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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변 마을 ‘신초리’는 어떻게 사라졌나

한강 인도교 지어진 지 100년…

일본 제국주의 세력의 대륙 진출 욕망에 삶의 터전 빼앗긴 300명의 ‘김윤석들’
등록 2017-10-26 21:36 수정 2020-05-03 04:28
1917년 개통됐을 때의 한강 인도교. 공사비용은 83만원으로 당시 쌀 213만 석에 해당하는 액수다. 조선 총독부는 개통식 당시 저녁까지 꽃전차를 운행하며 축제 분위기를 유지했다. 서울시 제공

1917년 개통됐을 때의 한강 인도교. 공사비용은 83만원으로 당시 쌀 213만 석에 해당하는 액수다. 조선 총독부는 개통식 당시 저녁까지 꽃전차를 운행하며 축제 분위기를 유지했다. 서울시 제공

함경도 초산에는 10월2일부터 사흘 동안 첫눈이 내렸다. 5일에는 서울 이화동 낙산 솔밭에서 도박하던 이들이 발각됐는데 종로서 순사들의 추적을 뿌리치고 도망쳤다. 100년 전 1917년 10월7일 한강 인도교 도교식(개통식) 행사는 계획한 오전 11시보다 조금 늦은 11시12분에 폭죽 소리로 시작됐다. 용산에서 백사장을 걸어 행사장에 도착한 1천여 명의 내빈을 대표한 인사말은 백작 이완용이 했다. 그는 총독 하세가와 요시미치에 대한 치사와 폐하 만세 구호를 외친 데 이어 총독 만세 삼창을 선창했다. 그날 시장에서 쌀 한 되 값은 39전이었다.

일제 치도 계획 완수에 맞춘 한강 인도교 개통

인도교 공사 비용은 애초 74만원에서 늘어난 83만원으로 마무리됐다. 당시 시세로 쌀 213만 석에 해당하는 액수다. 공사는 1917년 7월9일 끝났고, 준공검사는 7월27일이었다. 10월7일 행사를 연 것은 조선총독부 국책사업인 제1기 치도(길닦이) 계획 완수에 기일을 맞춘 것이었다. 이는 식민지 도로정비 계획이 1차적으로 마무리됐음을 뜻하는 일이었다.

그날 저녁 꽃과 전등으로 장식한 꽃전차가 게이조(경성) 시내를 내달렸고, 한강다리를 형상화한 모의교전차까지 운행했다. 총독부는 밤늦도록 축하 분위기를 유지해나갔다. ‘낮보다 밝은 다리 위 전등 불빛’을 찾아 사람들은 인도교로 몰려들었다. 용산 일대는 모든 전등을 켜도록 했다. 한강다리 개통은 이처럼 초기 식민지 권력과 자본 역량이 총결집된 현장이자 전시장이었다.

하세가와는 이날 치사에서 ‘7년에 걸쳐 1천만원을 들여 1200여 리 공사를 개수’했다고 했다. 나중에 만주국 국무고문을 맡는 총독부 내무국장(장관) 겸 토목국장 우사미 가쓰오는 ‘구 한국 정부가 낸 길 1200리’를 기초로 길을 닦았다고 말했다. 대한제국 정부가 국토를 종단하는 도로계획을 실행하던 중이었음을 알게 해주는 대목이다.

한강 인도교 기초에 해당하는 6개 기둥 중 물에 가장 깊게 박힌 교량은 90척이었다. 석재 교각 공사는 중국인 인부 30명이 11개월 동안 작업했다. 교상(상판)은 연장 2070척이라고 총독부 공사일지는 밝히고 있다. 공사를 시행한 곳은 하자마구미 경성지점이었다. 1889년 설립된 하자마구미는 식민지 인프라를 구축하는 제국주의 토목자본의 전형이었다. 이들이 영업소를 설치하고 경성에 진출한 것은 1903년이었고, 두 해 뒤 남산 밑 회동에 지점을 개설했다. 하자마구미는 인도교보다 먼저 한강철교(1900), 압록강 철교, 수풍댐 등을 건설했다. 수풍댐은 흥남질소비료공장 등 한때 식민지 조선 산업자본의 4할 가까이를 지배하던 노구치 시타가우의 조선수전이 주도했고, 구보타 유타카가 기획·지휘했다. 해방 뒤에도 일본 토건 세력은 구보타를 중심으로 팔당을 제외한 20개에 이르는 한국 수력발전소 건설을 설계, 감리했다. 하자마구미가 조선지점 건축부를 설치한 것은 1927년이었다. 그 지점 사옥이 현재 용산구에 남아 있다.

한강 인도교 건설은 병탄 직후부터 시작된 조선총독부 1차 치도사업 계획의 하나였다. 일제의 식민 행정은 이 도로를 타고 한반도를 지배해나갔다. 이 길을 따라 시베리아와 만주 진출도 이뤄진 셈이었다. 한강 연결은 대륙 진출을 도모하던 일본 제국주의 세력의 핵심 교두보였다. 인도교 완성 직후 러시아에선 혁명이 일어났다. 이듬해 혁명 간섭군으로 출병한 시베리아행 일본군용 차량 상당수는 이 다리를 건너갔다. 그들은 러시아혁명 붕괴 활동과 함께 독립군 토벌도 수행했다.

