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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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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라! 총 안 드는 평화여

‘초점 국가’ 한국에 온 세계의 병역거부자들…
남녀‘평등’군복무 에리트레아, 50%는 군대 안 가는 이스라엘…
등록 2009-05-21 17:25 수정 2020-05-03 04:25

우리가 몰랐던 세계에 대한 상식 하나. 여성도 징병의 의무를 지는 ‘평등한’ 나라는 이스라엘이 유일하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정답은 아니다. 아프리카 에리트레아에서도 여성은 남성과 ‘똑같이’ 1년6개월 군대에 가야 한다. 그런 에리트레아와 이스라엘의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 운동가가 한국을 찾았다. 5월15일 세계병역거부자의 날을 맞아 한국의 병역거부연대회의가 주관하는 ‘2009 세계병역거부자의 날’ 행사에 함께하기 위해서다. 5월10~16일 비폭력 트레이닝, 직접행동 집회, 국제회의, 문화 콘서트 등으로 열린 이 행사엔 한국뿐 아니라 스페인, 핀란드, 독일, 마케도니아 등 9개국 평화운동가들이 참가했다.

병역거부자의 날을 맞아 한국을 찾은 평화운동가들. 이반 브로이다, 아브라함 게브레예수스, 시모 헬스텐, 알렉스 파루신(왼쪽부터)

병역거부자의 날을 맞아 한국을 찾은 평화운동가들. 이반 브로이다, 아브라함 게브레예수스, 시모 헬스텐, 알렉스 파루신(왼쪽부터)

원리주의자와 평화주의자가 통하네?

세계병역거부자의 날 캠페인은 1980년대 시작됐다. 이날 전세계 병역거부 운동가들은 한곳에 모여 국제회의를 열고, 각국에서 동시다발로 병역거부자의 현실을 알리는 집회나 캠페인을 벌인다. 병역거부자의 날을 주관하는 전쟁저항자인터내셔널(War Resisters’ International)은 해마다 문제가 심각한 나라 혹은 주제를 선택해 집중 캠페인을 벌이는데, 올해의 초점 국가로 한국이 선정됐다. 2007년 노무현 정부가 약속한 병역거부자에 대한 대체복무제 도입을 이명박 정부가 사실상 백지화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열린 행사에 참여한 병역거부 운동가들은 저마다 다른 현실을 전했다. 먼저 우리 교과서가 여성도 ‘자랑스런’ 조국을 지키기 위해 ‘당당하게’ 군대에 가는 나라로 알려준 이스라엘의 병역거부자를 만났다. 더구나 그는 ‘여성’ 병역거부자다. 알렉스 파루신은 병역거부자이면서 반군사주의 단체 ‘뉴프로필’(New Profile) 활동가다. 에스토니아에서 태어나 12살에 이스라엘로 이주한 알렉스도 한때는 ‘군대에 가고 싶다’고 생각했다. 알렉스는 “이스라엘에서 입대는 상식”이라며 “16살에 입대에 관한 첫 편지를 받고선 기뻤다”고 말했다. 그러나 17살에 일주일 동안 경험한 병영 체험은 그의 양심을 찔렀다. 처음 총을 잡고 사격을 했는데 총알이 자신의 가슴을 관통하는 아픔을 느꼈다. 18살이 돼 영장이 나왔다. 그는 대체복무를 결심하고 심사를 신청했다. 퇴역군인들로 구성된 병역거부 심사위원회는 심란한 질문을 퍼부었다. 그는 “생명을 해치지 못하는 평화주의 신념을 말하니 ‘많은 사람이 도로에서 죽는데 도로는 어떻게 이용하냐?’는 질문이 돌아왔다”고 전했다. 2심까지 가면서 겨우 대체복무 판정을 얻었다. 그리고 빈곤층 아이들을 위한 시설에서 2년을 일했다. 이렇게 이스라엘에선 병역거부가 형식상 허용되지만 실제론 허상에 가깝다. 대부분 남성의 병역거부는 허용되지 않는다. 반면에 여성 거부자는 군감옥에 자리가 없다고 돌려보내기도 한다.

