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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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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조폭이 아니다”

홍준표 검사 시절 ‘국제-PJ파’ 두목으로 찍혀 구속된 여운환

진실 밝히기 위해 사건 26년 만에 광주지법에 재심 신청
등록 2017-12-15 09:26 수정 2020-05-03 04:28
여운환씨는 12월5일 재심 신청을 한 뒤 한겨레신문사를 찾았다. 26년 동안 새겨진 ‘조폭 두목’이라는 낙인을 이번에는 지워낼 수 있을까.

여운환씨는 12월5일 재심 신청을 한 뒤 한겨레신문사를 찾았다. 26년 동안 새겨진 ‘조폭 두목’이라는 낙인을 이번에는 지워낼 수 있을까.

“내가 조폭 같소?”

여운환(64)씨가 자리에 앉자마자 기자에게 대뜸 물었다. ‘그렇다’라면 자리를 박차고 나갈 기세다. 26년 전 일임에도 그에게 이 질문은 현재진행형이다. 노태우 정권 때 진행된 ‘범죄와의 전쟁’ 중에 그를 검거한 동갑내기 검사 홍준표는 드라마 의 주인공인 ‘정의로운 검사’ 강우석(박상원)의 실제 모델로 알려지면서 국회의원을 거쳐 대통령 후보가 됐고, 이제 제1야당의 대표다. 여씨는 의 또 다른 주인공인 조직폭력배 박태수(최민수)와 조연 이정도(정성모)의 모델이 됐다. 가 홍 대표의 인생에 커다란 날개가 됐다면, 여씨에게는 여전히 족쇄다. 가 언급될 때마다 여씨는 검찰이 호남 최대 조직으로 단정한 ‘국제-PJ파’ 두목이라는 낙인 아래서 신음해야 했다. 억울했다. 그의 판결문(1992년)을 보면, 여씨는 조폭 두목이 아니다. 재판부는 여씨가 ‘두목’이라는 중인의 진술을 믿기 어렵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대신 “자금책 및 두목의 고문급 간부”라며 징역 4년을 선고했다. 여씨는 “검찰은 이 사건의 두목이 누구인지 밝히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두목은 존재하지 않는데 두목의 고문급 간부만 있는 셈”이라며 “납득할 수 없다”고 말했다. 광주지검 강력부 홍준표 검사가 그를 조폭의 간부(애초 두목으로 지목)로 만든 유일한 근거는 한 조직원의 진술이다. 진술은 피고인과 변호인 없이 진행한 ‘공판기일 전 증인신문’에서 이뤄졌다. 이런 수사 행태는 1996년 위헌 결정이 내려졌다. 여씨는 1990년대 후반에야 이 사실을 알았다. 이후 여씨는 재심을 고민했다. 하지만 가족이 말렸다. 더 이상 송사에 휘말리지 않기를 원했다. 또 2001년 ‘이용호 게이트’에 연루돼 징역형을 선고받으며 상황이 여의치 않게 됐다. 그렇게 10년 이상의 세월이 더 흘렀다. 여씨는 재심을 포기할 수 없었다. 결국 12월5일 광주 고등법원에 재심을 신청했다. 그날 여씨는 서울 공덕동 한겨레신문사에서 과 만났다.

라는 족쇄 조직폭력배라고 법의 심판을 받은 지 20년이 넘었다. 이제 와 재심 청구를 하는 이유가 뭔가.

사업을 할 때마다 ‘조폭 두목’이라는 선입견 때문에 공정한 경쟁을 원해도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잊을 만하면 홍준표는 를 꺼내들었다(지난 5월 대선에서 의 작가 송지나씨는 제작 과정을 설명하며 홍준표 후보는 당시 만난 여러 검사 가운데 한 명일 뿐이라고 밝혔다). 그때마다 내 이름이 따라 나왔다.

재심을 신청한 결정적 계기는.

4년 전(2013년) 책을 써야겠다는 생각으로 국가기록원을 찾았을 때 내 재판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는 말을 듣고 재심을 사실상 포기했다. 그러던 차에 광주지검에 근무했던 한 법조인이 “여 선생의 기록은 주요 기록이니 영구 보존돼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 사실을 안 게 7월이다. 실제로 변호인과 함께 가보니 기록이 남아 있었다.

