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평택 대추리의 들판은 아름다웠다. 노을이 질 때면 더욱더 아름다웠다. 한국에서 끝없이 이어진 지평선을 볼 수 있는 몇 안 되는 곳이었다. 의경이었던 그는 대추리에 있었다. 고참들이 그를 붙잡고 지평선을 가리키며 “×나 멀지? 저게 앞으로 남은 네 군 생활이야”라는 농담 따먹기를 했다. 그 농담 따먹는 와중에도 대추리는 긴장감으로 가득했다. 자대 배치를 받자마자 대추리로 뽑혀갔고 바로 악명 높은 ‘여명의 황새울’ 작전이 펼쳐졌다.
시위대에 궁금증 품었던 의경시위대와 의경은 대치했다. 그 피로한 대치와 싸움의 현장에서 시위대를 원망할 법도 했지만 그는 궁금해졌다. ‘저 사람들은 왜 저렇게까지 나와 땡볕 아래서 뛰어다니며 싸우고 있는 걸까?’
어쩌면 그때의 생각과 궁금증이 지금의 그를 만든 건지도 모른다. 대추리에서 방패를 들고 서 있던 의경 황경하는 전역한 뒤 음악을 하는 활동가가 됐고, 음악을 하는 기획자가 됐다.
부족하지 않은 중산층에서 자랐다. 보수적인 경찰 아버지 밑에서 조용한 청소년기를 보내고 대학생이 됐다. 큰 말썽을 부린 적도 없고 학생운동은 그와 무관한 말이었다. 전역 뒤 복학하고 만난 이가 지금은 음악가가 된 ‘회기동 단편선’(박종윤)이었다. 단편선은 1년 후배인 황경하를 데리고 여기저기를 다녔다. 그 가운데는 자본과 싸움에서 가장 대표적인 승리의 사례가 된 식당 ‘두리반’도 있었다. 음악가들이 연대해 그곳을 지켰고 이겼다. 거기에서 그는 뒤에서 머리를 긁적거리며 어쩔 줄 몰라 하던 학생이었다.
“그때 저는 뒤에서 머리만 긁적거리고 있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두리반이 너무 좋은 학교였다는 생각이 들어요. 많은 걸 경험하고 배우고, 저는 되게 운이 좋은 건데 당시 함께했던 음악가들에겐 두리반이 서로 연결될 수 있는 기점이 됐고, 도움을 주는 네트워크가 형성됐거든요. 그게 저는 운이 되게 좋은 거라 생각했는데 우리 다음 세대는 그러지 못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든 거예요. 그래서 제가 경험한 것처럼 (다른 사람들도) 운이 좋게 만드는 일을 하려고 했던 것 같아요. 우리가 운이 좋게 음악가들끼리 기대고 힘을 합쳤던 것처럼 다음의 음악가들에게도 그런 기회를 만들어주고 싶었어요.”
내가 황경하를 처음 본 건 EBS 의 신인 발굴 프로그램 ‘헬로루키’ 경연대회에서였다. 그는 펑크 밴드 ‘노컨트롤’의 기타리스트였다. 두리반에 있을 때도 그는 노컨트롤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두리반과 명동의 카페 ‘마리’ 같은 ‘침탈’의 현장에서 그는 노컨트롤의 멤버로 연주하고 노래했다. ‘헬로루키’는 그에게 또 다른 의미였다. ‘경연’ 무대에 선다는 건 인정받고 싶다는 행위의 한 방식이다. 한때 그도 자신의 음악을 더 많이 알리고 싶었고 인정받고도 싶었지만, 그런 마음은 어느 순간 사라졌다. 지금은 자신의 정체성을 ‘기획자 50 활동가 50’으로 규정한다.
