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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수결’ 말고… 모두를 초대하는 정치

공적 영역서 배제된 이들, 평등의 시공간 열어… 다수자들 정의감이 지속성 관건
등록 2025-03-13 22:14 수정 2025-03-18 16:38
성소수자차별반대 무지개행동, 윤석열 퇴진 성소수자 공동행동이 연 ‘윤석열 파면 촉구 릴레이 기자회견'이 2025년 2월14일 오전 서올 종로구 헌법재판소 앞에서 진행돼 최장원 HIV/AIDS(후천성면역결핍증후군)인권행동 알 활동가가 발언하고 있다. 한겨레 김태형 기자 

성소수자차별반대 무지개행동, 윤석열 퇴진 성소수자 공동행동이 연 ‘윤석열 파면 촉구 릴레이 기자회견'이 2025년 2월14일 오전 서올 종로구 헌법재판소 앞에서 진행돼 최장원 HIV/AIDS(후천성면역결핍증후군)인권행동 알 활동가가 발언하고 있다. 한겨레 김태형 기자 


윤석열 탄핵은 내란사태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출발점이어야 한다. 더 나은 한국 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성찰과 방향, 밑그림, 과제 등에 대해 진보적 필자들의 연속 기고를 싣는다._편집자

 

2019년 말, 국회에서 열린 ‘차별금지법 제정 추진’과 관련된 토론회에서 다수결로 소수자의 인권에 대한 사안을 결정하는 일이 정당한지를 두고 발표한 적이 있다. 발표가 끝나자 한 청년이 다가와 내 손을 부여잡고 눈물을 펑펑 쏟으며 호소했다. 이 법을 제정할 길이 없냐고, 왜 자신은 끊임없이 부정당하는 삶을 살아야 하느냐고, 자신에게는 죽고 사는 문제라고, 제발 살려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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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적으로, 민주정체에서 소수자의 인권을 다수결로 결정하는 일은 말이 되지 않는다. 소수자라는 말 자체가 다수결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뜻이다. 원칙적으로 보면, 인간으로서 차별받지 않을 권리는 다수의 의지가 아니라 한 국가가 가진 ‘헌법에 보장된 기본권’의 문제다. 우리 헌법은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제10조)고 명백히 밝히고 있다.

 

‘다수의 지배’는 민주주의 아니다

그럼에도 수많은 이가 기본권의 문제를 다수결로 결정하는 게 ‘민주적’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런 다수결에 대한 믿음은 선입관이다. 정치사상가 한나 아렌트는 ‘다수결’이란 ‘참주정’을 제외한 거의 모든 정체에서 쓰이거나 쓰일 수 있는, ‘의사결정 과정에 내재해 있는 기술적인 장치’에 불과하다고 강조한다. 예를 들어 왕정에서도 신하들 다수의 의견을 들어 결정을 내릴 수 있다는 점에서 다수결은 민주주의의 고유한 의사결정 방식이 아니다.

특히 아렌트는 민주주의가 ‘다수의 지배’라는 주장에도 동의하지 않는다. ‘다수의 지배’란 간단히 말해 ‘소수자를 제거해버리는 것’으로, 다수결의 타락이 만들어낸 결과에 불과하다. 어느 정체에나 결정 과정에서 쓰일 수 있는 기술적 장치를 타자를 지배하는 고유한 정당화 근거로 쓰는 오류를 범하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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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적으로 소수자들이 사회의 다수에게 호소하는 처지에 놓이게 되는 이유는, 헌법에 보장된 기본권을 구체적으로 실현하는 법률을 제정하는 단계에서 국회 내 ‘다수의 지지’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더 절망하게 되는 건 사회의 다수가 소수자의 권리를 지지하더라도 이런 구도가 의회 내 다수로 즉시 반영되지 않는다는 데 있다.

대체로 국회의원 대다수는 재선에 자신의 모든 걸 건다. 경쟁이 치열한 지역구의 의원일수록 경쟁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는 사안을 피하려 한다. 특히 종교단체처럼 표를 집단으로 동원할 수 있는 경우와 관련된 일이라면 더욱 그러하다. 차별금지법이 바로 이런 종교단체의 반대에 직면해 있다. 게다가 의원 자신의 종교적 신념 또한 영향을 미친다. 차별금지법이 18년째 국회 언저리를 맴도는 이유다.

