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천호동에서 부동산 컨설팅 사업을 하는 왕경철(48·가명)씨는 아침에 눈뜨자마자 물 한 잔과 심장약을 먹는다. 5개월 전인 4월4일 금요일, 경기 용인의 한 골프장에서 골프를 치다가 갑자기 심장이 둥둥둥둥 두 배로 뛰었다. 심장 뛰는 소리가 귀로 들리는 듯했다. 머리가 어찔하면서 다리가 휘청했다. 들고 있던 골프채가 손에서 겉돌았다. 2년 전 고혈압으로 돌아가신 아버지가 생각났다. 곧장 근처 병원으로 갔다. 심전도를 쟀는데, 거짓말처럼 병원 도착 5분 뒤 심장이 평상시처럼 뛰기 시작했다. 병원에서는 “괜찮다”고 했다.
약은 필요하지만 의존해선 안돼다음날 저녁 동네 탁구장에서 탁구를 치는데 또 심장이 두 배로 뛰었다. 전날과 같은 증상이었다. 50대로 접어들 무렵인데 이제 몸이 내 몸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왕씨는 서울의 큰 종합병원에서 심장 관련 검사를 받았다. 담당의는 “협심증의 초기 단계일 수 있지만, 아직 큰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했다. “심장빈혈”이라고도 했다. 빈혈처럼 머리 대신 심장에 정상적으로 피가 흐르지 않고 중간에 피가 멈춰서 갑자기 심장이 빨리 뛰고 어찔한 것이라고 했다. 왕씨는 이때 처방받은 약 베렐란을 아침마다 먹는다. 베렐란은 심장이 갑자기 빨리 뛰는 것을 막는다. 심장 작업량을 줄여서 심장에서 나가는 피의 양이나 심장근육의 산소 소모량을 줄이는 약효를 갖고 있다.
아침에 약을 먹은 뒤 왕씨는 아이들과 함께 아침밥을 먹는다. 왕씨 집에는 모두 세 명의 아이가 있다. 초등학교 5학년 지현(가명), 3학년 지혜(가명), 1학년 경수(가명)다. 아침은 주로 된장국에 밥을 먹는다. 10월28일에는 둘째인 지혜가 견학을 가는 날이어서 김밥을 먹었다. 아침을 먹은 뒤 8시께 왕씨는 같은 학교에 다니는 세 아이를 차에 태워 학교까지 데려다준다. 차 안에서 아이들에게 ‘칼슘’을 하나씩 나눠준다. 낱개 포장돼 있고 딸기맛이 나는 이 칼슘제는 둘째 지혜와 셋째 경수가 좋아한다.
아이들을 데려다주면 곧장 헬스장에 가서 러닝머신을 30분 정도 뛰고 나서 집으로 온다. 집에 와서는 동네 내과에서 처방받은 혈압약을 먹는다. 지난해 10월부터니까 이제 먹은 지 1년째다. 혈압약인 줄은 알지만 혈압약 이름이 뭔지, 어떤 기전의 혈압약인지는 모른다. 모두 두 알 반을 먹는데 아스피린 한 알이 포함돼 있다는 것만 알고 있다. 오전 10시께 사무실로 나가면 커피믹스를 풀어서 커피를 한 잔 마신다.
부작용 모른 채 기침약 처방받아점심을 먹은 뒤에는 간장약 리버탄과 비타민제 두 가지를 먹는다. 비타민제 한 가지는 뉴란스플러스정이고 다른 한 가지는 경남비타민씨정이다. 뉴란스플러스정은 비타민A와 비타민D를 제외한 비타민 혼합약품이다. 초산토코페롤 60mg, 아스코르브산 618.6mg, 리보플라빈 10mg 등 모두 11가지의 성분이 섞여 있다. 경남비타민씨정은 아스코르브산 90% 과립이 1111.2mg 들어 있다. 실제 들어 있는 양으로는 1천mg이다. 합하면 비타민C의 함량만 1600mg을 넘는다.
약국에서만 사야 하는 의약품 외에도 건강보조식품으로 상어 연골분말, 해조칼슘, 식용달팽이 추출분말 등으로 만든 글루코사민을 한 알 먹는다. “골다공증 예방 효과가 있기 때문에 아내와 함께 먹는다”고 한다. 그리하여 왕씨가 하루에 먹는 약은 모두 6~16알이다. 매번 다 먹을 때도 있고 건너뛸 때도 있지만 일주일에 세 번쯤은 꼬박꼬박 챙겨먹는 편이다.