다리 건설 위해 평화로운 마을 ‘멸실’

모래밭이 사라지고 한강물로 둘러싸여 있다. <비변사등록>에 과거 노들섬 자리에 농사짓고 고기 잡던 마을 현재 노들섬은 ‘신초리’가 있었다고 기록돼 있다. 식민지
권력은 한강 인도교 건설을 위해 마을 주민들을 추방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겨레 이종근 기자

모래밭이 사라지고 한강물로 둘러싸여 있다. <비변사등록>에 과거 노들섬 자리에 농사짓고 고기 잡던 마을 현재 노들섬은 ‘신초리’가 있었다고 기록돼 있다. 식민지 권력은 한강 인도교 건설을 위해 마을 주민들을 추방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겨레 이종근 기자

용산에서 노량진을 잇는 다리 건설을 한결 쉽게 한 것은 한강 백사장에 있는 둔덕이었다. 오늘날 노들섬 일대를 아우르는 이 지역엔 신초리(新草里)라 하던 마을이 있었다. 한강다리 건설로 100년 전에 사라진 이 마을의 내력을 밝히는 까닭은 간명하다. 20세기 내내 노들섬은 그 자체로 떠도는 국토였다. 한국인이 기록하고 기억하지 않는 한, 국토는 국토 안에서도 멸실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예증이다.

용산 강변에 넓게 형성된 모래밭을 떼어내 섬으로 분리한 건 일제였다. 뒤이어 박정희·전두환 정권 때 진행된 1·2차 한강종합개발사업으로 백사장 모래를 파내 공사 자재로 쓰면서 인공섬은 오늘날 같은 모양이 되었다. 이 백사장에서 울려퍼진 유명한 선거 구호가 ‘못 살겠다, 갈아보자’였다. 1956년 5월3일 대통령선거 후보 신익희 유세에 한강 백사장에 모여든 20만여 청중은 한국 광장 정치의 서막이었다.

이곳 신초리가 처음 언급된 문헌은 현재까지 확인된 바로 (숙종 9년·1683)이다. 신초리는 농사도 짓고 물고기도 잡고 배를 만들던 곳이었다. 이 기록만으로도 마을의 역사는 200년이 훌쩍 넘는다. 이름 뜻을 좇아보면 신초리는 풀이 무성하던 강변 마을이 아니었을까 짐작된다.

에 나오는 내용은 조선시대 때 신초리의 역할을 잘 보여준다. 이지화(李枝華)는 배 5척을 새로 건조하는 책임을 맡고 있던 군대 책임자였다. 물자를 절약하고 융통해 6척을 추가로 만들었고, 나룻배도 2척을 더 생산했다. 이에 대해 비변사에 보고하니 상을 주자는 청이다. 이지화가 능력 있는 군인이었던 것은 맞겠지만, 배 만드는 재료의 상당 부분을 제공하고 또 일을 해야 했던 건 신초리 백성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신초리에는 서울 경비와 훈련을 맡고 있던 훈국(훈련도감)의 둔전 땅이 제법 있었다. 이런 사실은 1896년 5월 신초리 농민 정문오(鄭文吾) 등이 언급된 기록에 나와 있다. 훈국 땅을 부쳐먹고 살던 농민들은 행정체계가 크게 바뀐 갑오개혁 이후 마땅히 세를 낼 곳이 없어졌다. 그러자 이 일대 농토를 관리할 감관(조선시대에 관아나 궁방에서 금전·곡식의 출납을 맡아보던 벼슬아치)과 마름을 정해서 보내달라고 요구한다. 신초리 사람들은 군부대에 세금을 내는 것보다 정부 관리 아래 들어가는 게 덜 가혹하다고 여겼던 듯하다. 어쨌든 감관과 사음(마름), 거기 딸린 식솔까지 먹여살려야 했다는 점에서 신초리의 농토는 상당했으리란 걸 알 수 있다.

한강변 한적한 마을 신초리는 외세 침략 초기부터 운명이 노정되고 있었다. 을사늑약 한 해 전 1904년 여름, 한국 외부대신서리 자격이던 협판 윤치호는 하야시 곤스케 주한일본공사에게 일본군의 불법 활동에 대해 항의했다. 하야시는 한반도를 식민화하는 데 이바지한 공로로 아직 살아 있을 무렵 서울 남산 북쪽 통감 관저 터에 동상까지 만들어지는 인물이다. 한국 외부는 일본군 장교와 사병이 한강변 일대에 글씨를 써넣은 말뚝, 곧 표목을 설치하는 것을 조사하고 이런 사실이 있냐고 일본 쪽에 알아본다. 한국 정부의 승인 없이 진행된 일이었기 때문이다.

