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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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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고장나면 고칠 수 없어요

등록 2012-12-28 11:58 수정 2020-05-03 04:27

매서운 추위가 기승을 부리기 시작하는 12월이면 어김없이 거리에 서는 사람들이 있다. 유난히도 추위를 많이 타는 그들. 말도 제대로 통하지 않는 이국땅에서 마음이 더 춥다는 그들은 미처 돌아보지 못했던 우리의 이웃, 바로 이주노동자다.
추위를 무릅쓰고 그들이 거리에 서는 날, 매년 12월18일은 ‘세계 이주민의 날’이다. 2000년부터 시작된 세계 이주민의 날은 1990년 12월18일 유엔총회에서 ‘모든 이주노동자와 그 가족의 권리 보호에 관한 국제협약’(이주노동자협약)이 채택된 것을 기념하는 날이다. ‘기념’이란 말에 흔히 상상할 수 있는 장면은 각국 대사들이 화려한 실내에서 케이크 커팅을 하고 인자한 웃음을 서로 건네며 박수를 치는 모습일 것이다. 실제로 이렇게 기념‘식’을 치르는 이들이 있다. 하나 이 장면에서 참으로 아이러니한 사실은 유엔의 권고에도 여전히 한국에서는 이주노동자협약 비준을 외면하고 있다는 점이다.

12월16일 경기도 수원역 앞에서 열린 ‘2012 세계 이주민의 날 페스티벌’에서 참가자들이 한국 정부의 이주노동자 협약 비준 등을 요구하는 구호를 외치고 있다. 무지개 제공

12월16일 경기도 수원역 앞에서 열린 ‘2012 세계 이주민의 날 페스티벌’에서 참가자들이 한국 정부의 이주노동자 협약 비준 등을 요구하는 구호를 외치고 있다. 무지개 제공

 

‘불안과 공포’가 일상인 사람들

뭔가 이상하다. 그렇다면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려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화려한 기념식에 초대받지 못했지만 실제 그 권리를 보호받아야 할, 하지만 보호해줄 곳이 없어 직접 거리에 나선 이주노동자들에게 말이다. 

#장면1. 2012년 부산. 불시에 들이닥친 출입국관리소 감독관. 재빨리 몸을 피해야 한다는 생각이 뇌리에 스친 인도네시아 출신 이주노동자 A씨는 급하게 몸을 숨길 곳을 찾는다. 그가 도망칠 곳이라고는 눈앞에 보이는 창문뿐이었고, A씨는 그 칠흑 같은 어둠 속에 그대로 몸을 내던졌다. 8m 높이에서 추락한 그는 결국 사망했다. 죽기 직전까지 쫓겨야 했던 미등록 이주노동자 A씨. 그의 마지막을 지킨 건 따뜻한 가족의 품이 아닌 타국의 차가운 병실이었다.

 

#장면2. 2012년 경기도 화성. 이주노동자들이 밀집해 있는 화성 팔탄면의 한 공장에서 폭발사고로 사상자 12명이 발생했다(사망 4명, 중경상 8명). 이 공장은 2010년 화재 가능성이 높은 불법 위험물 용기를 사용하다가 적발된 적이 있었음에도 벌금만 물었을 뿐 안전 대책을 세우는 것에는 소홀했다. 중국에서 온 이주노동자는 온몸이 갈기갈기 찢긴 채 타국에서 죽어갔다. 흩어져버린 살점을 찾아 생전 그의 모습을 맞춰보지만 그라는 증거를 찾을 수 있었던 것은 떨어져나간 손의 지문뿐이었다.

 

끔찍하다.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기보다는 잡히지 않기를 더 바라는 이들. 위험한 것을 알지만 말 한마디 못하고 손가락 하나, 다리 한쪽, 심지어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이들. 이주노동자들에게 ‘불안과 공포’는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이며, 얼마간의 시간 차이를 두고 신문 한 귀퉁이에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이런 끔찍한 사건·사고가 사라지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고용허가제 개악한 고용노동부

