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11일 오후 6시30분. 일본 도쿄 도쿄도의회 의사당 회의실엔 야마우치 레이코 ‘도쿄생활자네트워크’ 도쿄도의원(지역구 고쿠분지·구니타치 시) 주최의 ‘시민과행정협의회’를 보려고 구니타치시 주민 20여 명이 앉아 있었다. 시민과행정협의회는 도쿄의 ‘지역정당’ 도쿄생활자네트워크가 주민과 지방의회·지방정부와 머리를 맞대고 생활 문제를 함께 해결하기 위해 만든 주민 공청회 성격의 자리다. 이날 협의회 안건은 실내 화학물질 오염 방지 대책, 공해 방지 조례 개정, 어린이 식품 안전 대책 등이었다. 주부부터 기업체 대표까지 협의회 참석자들은 자신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개진하거나 진지한 표정으로 협의회 내용을 메모하면서 회의에 집중하고 있었다. 시민의 의견이 행정관청에 바로 전달되는 게 쉽지 않은 한국의 정치 풍토에서 보자면 부러운 풍경이었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주민 삶의 질 높이는 데 주력</font></font>이날 협의회에 참석한 구니타치시 주민 오가타 메구미는 “내가 사는 동네의 어린이 식품 안전 문제가 협의회 안건으로 올라와 어떤 얘기가 오가는지 알고 싶어 왔다”며 “올해 큰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해서 이 문제에 더 관심이 간다. 우리 동네에서 식품 안전을 위협하는 요인이 뭐가 있는지 확인하는 것도 주민에겐 중요하다”고 말했다. 오가타의 설명에 연신 고개를 끄덕이던 구니타치시 주민 마쓰야마 겐이치도 거들었다. “최근에 어린이 식품 관련 문제가 자꾸 터져서 걱정이 많았다. 주민들이 서명운동을 벌이고 야마우치 의원에게 계속 행정관청에 우리 의견을 전달해달라고 요구도 했다. 아무래도 도쿄생활자네트워크가 지역정당이다보니 지역의 이해와 요구를 중앙정당보다 제대로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실제 야마우치 의원이 이 문제에 계속 관심을 보이면서 결국 구니타치시가 협의회에 참석해 어린이 식품 안전 대책을 주민과 함께 논의하게 됐다.
이처럼 지역정당은 말 그대로 지역 현안에 집중해 주민 삶의 질을 높이는 데 가장 큰 관심을 둔다. 흔히 정당을 ‘정견을 같이하는 사람들이 정치권력 획득을 목표로 결합한 정치결사체’라고 한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정당이 추구하는 권력은 ‘중앙권력’이다. 그런데 일본에서는 최근 지역주민의 생활 문제를 지역 내에서 정치적으로 풀어야 한다는 공감 속에 지역정당이 ‘대안정치’로 자리잡고 있다. 일본의 지역정당은 지역주의에 기생하는 정당이란 뜻이 아니라 ‘특정 지역에서만 활동하는 정당’을 말한다. 무엇보다 지역정당이 일본에서 대중의 관심을 끌어모으는 이유는, 기존 정당이 각 지역의 이해와 요구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문제 해결에도 한계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국에선 정당법이 지역정당 출현을 원천적으로 가로막고 있다. 정당법상 정당은 서울에 중앙당 사무소를 두고, 5개 이상의 시·도 당을 가져야 하며, 각 시·도 당은 관할구역 내 주소를 둔 1천 명 이상의 당원을 가져야 한다. 게다가 현실의 지역정치는 중앙정치에 묶여 있어 지역정당이 당장 생겨난다 해도 제구실을 할 수 있을지 미지수다. 이번 6·13 지방선거 양상을 보더라도 지역 이슈는 중앙정치의 힘겨루기에 밀려 온데간데없다. 하세헌 경북대 교수(사회과학대 학장)는 “일본에서는 정당 설립 요건을 우리처럼 헌법이나 법률로 규제하지 않고, ‘결사의 자유’란 개념에서 출발해 지역별 정당이 출범하고 또 전국적 주목을 받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급여 대부분 기부하는 의원들 </font></font>일본의 지역정당 운동은 전후 반세기 넘도록 중앙정치를 지배한 자민당·공명당의 보수연합이 무너진 뒤 더욱 탄력을 받았다. 후지카와 고타로 일본 지방자치네트워크연구소 연구원은 “중앙정치나 중앙정당이 구심력을 발휘하지 못하자 각 지역의 정치세력이 기존 정당에서 독립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며 “무엇보다 지역정당이 지방자치 속으로 급속도로 파고들 수 있었던 건 누구나 느끼는 생활 문제를 지역정당이 앞장서서 풀어낸다는 공감을 주민들 사이에서 얻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도쿄생활자네트워크를 비롯해 가나가와현의 ‘가나가와네트워크’, 지바현의 ‘시민네트워크 지바’, 요코하마시의 ‘요코하마네트워크’, 나고야시의 ‘감세일본’ 등이 일본의 대표적인 지역정당이다.
여러 지역정당 가운데서도 가장 눈길을 끄는 건 도쿄생활자네트워크다. 가장 역사가 오래됐고 활동력도 왕성하다. 1977년 “삶의 방식을 바꾸자”는 슬로건을 내걸고 탄생해, 이듬해 도쿄도 네리마 구의회 선거에서 첫 지방의원을 배출했다. 지역주민의 요구를 지방정부의 정책으로 바꿔나가는 도쿄생활자네트워크의 힘은 독특한 조직 구조에서 나온다. 도쿄생활자네트워크는 주민을 정치인으로 만드는, 이를테면 ‘생활정치인’을 양성하는 게 목적이다.