신초리 사람들, 친일파 이해창 ‘고발’

당시 일본은 러일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일본군이 노들섬 일대를 침략의 교두보로 삼고 있었다는 걸 짐작할 수 있다. 한국 정부가 일본 공사관에 보낸 문서를 보면, 신초리엔 상동과 하동이 있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백사장을 낀 강변 마을 두 동네가 나란히 있었다는 뜻이다. 물이 늘 끼치는 곳인지라 사람들은 둔덕에 살았을 게 틀림없다. 그러므로 신초리 상동(윗마을)은 용산 쪽 강변, 하동(아랫마을)은 지금 노들섬이라고 보는 게 타당하다. 여름이면 물에 잠겨 길이 끊기는 마을을 상동이라고 했을 리 없는 터다. 100년 전 10월 일제는 두 마을을 연결해 다리를 놓았을 것이라고 거의 확신한다.

신초리 인물 중 역사에 제대로 된 이름 석 자를 남긴 이는 신초리 이장 김윤석이다. 1913년 초 이장과 동네 사람 86명은 연서명하여 사직동에 살고 있는 후작 ‘리해창’을 상대로 경성지방법원에 소송을 냈다. 왕족 친일파 이해창은 김옥균을 살해한 홍종우의 사위다. 이해창은 신초리 땅을 주민 동의 없이 일본인에게 몰래 팔아넘겼다. 땅을 사들였다는 그 일본인은 이후 소유권을 주장하며 신초리 사람들에게 기와집 한 칸에 20전, 초가집 한 칸에 12전을 내라 요구하고, 이에 응하지 않는 주민들을 협박·구타하고 총검으로 위협했다. 소송이 일어난 건 이 때문이었다.

고소당한 이해창은 신초리는 오래전 왕실에서 하사받은 땅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증거서류를 가지고 있지 않은 건 그동안 나라에 일어난 여러 화란 등에 있다고 둘러대며, 50여 년 전 왕실 사람과 재산을 관리하는 종친부에 이를 확인해달라고 요청한 바 있다고 했다. 이에 맞선 신초리 사람들은 이해창이 신초리뿐 아니라 욱정4정목(회현동 일대) 땅도 같은 방법으로 횡령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 분쟁으로 확실히 알 수 있는 건, 신초리엔 적어도 성인 남자 86명 이상이 살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여기에 식솔을 포함하면, 4인 가족 기준으로 산정해볼 때 신초리 인구는 300명이 훌쩍 넘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세종 때 한성부 인구는 10만3328명으로 나오는데 도성 밖 10리까지 인구는 6044명이었다. 시기를 따지지 않고 이를 고대로 적용하면 신초리 거주자는 적잖은 수다.

김윤석의 이름은 한 달 뒤 에 또 등장한다. 이장 김윤석은 한성부 고양군 한지면(조선총독부령으로 1911년 4월1일 용산면과 함께 한지면이 경성부로 편입됨)에 근무하는 면서기를 면비 횡령 등으로 고발해 징역 3월에 처하게 한다. 이는 일제 후작 이해창에게 소송을 걸었던 일과 연계됐을 수 있다. 추론컨대 김윤석은 신초리를 대표해서 땅 문제로 면사무소에 자주 들락거렸을 것이고, 이 과정에서 면서기가 이해창의 편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점을 간파하고 뒷조사를 한 끝에 고발하지 않았을까 싶다. 이는 괜한 짐작이나 억지가 아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관과 맞서 당사자를 투옥시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두 가지 기록으로 보았을 때 김윤석의 행동은 오늘날로 치면 시민자치운동이자 자신이 처한 토지문제에 천착한 경제적 저항 활동이라 할 수 있다. 그 뒤로 더는 김윤석의 이름이 문헌에 등장하지 않는다. 그리고 4년이 채 못 돼 신초리라는 마을 자체가 사라졌다. 그렇게 본다면 이해창이 땅을 팔고 이를 일본인이 집행하려 나타난 것은 단순히 민간 차원에서 벌어진 일만은 아닐 수 있다. 오늘날에도 흔히 벌어지듯 개발을 위해 땅을 매입하는 형태를 취한 뒤 강제 철거 등으로 주민을 내쫓는 초기 행태라고 할 수 있다. 개발과 그로 인한 원주민 추방의 역사는 일제 때 한국인을 상대로 시작됐다. 해방 뒤 우리 사회는 이를 고스란히 답습하고 있다.

100년째 이어지는 개발과 추방의 역사

친일파 후작과 왈패를 동원한 일본 민간자본, 총독부 권력의 합작으로 신초리는 역사에서, 지도에서, 사람들의 기억에서 증발해버렸다. 한강 인도교를 포함하는 조선 치도사업이 이미 진행 중이었다는 점에서 이 모든 과정은 계획에 따른 추방 절차였을 뿐이다. 일제는 이 동네를 없애고 일본식 이름 나카노시마(中之島)를 가져다붙였다. 신초리 사람 김윤석은 이들 식민지 권력과 자본 앞에 무력했다. 그 쓰러진 민심 위로 한강다리는 놓였다. 1917년 10월7일 오전 11시12분이다. 쌀 한 되 값이 39전으로 오른 그날, 김윤석과 신초리 사람들은 어디에 있었을까.

서해성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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