며칠 전 그는 서울 서촌에 있었다. 서촌에 있는 ‘본가궁중족발’의 강제집행을 막기 위해 그는 용역들과 몸으로 싸우고 그 앞에서 공연을 기획하며 노래로도 싸웠다. 수많은 강제집행 현장에 그가 있었다. 두리반의 승리가 큰 동력이었다. 연예인 건물주와 싸움 때문에 많은 화제가 됐던 이태원 갤러리 ‘테이크아웃드로잉’이나 신사동 가로수길 곱창집 ‘우장창창’뿐 아니라 명동 카페 ‘마리’ ‘아현포차’ 등 젠트리피케이션 현장에서 그는 음악가들을 규합하고 노래로 자본과 싸운다.
음반도 제작했다. 작년 11팀의 음악가가 모여 만든 을 기획·제작했다. 이 음반으로 그는 한국대중음악상 시상식에서 선정위원 특별상을 받았다. 그는 상을 받은 뒤 “제가 감정이 무딘 편인데 이 음반을 만들면서 많이 울었습니다. 너무나 많은 우리 이웃들이 어처구니없고 비참하고 불행한 이유로 쫓겨납니다”라고 수상 소감을 전했다. 그리고 리쌍과 우장창창을 언급하며 “한 가장이 4인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서 6년 동안 열심히 일궜던 삶의 터전입니다. 함부로 빼앗지 마십시오. 돌려주십시오. 평범한 우리 이웃의 삶을 짓밟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란 말을 덧붙였다.
“음반 만들면서 많이 울었다”인터넷 생중계로 시상식을 보던 많은 이들이 반발했다. 우장창창의 서윤수 사장은 대중에게 대표적인 ‘을질’의 대명사로 조롱받고 있었다. 자신을 정의롭고 상식적이라 믿는 이들에게 우장창창은 떼거리를 쓰는 을질이고 아현포차는 세금을 내지 않는 탈법 집단이다. “아현포차 같은 경우는 ‘노점하다 집에 갈 때 BMW 타고 간다’는 소문도 있더라고요. (웃음) 사람들의 실제 삶을 보고 나면 절대 그런 생각을 할 수 없어요. 서윤수 사장님이 어떻게 사는지, 여성이고 노인이고 가난한 아현포차 할머니들이 어떻게 삶을 헤쳐왔는지 모르는 사람들이 인터넷에서 몇 줄 보고 이야기를 해요. 그 사람들이 왜 그렇게 분노하는지 이해는 하는데 그 사이를 연결할 수 있는 걸 만들어가는 게 예술가의 역할이지 않을까 생각해요.”
얼마 전 그가 기획한 새 음반이 나왔다. 정식 이름은 이다. 음반 제목처럼 그와 뜻을 같이하는 동료들이 사드 배치가 결정된 경북 성주 소성리 할머니 할아버지와 연대하며 만든 노래들을 모았다. 부녀회장이 68살이고 주민 대부분이 80살이 넘어가는 오래된 마을에서 그들은 일을 돕고 그곳의 경험을 노래로 만들었다. 처음 두리반이 그랬던 것처럼 소성리도 그들에게 또 다른 학교가 됐다.
“투쟁 1년이 지나가면서 거기에 상주하고 계신 활동가 분들도 계시고, 많은 분이 함께 공동체를 이뤄 지내고 있어요. 서로에게 많이 배우는 거예요. 여성들에게 왜 이렇게 옷을 짧게 입고 다니냐며 뭐라 하시던 어르신들도 이제는 서로 이해할 수 있게 된 거예요. 사드를 반대한다면서 홍준표의 지지율이 더 높다고 조롱하고 성주를 악마화하는 행위들이 너무 편협하게 느껴졌어요. 너무 연세가 많고 그렇게 오래 살아오신 분들인데 그분들에게 문재인이 어떻고 홍준표가 어떻고 하는 게 큰 의미는 없을 것 같아요.”
음반 제목에서 ‘새 민중음악’이란 표현이 눈에 들어왔다. 그에게 민중음악은 흘러간 음악도 아니고 구린 음악도 아니다. 처음 ‘민중음악’이란 말을 쓰겠다고 할 때 주위에서 많이 말렸다. 그 말이 가진 무게감도 있었고, 한편에선 (음악적으로)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시선도 있었다. 이런 것들이 그에게 “서로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것에서 생기는 문제”로 받아들여진다. 그걸 돌파하고 싶었다. 이소선합창단이 부른 ‘노래를 찾는 사람들’의 이나 소성리 할머니들이 모여 만든 소성리합창단의 만큼 감동적인 노래는 없었다.