가족이 재심을 말렸을 것 같다.

아내의 반대가 제일 컸다. “이제 조용히 애들 키우면서 살자, 울분을 참지 못하면 당신만 상처받고 병 얻는다”고 했다. 그런데 요즘 홍 대표를 보니 또 도저히 못 참겠더라. 나뿐 아니라 가족에게도 ‘조폭 두목 가족’이라는 꼬리표가 달렸다. 그렇게 26년을 살아야 했다.

여씨는 1991년 홍 대표와 만나고 그가 자신을 구속할 때까지의 과정을 상세히 기억했다. 여씨는 당시 전남 목포의 관광호텔을 인수하는 등 사업가로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홍준표 대표와) 첫 만남은 어땠나.

어느 날 지인이 골프장에서 “홍준표라는 검사와 함께 왔으니 만나보지 않겠느냐”고 제안했다. 난 정중하게 거절했다. (그는 자서전 에서 홍준표 대표에 대해 “다소 거만해 보였고, 힘을 가진 자 특유의 거들먹거리는 모습도 보기 좋지 않았다”고 평했다). 그런데 나중에 홍 대표의 책을 보니 나를 소개하겠다고 하는 인사에게 “그는 깡패인데, 어떻게 검사와 깡패와 인사를 합니까”라고 도리어 화를 냈다는 대목이 나오더라. 그때 홍 검사와 만남을 주선한 지인은 김태촌(서방파 두목)의 직계 후배이자 조직에서 부두목급으로 활동하던 깡패 출신 사업가였다. 나와 처음 만나는 순간에 대한 기술부터 거짓말을 써놓고 있었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홍준표와의 악연

1991년 광주지검 강력부로 배치된 홍준표 검사는 광주 지역을 중심으로 한 조폭 소탕에 나섰다. 그 과정에서 여씨를 ‘국제-PJ파’ 두목으로 보고 내사를 했다. 홍 검사는 여씨가 프랑스 출장을 간 사이 호남 최대 폭력조직을 결성해 활동했다는 이유로 사전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귀국한 여씨는 수배자가 됐다. 수배 중 대대적으로 보도된 것이 ‘칼배달 사건’이다. 여씨는 “홍 검사는 언론플레이로 나를 수사 검사에게 칼을 보내 협박한 조폭으로 만들었다. 그게 사실이라면, (내 사건을 다룬) 어떤 법조인도 나를 좋게 볼 리 없다. 살면서 암묵적으로 수없이 손해를 봤다”고 말했다.

당신의 판결문을 보니 ‘칼 배달’ 협박은 재판 과정에서 다뤄지지 않았다. 재심 여부를 결정하는 데 고려될 수 없다.

맞다. 그렇지만 홍 대표가 언론을 이용해 한 사람의 인생을 망가뜨린 진실이 밝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독일제 명품 칼세트를 추석 선물용으로 같은 아파트에 사는 지인들에게 돌렸다. 그 과정에서 배달사고가 난 것을 두고 협박을 했다니….

‘칼배달’ 사건의 진상 배달사고라고?

당시 같은 아파트에 홍준표랑 이름이 가운데 글자만 다른 의사가 살았다. 제대로 선물이 도착했으면 문제가 안 됐을 것이다. 그분이 부재중이라 배달원이 칼 세트를 경비실에 맡겼다. 하필 그때 경비원이 이름을 착각해 의사가 아닌 검사 홍준표에게 선물을 잘못 전달했다. 그다음 일이 홍 검사를 더 화나게 한 것 같다. 우리가 칼이 잘못 배달됐다는 사실을 뒤늦게 확인하고 줬던 것을 다시 회수했다. 일이 그렇게 꼬였다. 이후 홍 검사는 내가 칼을 보내 검사를 협박했다며 언론플레이를 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 사실(칼 협박)을 검찰 상부에 보고해 나를 공공의 적으로 만들었다. (여씨는 2001년 김대중 정부 때 ‘이용호 게이트’에 연루돼 3년형을 선고받았다. 여씨는 당시 검찰이 이용호 게이트와 자신의 연관성은 찾지 못해 변호사법 위반, 알선 수재, 횡령 등 별건 혐의로 자신을 기소해 유죄판결을 이끌어냈다고 주장한다. 검찰은 이후 복역 중이던 여씨에게 무고죄와 경매방해죄를 추가했다. 여씨는 이 또한 “검찰을 칼로 협박한 조폭 두목이라는 낙인 때문”이라며 억울해했다.)