이처럼 차별을 금지하는 제도가 종교적 이유로, 경제적 이유로, 문화적 이유로 거부되는 사회에선, 우리 옆의 누군가는 정치적이고 사회문화적인 차별 앞에 모욕과 굴욕을 매일매일 경험한다. 이뿐만 아니라 법 앞에 평등하지 않은 인간으로서 국가의 적절한 제도적 보호 밖으로 배제되어 ‘추방된 자’로서 체제의 외연에 포함되어 살게 된다. 조르조 아감벤은 이런 이들을 ‘호모 사케르’ ‘벌거벗은 삶’을 사는 존재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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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론장으로의 차별 없는 입장

12·3 내란사태가 터지고 난 이후 ‘광장의 정치’가 펼쳐지고 있다. 지난 석 달 동안 이어진 ‘광장의 정치’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전통적으로 사회적 약자로 여겨져온 (특히 청년) 여성, 성소수자, 청소년, 장애인, 농민과 같은 사회적 소수자들이 ‘광장의 전면’에 등장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왜 소수자들이 이 국면에서 가장 전면에 나선 것일까?

이에 대한 답은 아렌트가 강조하는 ‘민주주의의 고유성’에 있다. 아렌트에 따르면, 민주주의를 고유하게 만드는 힘은 ‘구성원들의 관계가 모두 평등하다’는 사실을 전제로 ‘모두에게 공적 영역으로 입장을 허용한다’는 데 있다. 민주주의야말로 모든 구성원이 의사결정 과정에 참여할 기회가 열려 있는 유일한 체제다. 공적 영역에서 개인들은 자신의 말과 행위를 통해 내가 누구인지를 드러낼 기회를 가질 뿐만 아니라 동료 시민들로부터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을 기회를 얻는다.

하지만 수많은 소수자가 일상의 정치에서 이런 관계의 평등성을 부정당하고, 공적 영역으로의 입장이 차단된다. 예를 들어, 차별금지법에 반대한다는 것은 누군가를 동등한 동료로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의미다. 관계의 평등성을 부정당한 이들이 일상의 공적 영역에서 목소리를 내려 한다면 수많은 난관을 거쳐야 한다. 사실상 공적 영역에 출입을 차단당한 효과를 낳는다. 실제 상당수의 소수자가 일상에서 공적 발언을 할 기회 그 자체를 박탈당하곤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12·3 내란사태로 인해 열린 비폭력적 광장의 정치는, 소수자들이 규범 있는 주권자의 일부로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드러내고 자기 처지를 호소할 수 있는 시공간을 열어놓았다. 광장 정치의 핵심이 비공식적으로 곳곳에서 폭발적으로 열리는 수많은 공론장이기 때문이다. 이 공론장에는 광장 정치에 동감하는 이라면 그 누구라도 차별 없이 입장할 수 있다. 이곳에서라면 소수자도 목소리가 있는 존재, 세상이 귀를 기울여 경청하는 존재, 공적 세계의 일부가 되는 존재로 변모할 기회를 얻을 수 있다.

현존하는 다수로 변모한 소수자들

지난 석 달을 돌아보면, 소수자들이 주도한 광장 정치에서 가장 상징적인 장면은 2024년 12월21일 정오부터 22일 오후 4시까지 28시간 동안 남태령에서 펼쳐진 일이다. 양곡법 거부 사태와 내란 시도에 분노한 농민들이 12월16일 전북 무안과 경남 진주에서 출발해 몰고 온 트랙터 30여 대가 12월21일 정오 경찰의 제지로 서울 입구 남태령에 멈춰섰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상에서 ‘남태령이 우금치’라는 호소문이 순식간에 100만 명가량에게 공유됐다. 그러자 응원봉을 든 2030 여성들이, 성소수자들이 6070 농민들을 응원하기 위해 남태령으로 모여드는 낯선 광경이 펼쳐졌다. 모여드는 이들을 지켜보며 농민들은 어리둥절했고 끝내 눈물을 터뜨렸다.

