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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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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화씨는 울지 않는다

등록 2013-01-05 01:42 수정 2020-05-03 04:27

한국에서 결혼과 이혼, 그리고 삶.
올겨울 첫눈 예보가 있는 날, 경기도 용인의 작은 커피숍에서 그녀를 만났다. 그녀는 주문한 카푸치노가 나오자 거품이 사라 질 때까지 커피를 저었다. 중국 이름을 그대로 가져온 한국 이 름 한금화. 서른다섯의 그녀는 중국 헤이룽장성 무단장시가 고 향이며 조선족이다. 금화씨의 한국말은 서툴다는 느낌보다 어 느 지방의 사투리를 닮은 듯했다. 그 낯설지 않음이 한국으로 오게 한 걸까. 한국에 사는 고모의 소개로 한국 남자를 만나 2005년에 결혼을 했다.
법원에 갔다오자 굳게 닫힌 문

경기도 용인의 커피숍에서 만난 한금화씨는 “한국에 와서 결혼에는 실패했지만, 아이를 낳았다는 것이 정말 좋아요”라고 말했다. 그처럼 이혼의 아픔을 겪으며 사는 결혼 이주여성이 적잖다. 무지개 제공

경기도 용인의 커피숍에서 만난 한금화씨는 “한국에 와서 결혼에는 실패했지만, 아이를 낳았다는 것이 정말 좋아요”라고 말했다. 그처럼 이혼의 아픔을 겪으며 사는 결혼 이주여성이 적잖다. 무지개 제공

“결혼 생활이 길지 않았어요. 2년 조금 못 되게 살았고, 이혼 소송과 면접교섭권 때문에 1년 정도 싸웠어요. 그 힘든 시간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딸아이 진희 덕분이었죠. 한국에 남은 유 일한 이유였어요.”

한국으로 이주해 결혼하는 것도 힘들었을 텐데 이혼은 또 얼 마나 힘들었을까. 어릴 때 부모의 이혼을 보고 자란 나는 그 과 정이 얼마나 지루한 싸움인지 알고 있다. 시간이 한참 지나서도 어딘가에 흔적은 남는다. 다만 덜 아프고 희미해져서 그 기억에 담담할 수 있을 뿐이다. 그녀에게도 시간은 약이었다. 지금은 웃 으며 지난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됐단다.

“남편의 우유부단한 성격과 시댁 식구들과의 갈등으로 이혼 까지 간 것 같아요. 가족들은 제가 자신들에게 고분고분하고 순종하기를 바랐는데 그렇지 않았거든요. 할 말을 하고 사는 저의 성격을 못마땅해했어요.”

한국에 돈 보고 시집오지 않았느냐 하는 분위기와 어디 도망이라도 갈까 감시하는 눈이 늘 싫었다. 쿨한 금화씨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살림 잘하고 아이 잘 키우는 아내, 엄마로 한국에서 살고 싶었다.

“가정법원에 이혼서류를 접수하고 돌아왔는데 현관문이 열리지 않았어요. 그사이 현관 키를 바꾼 거예요. 마침 중국에서 친정 엄마가 와 계셨는데 엄마 볼 낯이 없었어요.”

제2의 삶을 시작한 한국 땅에서 금화씨의 희망은 바람처럼 사라졌다. 그길로 막 걸음마를 시작한 진희와 이별을 해야 했고, 옷가지 하나 챙기지 못한 채 쫓겨났다. 한국은 더 이상 익숙한 나라가 아니었다.

굳게 잠긴 문 앞에서 느꼈던 비통함과 절망의 무게가 너무 큰 듯했다. 아이가 한창 예쁠 때 그 사랑스러운 시간을 함께하지 못하고 눈물로 지냈을 금화씨의 시간이 억울하게 다가온다.

“아이를 낳았다는 것이 정말 좋아요”

남편 쪽에서 제시한 협의이혼에 응할 경우 중국으로 추방돼 진희 만나기가 더욱 어렵다는 것을 직감했다. 한국인과 결혼하는 외국인은 혼인신고를 하고 2년이 지나야 한국국적을 취득하는데 그 전까지는 ‘국민의 배우자 비자(F2)’를 갖고 외국인으로 살아야 한다. 또 체류 2년 미만에 이혼을 하면 한국에 살고 싶은 의지가 없는 것으로 간주해 고국으로 보내지는 것이 지금 법이라 한다. 당시 금화씨는 2년이 되지 않아 한국국적을 취득하기 전이었다.