칼배달 사건은 기소 내용에 포함되지 않았다. 사실이었다면 큰 중죄로 다뤄졌어야 한다. 검찰 조사 과정에서 빠진 것인가.

검찰 조사 과정에서 누구도 칼에 대해 물어보지 않았다. 재판 과정에서도 전혀 거론되지 않았다. 칼 협박이 사실이면 검사가 수사 과정에서 노골적인 협박을 받은 것이다. 당연히 죄를 물어야 하는 것 아닌가. 홍 검사가 여론과 검찰 윗선을 자기 편으로 만들기 위해 없는 일을 꾸며낸 것이다.

방금 주장은 당신의 책 에도 실려 있다. 홍 대표 쪽에서 반응을 보였을 법한데.

전혀 없었다. 2014년에 책을 내면서 국회의원 전원과 주요 언론사 간부에게 책을 보냈다. 그러면서 공개적으로 문제 제기를 했지만 홍 대표는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출간일이 묘했다. 하필 4월16일이었다. 세월호 사건이 난 날이다. 홍 대표가 운이 억세게 좋은 건지, 내가 (조폭이라는 굴레를) 운명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인지…. 밤잠을 이루지 못했다. 내 얘기를 언론에서 다룰 상황이 아니었다. (세월호 사건을 보면서) 내 뜻도 접어야겠다고 생각했다.

홍 대표와 만날 기회는 없었나.

2014년 자서전을 내면서 당시 홍준표 경남도지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1991년 처음 만나 이듬해 조폭 누명을 쓰고 구속된 뒤 처음이었다. 진실을 확인하고 싶었다. 홍 지사 비서에게 연락처를 남겼지만 회신이 오지 않았다. 한 차례 더 연락을 했지만 마찬가지였다.

아쉽지 않았나.

연락이 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와 대화할수록 자신이 ‘조작된 영웅’이라는 사실이 드러날 것이니까.

홍준표 대표에게 하고 싶은 말은.

2014년 책에도 썼지만 정말 할 말이 많았다. 하지만 이젠 잊고 싶다. 아내도 나도 홍준표라는 이름에 트라우마가 있다.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재심을 하겠나. 홍 대표가 나한테 진실을 밝히면서 정중한 사과를 했다면 지나갔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더 이상 희생양 없어야”

여씨는 젊은 시절 자신이 일탈한 사실을 부인하지 않았다. 중학교 때부터 거리를 방황했다. 싸움에 앞장서기도 했다. 결국 21살 때 상대를 크게 다치게 했다. 피해자와 합의하고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여씨는 “이후 아내를 만나 ‘그 생활’을 정리했다. 경찰이 내가 그때 자주 다니는 당구장(국제)과 음악감상실(PJ)의 이름을 붙여서 무슨 무슨 파라고 이름을 지어놓은 것”이라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폭력조직 ‘국제-PJ파’라는 이름은 여기서 나왔다. 하지만 “어떤 조직에도 가입하거나 어울린 적이 없다”고 그는 주장했다. 여씨는 현재 광주에서 웨딩 사업을 하고 있다. 재심이 받아들여지면, 여씨는 자신이 생각하는 오랜 ‘누명’을 벗을 수 있을까. 그가 말했다. “재심 신청이 받아들여져 무죄가 나와야 검찰의 무리한 수사로 인한 희생양이 더 이상 나오지 않는다. 모래시계는 더 이상 홍준표의 것이 아니어야 한다.” 인터뷰 내용과 관련해 홍준표 대표 쪽 관계자는 “여운환씨 관련해 이미 나온 보도를 포함해 홍 대표가 별도의 언급을 하지 않고 있다”며 “대응하려면 진작에 했을 것”이라고 답했다.

하어영 기자 haha@hani.co.kr
사진 김진수 기자 js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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