왕씨는 ‘생명의 위협’을 느낀 지난 4월부터 독하게 담배를 끊었다. 대신 일이 끝나면 같이 일하는 동료·이웃들과 삼겹살에 소주 한 잔을 곁들인다. 일주일에 세 번은 술을 먹는다. 한 번 먹을 때 소주 한 병 반 정도를 먹는다. 술을 마신 뒤에는 특별히 숙취 해소용 약을 먹는다기보다 물을 많이 마시고 아침에 아내가 끓여준 북엇국을 먹는다.
왕씨의 약 먹는 습관에서 위험한 것은 없을까. 여러 가지 약 성분이 서로 겹치거나 충돌하는 것은 없을까. 는 책을 쓴 약사 옥광대씨는 몇 가지를 지적했다. 옥씨는 제약회사에서 16년 동안 신약 개발을 하다가 지금은 약국을 운영한다. 약 개발, 판매 등 약을 다루면서 겪었던 일들을 통해 “약은 필요하지만 ‘만병통치’ ‘근본치료’에 대한 환상을 갖거나 의존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책에서 조목조목 풀어놨다.
옥씨는 “왕씨의 약 먹는 습관에서 가장 위험한 점은 자신이 먹고 있는 약의 이름을 모른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약은 다른 약 성분과 상호작용을 일으킨다. 왕씨가 먹고 있는 심장약 베렐란은 요즘 자주 처방하는 위장약 성분 중 하나인 시메티딘과 함께 먹으면 약물 농도가 높아져 몸에 약 기운이 너무 많이 퍼질 수 있다. 부작용의 확률이 높아지는 것이다.
고혈압약 중에서도 최근 많이 처방되는 ‘ACE 차단제’는 기침을 일으키는 부작용이 있다. 서울 천호동에 있는 대한약국 박경협 약사는 “자신이 먹는 약의 이름과 부작용을 모른 채, 자꾸 기침을 해서 병원이나 약국에 가서 기침약을 처방받거나 지어가는 경우가 있다”며 “자신이 먹고 있는 약의 이름을 상담할 때 말해주면 약사나 의사가 이를 의심해보고 병원에 가보라거나 진료에 참고할 수 있지만, 모를 경우는 그것 자체가 불가능해진다”고 말했다. 그는 “항상 자신이 먹고 있는 약들을 정확히 알아야 하고 그것이 고혈압약, 심장약, 당뇨병약 등 장기 복용하는 약일 경우는 더욱 그렇다”고 강조했다.
병원에 확인해본 결과, 왕씨가 먹는 혈압약은 만성 안정형 협심증 등에 쓰는 ‘카드롤’이라는 약이다. 카드롤은 베타차단제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심장은 교감신경이 흥분하면 빠르게 뛴다. 이 교감신경의 흥분을 유발하는 것이 베타수용체다. 그리고 이 베타수용체로 가는 신경전달 물질의 행로를 막는 것이 베타차단제다. 그런데 왕씨가 먹고 있는 심장약 베렐란과 베타차단제 종류의 혈압약을 함께 먹으면 오히려 저혈압을 일으킬 수 있다. 결국 베타차단제가 아닌 다른 종류의 혈압약을 선택하는 것이 약물 간 상호작용의 측면에서 더 좋다는 얘기다. 왕씨는 이미 지난해 10월부터 카드롤을 먹고 있었다. 올해 4월에 새롭게 병원에 갈 때 먹고 있는 약 이름을 정확하게 얘기했다면 약물 간 상호작용이 가장 적은 심장약을 처방받았을 것이다.
