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약국에 들어선 마리가 걷기 불편하다고 합니다. 마리는 배가 나와서 자신의 발에 손이 닿지 않는 상태고요. 마리를 위해 당신은 무엇을 하겠습니까?”
“어떤 신발을 신었나 보고 편한 신발을 신으라고 권하겠어요. 좋은 신발가게도 알려주고요.”
“혹시 발톱이 길거나 발이 부었는지 확인해보겠어요.”
“그럼 신발과 양말을 벗으라고 해야 하는데 가능할까요?”
“환자에게 동의를 구하면 되지 않겠어요? 발 통증이 다른 병과 연관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요.”
“약을 건넨 뒤에도 집에 돌봐줄 가족이나 방문 간호사가 있는지 확인을 해야 하겠습니다.”
부슬부슬 비가 내리는 10월14일 오전, 시드니에 있는 오스트레일리아 약사회 뉴사우스웨일스지부 교육실. 20명의 약사가 둘러앉아 ‘마리의 발’을 위해 머리를 맞대고 토론하고 있다. ‘약국 당뇨 관리 프로그램’(Pharmacy Diabetes Care Program)에 참여한 약국의 약사들을 대상으로 하는 이 교육은 이틀간 진행된다. 한 약국당 한 명의 약사만 참여한다. 약사들은 교육을 통해 당뇨 관련 의료기 사용법, 환자 진료기록 작성 방법 등을 이해하고 환자별 시나리오를 두고 토론을 한다.
발 아파 온 마리, 뭐라 해줄까
“발 관리는 혈압, 체중, 치아 등과 같이 당뇨 환자가 신경써야 할 부분입니다. 마리가 당뇨 환자라는 기록이 있을 경우 주치의에게 가보도록 권고할 수 있을 정도의 상담이 약국에서 이뤄져야 합니다.” 교사인 미셸이 말했다. 역시 당뇨와 연관이 있었구나, 약사들이 고개를 끄덕인다. 교육의 막바지는 역시 테스트. 오픈북으로 진행된 시험을 보면서 약사들은 이틀간 배운 내용을 정리했다. 약사들이 모여 시나리오와 현실 사이에서 치열한 토론을 하는 동안 교실 창문 바깥으로는 계속 비가 내렸다.
교육 중간 다과 시간에 마리사 베르나르도스 약사는 “한 달 전에 교육을 신청해놓고 온라인 교육 등을 통해 미리 준비하고 공부해둘 것이 많았다”면서 “와서 약사들끼리 시나리오를 두고 진지하게 토론을 해보니 교육이 정말 실용적이라 현장에서 큰 도움이 되겠다”고 말했다. 옆에 있던 트리시 릴리 약사도 고개를 끄덕였다. 트리시 릴리는 “약국에 찾아오는 환자의 20~30%가 당뇨 환자여서 그동안 어떻게 상담해야 할까 고민이 많았는데 이런 체계적인 프로그램이 도입돼 좋다”고 덧붙였다.
당뇨 관리 프로그램은 2003년 시드니대학 약대의 연구과제로 시작했다. 90개 약국을 대상으로 당뇨 환자의 집중 건강 상담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프로그램을 진행해본 뒤 지난해 12월 전국 800여 개 약국으로 사업을 확대했다. 2005년 연구진이 펴낸 ‘약국 당뇨 관리 프로그램 최종 보고서’는 “이 프로그램은 환자와 약사 모두에게 이득이 됐다”고 평가했다. 프로그램에 동참했던 환자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병에 대한 자각을 높이고 생활습관을 관리하게 해주는 등 이상적인 환경을 조성해줬다”며 만족도가 높게 나왔고, 참여 약사들도 “당뇨와 같이 흡연, 비만도, 식습관 등을 조절해줘야 하는 병에서 약사가 이상적인 위치에 있게 했다”고 평가했다.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약사가 되려면 우선 4년제 약대를 졸업한 뒤 1년간 일반 병원이나 약국에서 인턴십을 거쳐야 한다. 석사 2년 코스로 약사 자격을 딴 경우에도 인턴십은 필수다. 스티븐 드루 오스트레일리아 약사회 뉴사우스웨일스지부장은 “12개월의 인턴십을 거치면서 임상 실습도 하고 환자 대처법이나 환자 관리 시스템을 익히게 된다”고 말했다.
오스트레일리아에선 주치의 개념인 GP(General Practitioner)가 의료 행위의 중심이 되면서도, 간호사가 면역 주사를 놓거나 간단한 처방전을 내줄 수 있고, 약사의 건강 상담자로서의 역할도 인정된다. 이 때문에 ‘당뇨 관리 프로그램’을 포함한 건강 관리 사업에서 의사, 약사, 간호사, 영양사 등 건강 관리자들을 하나의 팀으로 묶어서 생각한다. 스티븐 드루 지부장은 “약사는 건강 관리 시스템의 가장 마지막 단계에서 환자와 접촉하는 사람으로서 의사(GP)와도 소통하며 환자의 변화를 감지해야 한다”고 말했다.