현장 사람에게 주는 깊은 감동“들려주고 싶어서 음악을 한다고 할 때, 듣는 대상이 누구일까 생각을 해봤어요. 대중음악 같은 경우는 많은 사람이 듣고 공감하는 거죠. 음악에 1차적 감동과 2차적 감동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1차적 감동은 기술적 부분이라든지 편곡의 위력 같은 게 작용하는 거겠죠. 2차적 감동은 내 얘기일 때, 나와 연관이 있을 때 오는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대중음악이 사랑이나 이별처럼 많은 사람이 공감할 수 있는 얘기를 노래하는 거라면, 현장에서 만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그들에게 감동을 주는 음악은 무얼까 고민하기 시작했어요.”
그는 민중음악이란 말을 두고 고민했다. 민중음악의 역사에 대해 공부도 했고, 전문가를 초청해 강의를 열기도 했다. 그리고 보편적 대중이 아니라 현장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 음악이 민중음악이 아닐까 하는 나름의 정의를 내렸다.
우장창창의 서윤수 사장을 예로 들었다. 서 사장은 이른바 ‘출장음악가’라 하는 김동산의 노래를 듣고 펑펑 울었다. 김동산은 출장음악가란 별칭처럼 그때그때 상황에 맞게 즉석에서 노래를 만들고 부르는 음악가다. 강제집행당한 우장창창 앞에서 김동산은 서 사장을 위해 이라는 노래를 불렀고, 그것은 서 사장에게 가장 소중한 노래가 됐다. 그걸 보며 그는 노래가 “많은 사람에게 적당한 감동을 줄 수도 있지만 아주 극소수의 사람에게 진짜 깊은 감동을 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이처럼 ‘그분들이 듣고 용기가 되고 위로가 되고 힘이 되는 노래를 만들고 싶다’는 바람으로 을 만들었다. ‘Vol. 1’에서 알 수 있듯 계속 새로운 민중음악 선곡집을 만들 계획이다. “100집을 내고 200집을 내면 언젠가 세상이 더 많이 알아주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다.
두리반에서 시작한 음악의 투쟁은 계속 선순환을 이끌어냈다. “음악이 작용”할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달려가 노래로 연대하고 싸웠다. 그 과정에서 좋은 동료를 많이 만났고 동료들도 음악적 성장을 했다. ‘테이크아웃드로잉’ 현장에서 만난 음악가들과 음반을 만들었다면, 우장창창 현장에서 만난 음악가들과 을 만들었다. 이 선순환이 계속되길 바란다.
지금 그는 ‘콜밴’의 음반에 프로듀서로 참여해 녹음과 제작을 돕고 있다. 콜밴은 ‘콜트·콜텍 해고노동자 밴드’의 줄임말이다. 콜트·콜텍에서 기타를 만들다 부당 해고당한 노동자들이 밴드를 만들어 자신들의 이야기를 노래로 알리고 있다. “복직하자마자 정년퇴직해야 한다”고 우스갯소리를 할 만큼 10년 넘는 긴 시간 동안 복직투쟁을 벌이고 있다. “형님들한테 자랑스러운 음반이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많은 신경을 써서 만들고 있다.
대추리와 예술의 힘평택 대추리에는 아름다운 들판과 지평선만 있었던 건 아니다. 황경하를 만난 날 일곱 번째 ‘구본주 예술상’ 시상식이 열렸다. 황경하는 거기에 참석한 뒤 인터뷰를 했다. 황경하는 대추리에서 처음 구본주의 조각을 보았다. 시위대를 막아야 하는 의경 처지에서도 대추분교에 서 있던 ‘갑오농민전쟁’ 조각은 알 수 없는 힘을 느끼게 했다. 그 힘을 느꼈던 황경하는 이제 음악으로 활동하고 운동을 펼치고 있다. 예술의 힘은 그만큼 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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