가족들은 강제추방과 국적 미취득, 진희 때문에라도 금화씨가 무릎 꿇고 들어오기를 바란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싸웠고, 남편의 과실로 인한 이혼으로 마침표를 찍었다. 금화씨는 이혼소송을 하며 어렵게 배우자 비자를 연장받았고, 이혼 뒤 국적을 얻었다. 하지만 금화씨의 상황과 경제력 등을 고려해 양육권은 남편에게 넘겨졌다. 이혼 뒤 남편 쪽에서 진희를 보여주지 않아 애가 타기도 했다. 그래서 면접교섭권을 얻으려면 한 번 더 싸워야 했다. 결과는 당연히 금화씨의 ‘승’이었다.

전남편은 이혼 뒤 베트남 이주여성과 재혼해 아이까지 낳았다. 사실, 나는 전남편이 금화씨보다 나이도 어리고 언어도 제대로 통하지 않는 베트남 여성과 재혼을 했다는 것에 조금 놀랐다. 아빠가 새로 꾸린 가정이 7살 진희에게 버겁지는 않을까. 금화씨 말처럼 눈칫밥 먹으며 자라는 건 아닌지 걱정스럽다. 그녀가 진희를 데려와 함께 살 날을 포기하지 않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맨몸으로 쫓겨난 금화씨는 경기도 수원이주민센터의 도움을 받아 비슷한 처지의 이주여성들이 있는 시설에서 한 달 정도 생활했다. 한국에 들어와 알게 된 중국 언니가 아무 조건 없이 돈을 빌려주었고, 그 돈으로 소송을 시작했다. 그리고 먹고살 일이 까마득해 당장 일을 해야 했다. 한국은 돈이 있어야 살 수 있는 나라였다.

그렇게 다닌 전화기 회사에서 지금은 5년차 정규직 사원이 되었다. 그날도 밤샘 근무를 마치고 돌아와 피곤할 법한데 금화씨 얼굴엔 미소가 돌았다. 인터뷰를 하는 내내 그녀가 삶에 대해 아주 긍정적이고 밝은 사람이란 게 느껴졌다. 정 많고 사람 좋아하는 그녀였다.

“한국에 와서 결혼에는 실패했지만 아이를 낳았다는 것이 정말 좋아요. 진희를 한 달에 두 번 정도 만나지만 그것도 괜찮아요. 한해 한해가 조금씩 나아지고 있어요. 저도 언젠가는 더 큰 새로운 출발을 해야지요.”

친권과 양육권을 포기한 상태라 한 달 두 번이라는 한정된 시간에 아이를 만나는데도 그것으로 만족한다는 말에 가슴이 시렸다. 매일같이 물고 빨고 안아줘도 자식은 늘 그리움의 대상인데 ‘두 번’이라는 숫자에 묶여 있다는 게 말은 안 해도 힘든 일이라 짐작된다.

진희와 만나는 날이면 여느 엄마처럼 맛있는 음식을 해주고, 쇼핑을 하고, 영화를 보며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금화씨가 내민 휴대전화 속에는 진희가 밝게 웃고 있었다. 힘든 시간을 버틸 수 있게 한 가장 큰 힘이었구나! 어렵고 쪼들리는 주머니 사정에도 진희의 태아보험을 거르지 않고 유지했던 금화씨의 노력이 참 고마웠다.

이제, 행복할 일만 남았다

두 살배기 아들을 키우는 나는 종종 육아에 대한 어려움을 친구들에게 하소연하곤 했다. 아이가 유별나 나를 괴롭혀서가 아니라, 육아에 갇혀 자유롭게 무언가를 할 수 없는 내 처지가 답답한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세상에 없던 아이를 낳아 키우는 건 당연히 어려운 일인데 나도 모르게 불쑥 한숨이 나왔다. 내가 얼마나 사치스러운 짜증을 달고 살았는지 금화씨를 만난 뒤 느끼게 돼 같은 엄마로서 부끄러웠다. 매일 눈을 마주치고 웃고 만질 수 있는 아들이 항상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이었다.

진희를 위해 해야 할 일이 아직 많다는 금화씨에게 삶에 대한 열정은 누구보다 강했다. 금화씨가 이혼의 상처로 얼룩졌던 한국에서 더 크고 새로운 꿈을 향해 저만치 달려가고 있는 것이 보였다. 이제, 행복할 일만 남았다.

수원으로 돌아오는 길, 눈이 내렸다. 그 눈을 바라보며 언젠가 그녀를 다시 만나면 카푸치노 한잔을 꼭 사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이야기하느라 식은 커피를 마신 그녀가 마음에 걸렸다. 근사한 커피숍에서 카푸치노 거품과 향을 제대로 느끼며 오늘보다 더 길고 명랑한 수다를 떨고 싶어졌다.

길은실 주부·다산인권센터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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