약사 3~5명 상주, 전문 분야 달라
“하이, 존!”
머리가 새하얀 노부부가 약국을 들어서면서 약사에게 반갑게 인사를 건넨다. “하이, 스미스!” 약사도 벙긋 웃는다. 존 벨 약사는 시드니 시내 퀸스트리트의 버스정류장 바로 앞에서 40년째 약국을 운영 중이다. 그의 약국 이름은 ‘존 벨 약사의 조언’(John Bell Pharmacist Advice)이다. 완만한 경사에 널찍한 약국 입구로는 휠체어가 자유롭게 드나든다. 입구 바로 옆에는 ‘당신의 의약품에 대해 더 알고 싶은 게 있나요?’란 질문판이 붙어 있다.
입구를 지나 안으로 들어서면 왼쪽으로는 면도기, 오른쪽으로는 헤어핀도 걸려 있다. 편의점식 약국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뭐가 다를까 보니, 우선 약사와 환자가 편히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약 판매대 대신 동그란 책상이 여기저기 있다. ‘약사의 조언’이란 간판과 어울리는 풍경이다. 존 벨은 “15년 전 간판을 ‘약사의 조언’으로 바꿨다”며 “‘약사의 조언’은 환자 상담을 중시하는 약사들의 모임”이라고 소개했다. 시드니에만 ‘약사의 조언’에 가입해 간판을 바꾼 약국이 30여 개다. 존 벨은 “환자와 세세한 건강상담을 하려면 아예 독립적인 상담실이 있어야 한다. 지금은 일단 서로 떨어진 탁자에서 상담을 하지만 앞으로 상담실을 구비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상담을 위해서는 약국 규모에 비해 더 많은 약사가 필요하다. 60㎡ 남짓한 존 벨의 약국에도 3~5명의 약사가 상주한다. 경영자로서 손해보는 선택이 아니냐고 묻자 “약사가 직접 상담을 하는 것이 중요하니 보조 약사를 한 명 더 두느니 약사를 고용한다는 생각이다. 중요한 건 환자들의 이익이다”라는 답이 돌아왔다.
약사들의 전문 분야도 따로 있다. 5명의 약사가 서로 다른 교육을 받아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용하는 방식이다. 한 약사는 ‘당뇨 관리 프로그램’을 이수해 약국의 당뇨 환자 업무를 전담하게 됐고, 존 벨은 ‘셀프케어 프로그램’을 실행 중이다. ‘셀프케어 프로그램’은 환자들에게 병과 약에 관한 정보를 알맞게 전달해 스스로 돌볼 수 있게 돕는 일이다. 그는 약사회가 이 프로그램을 만드는 단계에서부터 함께했다. 이 프로그램에 참여한 다른 약사들을 돕기 위해 존 벨은 25년째 매주 약사회에 A4 한 장 분량의 정보성 칼럼을 제공하고 있다. 약사들은 이 칼럼을 약사회 홈페이지에서 다운받아 자신의 환자들에게 전자우편이나 편지로 보내줄 수 있다. 어떤 방식으로도 활용이 가능한 콘텐츠를 25년째 제공하고 있는 셈이다.
이 약국의 약사 마이클 뉴언은 ‘환자 약력 정보 구축’(Patient Medication Profile)을 담당하고 있다. 약력 정보가 입력된 환자가 약국을 방문하면 이름을 넣는 순간 그가 복용해온 약, 그동안의 처방전 등이 컴퓨터 화면에 뜬다. 혹시 복용 중인 약과 충돌이 있는 처방을 들고 올 경우 자동으로 컴퓨터가 알려준다. 이렇게 약력 관리를 받는 환자가 약국에 오면 상담은 10~15분 정도 이뤄진다. 내용은 주로 처방전에 기초한 복약 지도, 약력에 따른 주의사항 공지 등이다.
상담은 무료고 이렇게 약력 관리를 하는 약국에는 정부가 일정 금액을 보조해준다. 약국은 몇 명의 환자와 상담했는지 매달 약국 조합(길드)에 자료를 보내야 한다. 뉴언은 “이제 시작한 지 몇 달밖에 안 돼 우리 약국에 약력 정보를 쌓아나가는 환자는 10여 명 정도다. 짧게 생각하면 힘든 작업일 수도 있으나 프로그램에 익숙해지고 환자 데이터를 쌓아나가다 보면 장기적으로는 단골 고객을 확보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시드니에서 만난 약사들은 ‘환자와의 소통’을 핵심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들은 질병을 관리하는 데 있어 주치의·간호사와 팀플레이를 추구했다. 자신이 아는 의사에게 진료받은 뒤 “하이, 존!”이라고 인사하며 들어설 수 있는 약국이 있는 환자들. 존 벨의 작은 약국 안에는 ‘약국과 환자의 행복한 관계’를 꿈꾸는 프로그램들이 활기차게 돌아가며 미래를 준비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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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드니(오스트레일리아)=글·사진 임지선 기자 sun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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