왕씨가 조심해야 할 또 한 가지는 1년째 혈압약과 함께 먹고 있는 아스피린이다. 아스피린은 혈액 응고를 억제하는 성분이 있어서 혈액이 응고돼서 혈전이 생길 확률이 높은 심혈관 질환자들에게 종종 처방한다. 그런데 아스피린은 장기 복용할 경우 위에 무리를 일으킬 수 있다. 일종의 소염진통 효과를 나타내는 아스피린은 위벽을 보호하는 역할을 하는 생리물질인 프로스타글란딘의 분비를 억제한다. 이 때문에 오래 먹으면 위장장애가 생기게 된다. 실제로 회사원 안아무개(37)씨는 심장이 벌렁거려 인터넷을 검색해 ‘심장에 좋다’는 아스피린을 3개월 정도 먹었다. 그런데 3개월에 접어들 때부터 위가 쓰리고 아팠다. 병원에 가서 내시경 검사를 한 결과 위궤양이었다. 의사는 안씨에게 “혹시 먹는 약이 있느냐”고 물었고 안씨는 “아스피린”이라고 답했다. 의사는 “아스피린은 그만 먹으라”고 말했다. 자의적으로 ‘지식검색’을 통해 약을 찾고 약을 사서 먹은 결과다. 왕씨의 경우 처방을 받아서 약을 먹기는 했지만, 현재로서는 병원 간 또는 약국 간 네트워크가 미비해 한 개인이 먹는 ‘약력’(약의 역사)이 정리돼 있지 않으므로 항상 개인이 자신이 먹는 약을 스스로 잘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왕씨가 먹는 일반의약품 중 비타민 제제에서 섭취하는 비타민C의 함량이 너무 높은 것도 눈여겨봐야 한다. 왕씨가 매일 먹는 비타민 혼합약품인 뉴트란에는 이미 아스코르브산, 즉 비타민C가 616.8mg 들어 있다. 왕씨는 뉴트란 외에도 비타민C가 1천mg 들어 있는 비타민 제품을 한 가지 더 먹는다. 약으로만 먹는 비타민C의 양이 1600mg을 넘는다. 정상적으로 생활하는 사람은 하루에 50~100mg의 비타민C를 섭취하게 된다. 박경협 약사는 “평균 500mg 정도까지 먹는 것이 적정하고 그 이상 먹으면 위장에 부담을 줄 수 있다”고 말한다. 아직 비타민C가 어떤 원리로 위에 무리를 주는지 그 역학관계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대체로 비타민C의 주성분인 아스코르브산이 위산과 물리적인 작용을 일으켜 위에 부담을 준다는 쪽이 정설이다. 옥광대 약사는 “뭐든 과하게 먹으면 탈이 나게 마련인데, 자신이 뭘 먹는지도 모르고 자신이 먹는 영양제의 성분도 모르고 그저 ‘영양제’라고 먹다 보면 ‘과유불급’의 상황이 벌어진다”고 지적했다.
10월28일 방문한 천호동 왕씨네 집. 방 곳곳, 식탁 위 등 여러 곳에서 의약품 혹은 건강기능식품, 건강보조식품을 볼 수 있었다. 아이들 방에는 한 제약회사에서 나온, 건강해 보이는 호빵맨이 예쁘게 그려진 칼슘약 통이 있었다. 아침마다 왕씨가 아이들에게 챙겨주는 ‘칼슘제’ 통이다. 아이들은 하루에 3번 정도 칼슘제 통에서 알약을 꺼내먹었다. 그 옆에는 가시오갈피 추출물과 대두발효 추출물에 혼합 비타민, 봉밀 등이 들어간 것으로 아이들의 키를 크게 한다는 ‘키커’라는 건강기능식품도 있다. 경수가 매일 꼬박꼬박 키커를 챙겨 먹는 편이다. 식탁에는 타이레놀, 비타민E 및 비타민K제인 하노백, 왕씨가 아내와 함께 먹는 글루코사민, 왕씨의 아내인 강경미(37·가명)씨가 먹는 달맞이꽃 오일 등이 한쪽 바구니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왕씨네 집 식탁 아래에는 약들이 모여 있는 약 서랍도 있다. 약 서랍 안에는 30여 종의 약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타이레놀, 지사제로 쓰는 로페베린, 아이들 해열제인 어린이부루펜 시럽, 구충제로 구비해둔 알벤다졸, 한의원에서 사온 소화제, 유효기간이 지나버린 훼스탈 플러스정 같은 소화제, 연고류 등이 종류별로 정리돼 있다. 항생제로 사용한다는, 뉴질랜드에서 들어온 벌꿀 추출물 프로폴리스 희석액 등도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약이 많아서일까. 아이들은 약에 대한 거부감이 없다. 둘째 지혜는 스스로 머리를 짚어보고 머리가 뜨거우면 곧장 부루펜 시럽이 들어 있는 냉장고 앞으로 달려가 엄마를 부른다. “엄마, 열나.”