이주노동자협약은 “이주노동자와 그 가족들이 공무원이든 개인에 의해서든 단체든 기관에 의해서든, 폭력과 물리적 부상, 위협과 협박에 대해 국가에 의해 효과적으로 보호받을 권리가 있다”(제16조 2항)고 규정한다. 하지만 한국의 이주노동자 정책은 정반대다. 무차별적이고 폭력적인 단속을 하고 체포된 이들을 구금하고 재판의 기회도 주지 않고 추방한다. 또한 협약에서는 “이주노동자들이 노동조건, 급여, 휴식, 건강과 안전조치, 고용관계에 대해 차별받지 않는다”(제25조 1~3항)고 규정하지만, 한국의 고용허가제에 따르면 이주노동자들은 자신이 일할 곳을 ‘이동’하는 것을 허락받지 못한다. 사장이 해고하고 싶으면 해고할 수 있는 상황에서 최저임금에도 못 미치는 임금, 빈번한 체불, 무리한 장시간 노동, 노동조건의 위험성에 대한 제기는 ‘차마’ 입에도 못 올리는 문제가 되기 일쑤다. 이주노동자들을 죽음의 문턱에 세워놓고 값싼 노동을 쥐어짤 수 있는 고용허가제의 문제는 이미 수없이 이야기돼왔다. 하지만 그때마다 정부가 내민 것은 ‘불법’이라는 카드와 ‘추방’이라는 형벌이었다.

2012년 여름, 공격은 더욱 거세졌다. 고용노동부는 “2012. 8.1.부터 사업장을 변경하려는 외국인 근로자에게 구인사업장 명단을 제공하지 않습니다”라는 공문을 배포했다. ‘3개월 내에 구직하지 못하면 추방한다’는 조항까지 친절하게 붙여서. 이 지침에 따르면 이주노동자는 구인업체로부터 무조건 연락이 오길 기다려야 한다. 구인업체가 어느 지역에 있는지, 어떤 일을 하는지에 대한 정보는 전혀 제공되지 않은 채로 말이다. 이 때문에 사업장 변경을 단념하거나 원치 않는 근로계약을 체결하게 된다. 사업장 변경을 신청하는 이유는 대부분 임금 체불, 위험한 작업에 대한 부담, 사업주의 폭력 혹은 사업장내 인종차별에서 기인한다. 이는 허무맹랑한 요구가 아니라 일한 만큼의 대가와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보장하라는 기본 중의 기본, 상식 중의 상식이다. 하지만 조금 더 나은 업체를 선택할 수 있는 최소한의 기회마저 내줄 수 없단다. 이것이 인권 후진국 한국의 일그러진 한쪽 얼굴이다.

 

침묵하면 다음은 ‘우리’ 차례

자, 이 정도면 이주노동자들이 뿔이 날 만한 이유가 충분하지 않나. 여름이 지나 겨울이 된 지금도 구인업체의 연락을 기다려야하는 시간은 전혀 줄지 않았지만, 이주노동자들은 자신들의 권리를 당당히 외치려고 다시 거리에 섰다. 12월16일 경기도 수원역 앞, 차가워진 손가락을 호호 불다가도 “위아 레이버! 위 아 휴먼!”(We are Labor! Weare Human!·우리는 노동자다, 우리는 사람이다)을 외칠 때면 볼이 발그레해져라 손을 하늘로 높이 치켜드는 이주노동자들을 ‘2012 세계 이주민의 날 페스티벌’에서 만날 수 있었다.

“힘들고 더럽고 몸에 안 좋은 일 시키는거 알아요. 그건 참을 수 있어요. 하지만 욕하고 때리는 건 참을 수 없어요.”

“기계는 고장나면 고칠 수 있어요. 사람은 고장나면 고칠 수 없어요. 우린 당신과 똑같이 평등한 사람이에요!”

그들은 이 자리에서 서툴지만 또박또박한 말투로 스스로가 인간임을 선언했다. 너무나 당연하기에 모르고 지나쳤던 권리가 누군가에게는 절실한 바람이었음이 드러난 순간, 거리를 지나던 사람들도 발걸음을 멈추고 그 선언에 함께 귀기울였다. 21세기 인권선언이라 불리는 이주노동자협약, 수원역을 메웠던 사람들의 마음만큼 비록 한발 늦었지만 하루빨리 비준되어야 하지 않을까. 경제위기를 빌미로 누군가의 인권과 노동권을 짓밟는다면, 그다음은 ‘우리’ 차례라는 것 또한 가슴에 새겨두고서 말이다. 올겨울, 투표권이 없어 서럽지만 그래도 세계 이주노동자들의 권리를 위해 끝까지 싸우겠다는 그들, 김치 만드는 법을 배우는 것도 좋지만 마음 편히 일할 수 있고 인간답게 대접받는 것이더 좋다는 그들의 마음과 우리 모두의 마음이 색깔은 달라도 똑같이 따뜻하길 바라며, 12월16일 경기도 수원역 앞에서 열린 ‘2012 세계 이주민 인권 선진국 한국을 꿈꿔본다.

최정아/경기이주공대위 무지개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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