처음 네리마구 1곳에서 시작해 현재는 도쿄에 분회 32개가 있고, 회원 7만여 명 가운데 55명이 지방의원으로 선출돼 활동한다. 도쿄도 지방의회 의원의 5%가 채 안 되지만, 7만 명이 넘는 회원과 의원 출신 간부들의 정치 참여가 활발해 영향력이 막강하다. 니시자키 미쓰코 도쿄생활자네트워크 대표위원(전 도쿄도의원)은 “공청회에서 적극적으로 지역주민들의 의견을 듣는 것이 중요하다”며 “이를 통해 주민이 요구하는 게 무엇인지 정해지면 이를 지방의회에서 정책으로 실현시킨다”고 말했다.
회원들이 내는 회비도 있지만, 소속 의원들이 자신의 급여 대부분을 기부해 주민의 정치활동 자금으로 쓴다. 선거 자금은 대부분 직접 모금해 마련하고 회원들의 자원봉사로 선거운동을 펼친다. 의원의 직업화나 특권화를 막기 위해 임기는 최대 3선(12년)으로 제한한다. 새로운 세대를 의회에 보내 훈련해야 조직의 건강성을 유지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니시자키 대표위원은 “임기를 마친 의원은 전문성을 살려 시민정치를 펼치기 위한 활동을 돕는다”며 “생활 속 과제 하나하나가 모두 정치와 직결돼 있다”고 말했다. 도쿄생활자네트워크는 출범 이후 아이 돌봄, 아동 인권, 여성과 노동을 테마로 프로젝트를 펼쳐 관련 조례를 만들었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지역을 바꾸는 주인공은 주민 </font></font>일본에서 주민이 직접 나서 지방자치에 참여하는 건 도쿄생활자네트워크만의 특수한 사례가 아니다. 가나가와현 의회엔 1983년부터 ‘가나가와네트워크’ 소속 의원들이 활동하고 있다. 주부들을 중심으로 합성세제 추방에 대한 관심에서 시작된 생활협동조합 운동이 그 뿌리다. 1980년 가나가와현에서 활동하던 ‘가나가와 생협’ 조합원들은 주민 20만 명의 서명을 받아 현내 7개 시의회에 합성세제 추방 조례를 제정하도록 요구했다.
그러나 조례 제정이 부결되며 주민들의 요구도 받아들여지지 않는 듯했다. 여기에 자극받은 주민들은 자신의 목소리를 그대로 전할 지방의원의 필요성에 눈을 떴다. 결국 주민들은 3년 뒤 지방선거에서 독자 후보를 내 가와사키 시의회 의원을 배출하고 직접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을 텄다. 이후 가나가와네트워크는 1990년대를 거치면서 각 지역의 환경·교육·복지 등 생활 전반의 문제로까지 영역을 확장했다. 30년 넘게 꾸준히 의회에 진출해 거둔 성과는 적지 않다.
대표적인 게 쓰레기 재활용, 폐식용유로 비누 만들기, 유기농 식품 이용, 공해물질 생산하는 제품 쓰지 않기 등 일상생활과 밀접한 활동이다. 가나가와네트워크는 활동 상황을 주민들에게 알리기 위해 매주 소식지를 만들어 배포한다. 후지카와 연구원은 “가나가와네트워크는 주민의 힘을 한곳으로 모을 수 있는 구심점을 만들고 지방정부에 주민의 뜻을 끊임없이 전달했다”며 “이런 활동이 쌓여 주민에게 인정받게 되고 이것이 지방정부를 움직이는 힘이 됐다”고 말했다. 결국 동네를 바꾸고 새롭게 만드는 힘은 자치에 관심을 기울이고 참여한 주민이었다는 얘기다.
지방자치 발전과 지역 문제 해결을 위해 지역정당이 필요하다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후지카와 연구원은 “갈수록 다양해지는 지역 과제를 해결하고, 나날이 성장하는 시민의 정치의식을 받아안기 위해 지역정당의 역할이 커지고 있다”고 말했다. 지방자치가 시작된 지 20년이 넘었지만, 여전히 지방의회가 지방정부를 제대로 견제하지 못하고 ‘중앙정치의 시녀’로 전락해버린 한국의 상황에서 곱씹어볼 만한 얘기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지방자치의 주체가 변해야 </font></font>더불어민주당과 자유한국당을 양 축으로 하는 한국의 정치구도는 콘크리트만큼이나 단단하다. 중앙정치와 소속 정당의 이해관계에 갇힌 지방정치는 점점 메말라가고 있다. 지방의원들은 소속 정당에 따라 자치단체 사업에 ‘거수기’ 노릇을 하는 것도 늘상 있는 일이다. 하지만 정당을 통한 대의민주주의가 주민들의 염원을 담아내지 못할 경우 그들의 저항은 거세질 수밖에 없다.
대의민주주의의 총아가 정당이었다면 주민자치 시대를 이끄는 기관차는 ‘주민의, 주민에 의한, 주민을 위한’ 지역정당이다. 그리고 지방선거는 지역정당이 주민들 삶에 뿌리내릴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준다. 지역의 사회·경제·환경 이슈를 풀어갈 주민주도형 지역정당이 생겨나 지방선거에 후보자를 직접 공천하고 또 성공을 거둘 때 비로소 중앙정당이 왜곡한 지역자치를 진짜 풀뿌리 자치로 바꿀 수 있다. 분명한 건, 지방자치의 주체가 변하지 않으면 지방자치의 내용도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도쿄(일본)=<font color="#008ABD">글 </font>김연기 기자 ykkim@hani.co.kr<font color="#008ABD">사진 </font>이경주 한겨레TV PD leep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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