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아이가 치료받는 병원에선 항생제를 얼마나 쓸까? 이왕이면 항생제를 덜 사용하는 병원에 가고 싶다.’
항생제 부작용을 걱정하는 부모가 꽤 많을 것이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이하 심평원)은 병원별 항생제 처방률을 조사해 홈페이지에 공개한다. 그럼, 정보를 찾아보자. 홈페이지 첫 화면에 보이는 ‘병원 평가 정보’를 클릭한 뒤 ‘평가 항목’표를 자세히 보면 ‘항생제 처방률’이 나온다. 여기서 다시 ‘항생제 처방률’을 선택하고 ‘서울시 마포구 공덕동’ 주소를 입력하니, 공덕동에 위치한 병원 이름과 항생제 처방률 등급을 볼 수 있었다.
처방률 등급은 모두 5단계로 나뉘는데, 낮은 등급일수록 항생제를 덜 처방하는 곳이다. 더 손쉽게 정보를 찾을 순 없을까. ‘항생제 처방 정보를 지도에 올려 시각화하자!’ 몇몇 시민이 내놓은 아이디어에 공감한 또 다른 시민들이 하나둘 모여 머리를 맞댔다. 공공정보 개방과 시민의 참여·협업을 위해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만든 오픈 커뮤니티 ‘코드나무’(codenamu.org)는 ‘안심이’(ansim.me)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이 웹사이트에서 ‘안심병원’ 항목을 클릭하면, 병원별 항생제 처방률 정보를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정보기술(IT) 개발자 권오현(37)·김성준(32)씨 등 4명은 심평원 정보를 지도(구글 맵) 위에 표시하기 위해 문서에 기록된 항목과 수치를 따로 뽑아내 정렬하는 ‘수작업’을 마다하지 않았다. 지도에서 ‘서울시 마포구 공덕동’을 찾으면, 인근 병원들의 위치가 저마다 다른 색깔의 동그라미로 표시된다. 항생제 처방률 등급을 쉽게 알려주기 위함이다. 1등급을 받은 병원을 클릭해보면 병원명과 주소·전화번호 같은 세부 정보를 알 수 있다.
‘참여, 협업, 공유, 개방….’ 인터넷 세상에선 흔히 쓰지만, 어쩐지 현실에선 멀게만 느껴지는 단어들이다. 일상에 큰 영향을 끼치는 정치·행정 등 공공부문은 여전히 폐쇄적이기 때문이다. 정부가 지닌 공공정보를 개방하는 등 투명성을 강화하고 시민의 참여와 소통을 확산시킬 수 있도록 하자는 ‘정부 2.0’(열린 정부) 운동이 국내에서도 번지고 있다. 세금을 들여 정부가 수집하거나 행정을 위해 수집된 정보는 공공의 목적을 위한 국가 자원이므로 명백한 개인정보 및 보안상의 문제만 없다면 누구나 자유롭게 사용하고 변경할 수 있어야 한다는 철학을 기반으로 한 흐름이다. 공공정보 공유와 민간 협업을 통해 공공부문에서 더 질 높은 가치를 창출하는 것이 목적으로, 시민들의 요구로 정부가 공공정보에 대한 접근과 열람을 허용해주는 ‘공개’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간 개념이다.
공공정보 개방을 잘 활용하면 정부의 투명성과 책임이 강화될 수 있다. 미국 환경보호청(EPA)은 산업계 등에서 보고하는 독성 화학물질 배출과 폐기물 처리 관련 데이터베이스를 공공에 개방하고 있다(www.epa.gov/tri). 시민사회단체들은 이 데이터를 검색이 쉬운 포맷으로 가공하는데, 시민들은 자신의 지역에서 어떤 독성 물질이 배출되는지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오스트레일리아 시민들이 2007년 구축한 웹사이트 ‘오픈오스트레일리아’(www.openaustralia.org)에서는 정치인들의 활동을 쉽게 감시할 수 있도록 의회 의사록과 의회 구성원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자신의 지역구 대표자가 의회에서 최근 어떤 발언을 했는지 등을 알수 있다. 유럽연합(EU)은 1989년 ‘정보시장에서 공공부문과 민간부문의 시너지 효과 제고 지침’을 내놓았고, 2003년 민간 사업자가 공공정보를 상업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마련했다. 미국에서는 버락 오바마 정부가 들어선 이후 ‘열린 정부’ 정책이 확산됐다.