영하 10도의 추운 밤이 찾아왔지만, 참여자 대다수가 자리를 뜨지 않고 함께 새벽을 밝히고 아침을 맞았다. 밤새워 노래하고 춤추고, 원하는 이라면 누구라도 발언대에 올랐다. 발언은 새벽을 지나 다음날 오후 3시까지 계속됐다. 남태령을 취재한 한 언론인은 이들의 발언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이들의 사연은 가지각색이었지만 공통점이 있었다. 우리 사회에서 겪은 차별과 소외의 경험을 털어놓았다는 점이다.”

한겨레21의 인터뷰에 응한 이는 남태령의 경험을 이렇게 말한다. “남태령 집회에서의 시민 발언은 발언에 앞서 자신의 정체성을 설명하는 문화를 만들었습니다. 여성 농민, 농민, 여성, 소수자, 직업 등을 먼저 밝히고 본인의 이야기를 이어나갔습니다. 우리 모두 특성은 다르지만, 어떤 혐오도 없이 각자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된 것 같아 평화롭고 따뜻했습니다.” 남태령에서 확고히 만들어진 공적 영역으로의 차별 없는 초대는 광장의 정치가 펼쳐지는 석 달 내내 이어지고 있다.

2025년 2월15일 오후 서울 종로구 광화문 동십자각 일대에서 ‘윤석열 즉각 퇴진! 사회대개혁!’ 11차 범시민대행진이 열려 참가자들이 손팻말을 들고 있다. 한겨레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2025년 2월15일 오후 서울 종로구 광화문 동십자각 일대에서 ‘윤석열 즉각 퇴진! 사회대개혁!’ 11차 범시민대행진이 열려 참가자들이 손팻말을 들고 있다. 한겨레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아렌트는 권력은 누구도 혼자 소유할 수 없는 것이며, 권력은 오로지 공적 영역에서만 생겨난다고 강조한다. 공적 영역에 직접 모습을 드러내고 모여드는 사람이 많을수록 권력이 커지고, 공적 영역에 모여든 사람들이 사라지면 그 권력은 자연스럽게 소멸된다고 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권력의 진정한 속성은 공론장에서 함께 모습을 드러내고 함께 조화롭게 말하고 행동하는 데 있다고 주장한다.

이런 아렌트의 주장을 받아들인다면, 우리 사회의 소수자들은 광장의 정치 전면에 직접 모습을 드러내며 ‘현존하는 다수’로 변모했다. 이를 통해, 내란에 맞서는 평범한 사람들의 권력을 더욱 강하게 만들었다. 무엇보다 이들은 ‘행동하는 것이 즐겁다는 것’, 즉 ‘공적 행복’을 극적으로 공동체에 보여주었다.

 

그들이 다시 버려지지 않도록 할 책임

돌아보면, 이번 사태만이 아니라 2016년 촛불집회 때도 소수자들의 적극적인 정치참여가 있었다. 때때로 열리는 광장의 정치가 억압받는 소수자들에게 동등한 자격으로 공적 영역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을 아주 잠시나마 열어주고 있다. 광장 이후,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문제 중 하나가 바로 광장의 정치에서 우리가 실행한, ‘모두에게 열린 공적 영역으로의 초대’를 어떻게 일상의 정치로 옮겨놓느냐다. 간단한 예로, 2016년 촛불집회 이후에도 차별금지법은 국회의 벽을 넘지 못했다.

12·3 내란사태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소수자들은 여전히 지침 없이 광장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이들을 바라보며 걱정이 앞서는 건 왜일까? 이 사태가 마무리된 이후, 광장에서 ‘현존하는 다수의 권력’으로 변모한 소수자들은 다시 버려지고 마는 걸까? ‘광장의 정치를 주도한 이들의 의지를 우리 사회는 어떻게 제도적으로 일상에 반영할 것인가?’

이 질문을 어떻게 다루느냐는, 앞으로 일상에서 다수를 이루는 이들의 ‘도덕감’과 ‘정의감’에 대한 중요한 척도가 될 것이다.

 

김만권 경희대 학술연구교수·정치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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