 정당이 자신에게 공감하는 지지자를 늘리고 이를 바탕으로 선거에서 세를 키워 정치를 바꾸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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