애국주의가 팽배하고 군사주의가 만연한 이스라엘의 이미지는 절반만의 진실이다. 18살이 돼서 군대에 가는 이스라엘 국민은 절반에 지나지 않는다. 일단 인구의 20%를 차지하는 팔레스타인계 이스라엘인이 군대에 가지 않는다. 베두인 같은 아랍계 국민도 대부분 예외다. 극보수 유대교 신자들, 특히 여성은 군대에 가지 않는다(이들을 위한 대체복무가 있다). 여기에 군입대 부적합자로 불리는 ‘프로필 투’(Profile 2)도 있다. 장애가 있거나 결혼한 여성이 여기에 속한다. 이렇게 ‘구멍’이 많으니 구멍을 이용해 군대를 빠지는 이들도 적잖다. 알렉스는 “‘회색 거부자’로 불리는 이들에 대한 통계는 잡히지 않는다”고 전했다. 팔레스타인 침공 반대 등 정치적 이유를 밝히며 병역을 거부하는 이들도 한 해에 10여 명에 이른다. 이들은 징집될 시기가 되면 함께 거부를 시도하는데 이스라엘 군부가 방해한다. 이들에게 사전에 부적합 판정을 내리거나 함께 모이지 못하도록 한다. 알렉스는 “모든 이들이 군대에 가야 한다는 신화에 도전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여성의 입대를 둘러싼 의견도 엇갈린다. 자유주의 여성주의자는 여성의 입대를 성평등의 일부로 보고, 군대 안의 양성평등 실현에 주목한다. 남녀가 똑같이 입대를 하지만 똑같이 진급하진 않는 현실이다. 전투 분야에서 여성들은 배제되기 십상이고 고위직은 남성으로 채워진다. 이런 유리 천장을 거부하는 여성들의 소송도 있었다. 알렉스는 “여성이 파일럿이 되지 못하는 조항에 대한 승소는 유명하다”고 전했다. 그러나 불평등은 사라지지 않았다. 체력이 약하다는 등의 빌미로 법으론 허용하되 실제론 불허하는 것이다. 반면에 급진적 여성운동은 인권과 평화에 반하는 군대 자체에 반대한다. 여기에 극보수 유대교 신자들도 입대를 거부하고 대체복무를 하니, 급진적 평화주의자와 유대교 원리주의자의 행동이 외형상 비슷해 보이는 복잡한 형국인 것이다. 더구나 최근엔 팔레스타인계 국민도 군대에 가야 한다는 논란이 일었다. 같은 의무를 져야 같은 국민의 권리가 있다는 논리다. 알렉스는 이 문제를 둘러싼 이스라엘 정부의 딜레마도 있다고 전했다. “병역거부자가 비정부기구(NGO)에서 일하는 대체복무도 이제는 허용하는데, 팔레스타인계가 군복무를 하게 되면 병역거부를 하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나온다. 그러면 이스라엘 정부는 이들이 팔레스타인을 위한 비정부기구에서 일하는 것도 허용해야 한다.” 이렇게 이스라엘에서 병역거부는 다양한 맥락을 지닌다.

경기 고양시 일산 한강감리교회에서 비폭력 트레이닝의 과정으로 직접행동을 준비하는 세계의 병역거부·평화운동가들.

경기 고양시 일산 한강감리교회에서 비폭력 트레이닝의 과정으로 직접행동을 준비하는 세계의 병역거부·평화운동가들.

군사기지의 컨테이너에 15년째 갇힌 3명

이번엔 문제의 에리트레아. 아브라함 게브레예수스는 오른쪽 팔이 없고, 왼쪽 눈의 시력도 잃었다. 일그러진 그의 눈은 그날의 사고를 증언한다. 아브라함은 1981년, 11살에 지뢰를 밟았다. 그의 고향 마을은 에티오피아와 에리트레아의 전쟁터였다. 다행히 전투가 끝나서 염소를 치러 갔다가 매설된 지뢰에 사고를 당했다. 1993년 에티오피아에서 독립한 에리트레아는 오랜 독립전쟁을 치렀다. 1961년부터 91년까지 전투에서 6만5천 명의 에리트레아인이 목숨을 잃었다. 치열한 전쟁에 여성도 참여한 역사는 여성 징집의 배경이 되었다. 더구나 군인 출신이 에리트레아의 권력을 장악하고 있다. 이사이아스 아페웨르키는 1975~92년 반군 지도자로, 93년부터 현재까지 대통령으로 권좌에 앉아 있다. 아브라함은 “그는 사실상 왕”이라며 “리비아의 카다피, 소말리아의 셰이크 샤리프 대통령과 친구로 서로 도우며 권력을 유지한다”고 전했다. 1994년 징집을 시작한 에리트레아 정부는 18~40살 남녀에게 18개월의 군복무를 부과했다. 지금도 에리트레아는 470만여 명의 국민 중에 30만 명이 군인인 아프리카의 군사대국으로 남아 있다.