‘서울버스 앱’, 공공정보 주인 논쟁 촉발한국 사회에서 공공정보 활용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오른 때는 2009년이었다. 당시 고등학생이던 유주완씨는 서울시와 경기도에서 실시간으로 공개하는 버스 위치 정보를 끌어다 사용자들에게 보여주는 ‘서울버스’ 애플리케이션을 개발한다. 시민들에게는 손쉽게 버스 도착 시간을 알 수 있게 해준 무료앱이었다. 그러나 경기도는 정보를 무단으로 도용했다며 정보 제공을 차단해버렸다. 시민들의 거센 항의가 이어졌고, 김문수 경기도지사는 차단 조처 해제를 지시했다.
지식 공유·개방 확산을 위해 활동하는 비영리단체 ‘크리에이티브커먼스코리아’(CCK) 강현숙 실장은 “서울버스 앱 사건으로 공공정보가 과연 누구의 것이냐는 논쟁이 촉발됐다”고 회상했다. 2011년 CCK 자원봉사자들은 오스트레일리아 정부가 공개한 ‘정부 2.0’ 태스크포스 보고서인 ‘참여와 소통의 정부 2.0’을 번역해 공무원들에게 보내는 캠페인을 펼치기도 했다. ‘투명사회를 위한 정보공개센터’ 전진한 소장은 “2011년 서울시교육청 등과 협약을 맺어 내부 정보를 들여다봤더니, 시민들과 공유할 만한 자료가 산재돼 있더라”라며 “서울시에 있는 학원이 시교육청에 신고한 학원비 자료가 있었는데, 이런 정보는 학부모들이 아는 게 더 중요하지 않나. 이를 활용해 ‘우리 동네 학원 정보 알기’라는 앱이 만들어지기도 했다”고 말했다.
서울시 비공개가 어려운 ‘네거티브’ 방식최근에는 공공정보와 관련해 시민과 정부가 협력할 수 있는 모델을 직접 모색해보겠다는 시민들이 나타났다. 코드나무는 서울시 예산의 사용 내역을 매일 확인할 수 있게 해주는 ‘지켜보고 있다’(gilstar.com/watcher)라는 이름의 아이디어를 현실화하기도 했다. 권오현씨는 “인터넷이 지닌 공유·투명성 증대 등의 장점이 제대로 발휘될 수 있는 분야가 공공부문이라고 생각해 공공 데이터 활용에 관심을 갖게 됐다”며 “의식주 관련 데이터, 국회나 행정의 의사결정 과정에 관한 데이터가 더 많이 공개되면 좋겠다”고 말했다. 지난해엔 2004년 영국에서 출범한 비영리단체 ‘열린지식재단’(Open Knowledge Foundation·OKF) 한국 커뮤니티가 등장하기도 했다. 이 재단은 공개 데이터 공유 플랫폼 ‘코리아데이터허브’(thedatahub.kr)를 구축했다.
정부나 지방자치단체 가운데 비교적 공공정보 개방에 적극적이라는 평가를 받는 곳은 ‘열린시정 2.0’을 내세운 서울시다. 서울시는 시가 보유한 공공 데이터를 시민에게 제공하는 창구인 ‘서울 열린데이터 광장’(data.seoul.go.kr)을 개설해, 교통·환경·도시관리 등 10개 분야의 65종 990여 개 데이터를 공개하고 있다. 이 사이트에는 시민들이 서울시 데이터를 활용해 만든 애플리케이션 등을 다른 이들과 공유할 수 있는 창구가 마련돼 있다. 서울시는 최근 정보 공개 범위를 본청·사업소뿐 아니라 투자·출연기관 정보까지 단계적으로 확대하겠다고 밝혔다.