옥광대 약사는 이렇게 약 친화적인 분위기 속에서 무분별하게 먹는 약들이 문제를 더 일으킬 수 있다고 주의를 준다. 열이 38.2도를 넘어가면 반드시 해열제를 먹어야 한다. 그렇지만 37도를 조금 넘는 정도일 때 늘상 해열제를 먹는 것은 오히려 몸의 정상적인 면역 기능을 막는다. “왕씨 집 식구들은 비교적 건강한 편입니다. 아이들도 대체로 건강합니다. 이럴 경우, 감기나 특정 균이 몸속에 들어오면 스스로 몸의 기온을 높여 이 균들을 죽이는 면역 활동이 일어나기 때문에 온몸의 열이 올라갑니다. 그런데 이때 인위적인 투약으로 몸의 기온을 낮춰버리면 오히려 균을 죽일 기회를 잃어버리게 되는 거죠. 체온을 재보고 37도 초반일 때도 해열제를 자주 먹이는 것은 몸의 균형을 해하는 일이 될 수 있습니다.”
연고류도 정확한 용도 파악해둬야서랍 한켠에 무수하게 모여 있는, 상처에 바르는 연고류의 정리도 필요하다. 무좀이나 피부가 균에 감염돼 하얗게 일어나는 증상 등에 바르는 ㅌ크림, 벌레 물린 데 바르는 ㄹ크림, ㅂ크림, 진통·소염제 ㅋ크림, ㅂ크림, ㅋ크림, ㄹ크림 등 연고통에 들어가 있는 연고만 10여 가지였다. 강경미씨는 “매년 아이들이 벌레에 물리면 약국에 가서 연고를 사서는 바르고 그때그때 연고가 새로 나오니까 새 연고를 받게 된다”고 말했다. 아이들이 넘어지거나 벌레에 물리거나 가려워하면 강씨는 연고 통에서 대충 뒤에 있는 설명서를 읽어본 뒤 발라준다.
실제로 연고 중에는 유통기한이 2006년 8월, 2007년 10월로 오래전에 지난 것도 두어 개 있었다. 약국을 운영하기도 하는 건강사회를 위한 약사회 정건영 정책실장은 “벌레 물린 것, 긁혀서 가려운 것 등 피부가 가려운 데도 여러 가지 이유가 있기 때문에 연고의 정확한 용도를 알아두는 것이 중요하다”며 “근처 약국에 연고를 다 가지고 가서 중복되는 연고 중에 더 효과가 좋은 것이나 이제는 바르면 안 될 것, 또 정확한 용도 등을 묻고 가능하면 유통기한도 겉면에 표기해두는 것이 좋다”고 조언했다.
일반의약품으로 분류되는 비타민제나 영양제를 비롯해 키 크는 약, 여성에게 좋은 약 등 식품류로 분류되는 건강기능식품을 너무 많이 먹는 것도 권장할 일만은 아니라는 게 ‘약의 상호작용’을 연구해온 사람들의 말이다. 이범진 강원대 교수(약학)는 “건강기능식품 판매가 허가제에서 신고제로 바뀐 뒤부터 건강기능식품 시장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고 그 늘어난 시장에 대한 연구는 종종 있어왔지만, 각 식품 성분들이 어떤 효능을 가지고 있는지, 또 다른 약품과는 어떤 상호작용을 하는지는 검증된 바가 전혀 없다”며 “그저 늘어나기만 하는 건강기능식품 시장을 보면 아찔할 때도 있다”고 말했다. 구혜영 가정의학과 전문의도 “건강기능식품 시장이 커져가고 있다는 시장 상황 보고는 무수하지만, 건강기능식품이 특정 약품 성분, 또는 특정 식품들과 어떤 약리작용을 일으키는지에 대한 연구는 너무 부족하다”며 “우리 병원 하루 내원환자의 40% 이상이 건강보조식품을 먹고 있는데 의사로서 어떻게 하라고 조언하기도 쉽지 않아 관련 연구의 부족을 느낀다”고 말했다.
약의 오·남용에 대한 해결책은 뭐가 있을까. 박은주 강원도여약사회장은 “약물 간 중복 처방, 약물 간 상호작용을 일으킬 수 있는 약물들을 처방하는 위험 처방 등을 막으려면 환자 개인의 ‘약력’이 한 번에 관리돼야 한다”며 “특히 노인들은 자신이 먹는 약의 성분에 대해 알거나 말하기가 더욱 힘들기 때문에 이에 관한 정책적 차원의 관리가 필수적”이라고 지적했다. 아직 많은 논의가 필요하지만, 약의 오·남용 등을 피하기 위한 정책적 아이디어로 △의사들 간 처방 공유 △마을마다 약을 종합적으로 관리해주는 종합관리 약센터 설치 △1인 1단골 약국 캠페인 추진 등이 제안되고 있다. ‘약물의존 사회’ ‘약물 공화국’을 벗어나는 게 개인에게만 맡길 일은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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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진 기자 jin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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