파울로스 이야수, 아이작 모고스, 네게데 테클마리암. 에리트레아 군사기지의 컨테이너에 15년째 갇혀 있는 이들의 이름이다. 여호와의 증인 신자인 이들은 1994년 9월24일 병역을 거부해 지금까지 온도 40도에 이르는 컨테이너에 갇혀 있다. 아브라함은 “이들은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으며 처참하게 갇혀 있다”고 전했다. 에리트레아의 병역거부자는 1998~2000년에 일어난 에티오피아와의 전쟁을 거치며 가파르게 늘었다. 두 나라를 합쳐 7만 명의 군인이 숨진 끔찍한 전쟁이었다. 에리트레아 사람들은 징집을 피해 이웃인 수단, 에티오피아 등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아브라함은 “1년6개월의 복무 기간이 끝나도 정부는 에티오피아의 위협을 빌미로 수시로 사람들을 군대로 끌고 간다”고 전했다. 심지어 가족도 위협을 당한다. 누군가 병역을 피해 해외로 가면 가족들 가운데 누군가 군복무를 대신하도록 강요당한다. 아니면 3천달러의 벌금을 내야 한다. 이렇게 가혹한 병역을 피해 도망치다 잡혀 감옥에 갇힌 이들이 적잖다.

지뢰반대운동을 벌이던 아브라함은 2000년 유럽으로 건너왔고, 2004년 독일에서 친구들과 함께 ‘에리트레아 반군사주의운동’(Eritrea Antimilitary Initiative)을 결성했다. 지금은 난민으로 독일에 사는 아브라함은 “장애 때문에 징집을 당하진 않았지만 에리트레아의 병역거부자를 지원하는 운동을 하기 때문에 스스로를 병역거부자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수천 명의 양심수가 감옥에 갇혀 있는 에리트레아엔 민주주의가 없다”고 호소했다.

아프리카의 에리트레아가 병역거부자의 무간지옥이라면, 유럽의 핀란드도 천국은 아니다. 핀란드의 군복무 기간은 6개월, 그러나 대체복무는 12개월이다. 유엔인권이사회 등은 대체복무 기간이 군복무 기간의 1.5배가 넘으면 징벌적 성격이 있다고 보고 개선을 권고한다. 실제 북유럽과 서유럽 나라에서 대체복무 기간은 현역복무 기간과 비슷하다. 핀란드의 병역거부자 시모 헬스텐은 “예전의 소련에 맞서 독립을 지킨 전쟁의 역사로 핀란드의 군사주의는 강고하다”고 전했다. 아직도 핀란드에선 대체복무도 거부한 40여 명의 완전 거부자들이 감옥에 갇혀 있다. 최근 핀란드에선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가입 여부가 뜨거운 이슈였다. 시모는 “군인들은 NATO 가입을 위해선 전문적인 군사인력이 필요하다는 논리로 모병제 전환을 주장하는 반면 징병제를 유지하자는 국민의 의견도 팽팽히 맞선다”며 “결국 NATO 논란은 징병제 유지에 모병제 강화란 이중의 비용을 치르는 결과를 낳았다”고 전했다. 이렇게 북유럽의 핀란드에서도 군사주의는 사라지지 않는 유령이다.

모병제, “가난한 자들의 군대”

모병제로 전환해도 딜레마는 남는다. 미국령 푸에르토리코 출신의 ‘전쟁저항자연합’(War Resisters League) 활동가 이반 브로이다는 “미국의 모병제는 자발적 군대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반은 “미군은 가난한 자들의 군대”라며 “가난한 국민은 생계를 해결하기 위해, 이민자들은 시민권을 얻기 위해 군대에 간다”고 지적했다. 특히 부시 행정부에서 통과된 ‘아동 낙오 방지법’(No Child Left Behind Act)에 따라 연방정부의 지원금을 받는 대학교와 고등학교는 재학생의 이름, 주소, 전화번호 등을 미군에 제공한다. 이반은 “미군은 학교 안에서 부스를 차리고 모병 활동을 한다”며 “특히 가난한 지역의 학교를 집중 공략한다”고 전했다. 그리고 역사를 봐도 가난한 푸에르토리코인들은 미국의 전쟁에 참여한 대가로 시민권을 얻었다. 이반은 “미국이 2차 세계대전 당시에 푸에르토리코인을 징집하면서 미국 시민권을 주었다”고 전했다. 베트남전에서 숨진 푸에르토리코인은 4만여 명. 이렇게 푸에르토리코인들은 미국의 전쟁에 동원됐다. 미국의 경우에서 보듯이 모병제 전환은 군사주의 문제 해결의 끝이 아니다. 그래도 자신의 땅에서 군사주의에 저항하는 이들은 끝없이 평화를 꿈꾼다.

글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사진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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