앞서 2010년 행정안전부는 ‘공공정보 제공 지침’을 고시하고 공공정보의 민간 활용을 지원하겠다는 목적으로 웹사이트 ‘국가공유자원포털’(www.data.go.kr)을 개설한 바 있다. 그러나 공급자 중심으로 개방하다보니 정작 사용자가 필요로 하는 정보는 부족하다는 평가가 많았다. 영국 정부가 웹사이트를 개편하며 시민들의 이용 패턴을 분석해 자주 이용하는 검색어를 뽑아내 이를 전면에 내세웠던 사례를 참조할 필요가 있다. 열린지식재단 한국 커뮤니티를 이끌고 있는 김학래씨는 “양질의 데이터가 공개되는 것이 중요하고, 일단 공개된 정보에 대해선 시민사회 영역에서도 서로 공유하는 문화가 확산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제대로 공공정보가 활용되려면 개방과 소통이 전제돼야 한다는 얘기다.
하지만 우리 정부 시스템은 기본적으로 ‘통제’를 효율적으로 하기 위한 구조다. 애초 공무원들이 작성하는 정보는 내부 열람용이지 공개용으로 만든 게 아니다. 이렇다보니 기관별로 각기 다른 형식으로 흩어진 정보를 가져와 데이터로 만드는 일이 힘들어진다. 또한 시민들의 요청으로 공개되는 정보는 PDF 파일이나 종이 형태가 많다. 이런 정보를 시각화하려면 정보를 하나하나 가져와 데이터로 만들어야 한다. 애초 행정 업무를 진행할 때 공유를 염두에 두는 혁신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많은 까닭이다.
정보가 제대로 공유되려면 투명한 정보 공개 원칙이 지켜져야 한다. 시민들의 ‘알 권리’가 더욱 강화될 필요가 있다. 고위 공무원이나 힘있는 부처일수록 정보 공개에 소극적인 것이 사실이다. 공무원들은 사후 책임 부담 때문에 정보 공개를 기피하기도 한다. 이런 사정 탓에 서울시는 정보 비공개 결정을 까다롭게 만드는 네거티브 방식을 도입했다. 오스트레일리아에서 나온 ‘정부 2.0’ 태스크포스 보고서에서는 공적인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민감한 정보를 공개하지 않는 안정을 추구하고 싶은 유혹을 느낄 수 있다고 지적하며 “정부 정보의 자유로운 유통을 가로막을 수 있는 모든 결정에 대해 사람들이 알 수 있도록 충분한 권한과 독립성을 부여받은 기관이 지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근혜 대통령 ‘정부 3.0’ 내걸었지만앞으로 공공정보 개방은 더욱 활성화될 것으로 보인다. 박근혜 대통령이 대선 과정에서 ‘정부 3.0’ 시대를 달성하겠다는 공약을 내걸었기 때문이다. 정보 공개 확대와 공공정보의 개방, 정부 내 협업 및 정부와 민간 협업 확대, 맞춤형 서비스 제공을 추진하겠다는 것이다. 유정복 안전행정부 장관 내정자도 2월27일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공공정보 개방과 공유를 확대해 투명한 정부를 만들겠다”고 밝혔다. ‘정부 3.0’ 개념은 아직 명확하지 않지만, 명칭만으로 보면 미국에서 만들어진 ‘정부 2.0’보다 더 진화된 시스템이어야 한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대통령직인수위원회에서 보인 폐쇄적 인사 스타일과 회의 비공개 논란 등은 소통을 중시하는 열린 정부 철학과 멀어 보인다. 전진한 소장은 “박근혜 정부가 이야기하는 맞춤형 서비스는 개인정보 침해 문제와 연관될 수 있어 신중히 접근해야 할 지점이 많다”며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시민들을 만나는 데 익숙지 않은 정부 공무원들과 시민들 사이에 있는 칸막이를 없애는 것”이라고 말했다.
박현정 기자 saram@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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