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7년 2월11일 서울 광화문광장 일대에서 열린 15차 범국민행동의 날 촛불집회 참가자들이 박근혜 대통령 파면과 특검 연장 등의 구호를 외치고 있다. 한겨레 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12·3 친위쿠데타 실패 이후 우리 상황은 겉만 보면 2016~2017년 촛불항쟁의 반복이다. 그래서 많은 이가 이 경험의 연장선에서 현재를 짚고 미래를 내다본다. 헌법재판소 판결이 나온 뒤 조기 대선으로 넘어간 그때 기억에 따라 벌써부터 대선 준비에 매진하는 정치인들이 있다. 반대편에는, 그때 촛불시민들의 개혁 요구를 끈질기게 밀어붙이지 못한 게 천추의 한이니 이번에는 촛불을 쉽게 꺼선 안 된다는 목소리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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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과연 지금이 단순히 ‘촛불 시즌2’일까? 8년 전 경험의 틀에서 해석하고 행동하기만 하면 되는 걸까? 답은 부정적이다. 그것은 이미 대통령 탄핵을 촉구한 2024년 첫 주말 집회에서 드러났다. 그날 저녁, 촛불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광장을 밝힌 것은 응원봉의 물결이었다.
현 탄핵 정국은 여러 측면에서 2017년의 선례와 다른 양상을 보인다. 그런 차이 가운데는, 과거보다 더 강렬한 희망의 근거로 해독될 수 있는 측면이 있는가 하면 과거에는 없었던 어두운 미래의 조짐이라 할 측면도 있다. 현 국면에는 이렇게, 8년 전보다 더 낙관적이게 하는 요소와 비관적이게 하는 요소가 공존한다. 그래서 2017년보다 더 복잡하고 혼란스럽다.
이는 무엇보다 현 국면이 정권 퇴진 운동의 성장이 아니라 윤석열의 친위쿠데타 시도로 시작됐기 때문이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은 분명히 정권 퇴진 운동의 결과였다. 2016년 10월에 최순실이라는 비선실세의 존재가 갑자기 알려지면서 정권 퇴진 운동이 대규모 시위 형태로 급성장했고, 이 운동이 2개월 가까이 전개된 끝에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국회에서 가결됐다. 처음부터 거리의 시민들이 주도권을 쥐었고, 이런 시민들의 목소리에 호응하는 정치가 야당뿐만 아니라 여당 안에서도 활발하게 작동했다. 태극기 부대의 반작용은 한참 뒤에야 부랴부랴 시작됐다.
그러나 이번에는 이런 결과를 피하고자 윤석열이 헌정질서를 무참히 선제공격함으로써 비상상태가 시작됐다. 다행히도 친위쿠데타 자체는 실패로 끝났지만, 그런 뒤에도 내란 동조 세력은 난동의 레퍼토리를 지금껏 이어가고 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시민들이 목소리를 높여 내란을 거듭 진압하고 있다. 즉, 정권 퇴진 운동이 아니라 내란과 그 진압 운동이 전개 중이다. 이 국면에서는, 비록 소수라 하더라도 내란 세력이 끊임없이 새로운 상황을 여는 주도성을 발휘한다. 국민의힘 지지층 사이에서 ‘부정선거’론 같은 극우 음모론이 퍼져가는 것이 대표적 사례다. 그래서 미래가 더 암울해질 가능성을 부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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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여기에서 2016~2017년과 결정적으로 다른 2024~2025년의 특징이 비롯된다. 우선 희망적 측면부터 보면, 8년 전보다 더 각성된 광장의 모습을 들 수 있겠다. 다양한 목소리가 ‘박근혜 퇴진’이라는 한 가지 구호에 묻히는 경향이 강했던 촛불 광장과 달리, 응원봉 광장에서는 윤석열 ‘이후’를 바라는 여러 목소리가 그 다양성과 역동성 그대로 생동한다. 남태령 시위는 그 전형이었다. 이미 오래전부터 이 사회 안에 존재하던, 하지만 고립돼 있던 노동자나 농민의 대열이 역시 지금 여기에 존재하면서도 투명인간 처지에 있는 여성, 여러 소수자와 만났다. 이들이 서로 만나니 ‘연대’라는 가치가 전에 없던 현실성을 획득했다. 윤석열 ‘이후’를 밝힐 등불을 서로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사실 어떻게 보면 ‘서글픈’ 장면이기도 하다. 과거보다 더 무르익은 그 ‘각성’의 사연 탓이다. 촛불항쟁 이후 8년의 세월 동안 우리 사회에서는 오랫동안 누적된 불평등을 줄이거나 기후위기, 돌봄위기 같은 새로운 위험에 맞서는 개혁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유일하게 추진된 검찰개혁은 오히려 촛불연합을 결정적으로 분열시키는 결과만 낳고 말았다. 즉, 자칭 ‘촛불정부’를 통한 변화의 기대는 좌절과 실망으로 돌아왔다. 지금 응원봉 광장에서 시민들이 스스로 연대의 사슬을 이어가는 것은 어찌 보면 더는 그런 기대에 기댈 수 없다고 ‘체념’한 결과일 수 있다. 내란을 통해 정치가 아예 붕괴해버린 이런 난국에는 시민 각자가 사회를 재건하는 임무를 떠맡을 수밖에 없다는 고단한 각오의 발로일지 모른다.
한데 이번 탄핵 국면에 새로 대두한 부정적 측면까지 고려하면, 이런 서글픔쯤은 아무렇지도 않게 느껴진다. 12·3 이후 민주공화국의 기본 토대를 뒤흔드는 극우화 물결이 한국 사회를 뒤흔들고 있다. 양당 독점 정치의 한 축이었던 국민의힘이 이 물결에 편승하는 바람에 극우 세력은 삽시간에 정치 무대 한가운데로까지 난입했다. 지금 이 흐름을 하나로 응집시켜주는 요소인 ‘부정선거’론은 조기 대선 이후까지 현 위기를 지속시킬 가능성이 높은 치명적 독이다. 2017년과 달리 이번에는 극우화한 집단이 조기 대선 결과를 부정하고 나서면서 내란이 끝내 진압되지 않은 채 한없이 계속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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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2월14일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대통령 윤석열 탄핵소추안이 가결된 이후 시민들이 응원봉을 들고 환호하고 있다. 한겨레 김영원 기자 forever@hani.co.kr
그렇기에 지금 반드시 전제해야 할 대원칙은 비상상태를 장기화하지 않는 것이다. 헌정질서에 대한 도발로 시작된 이 국면이 길어질수록 극우파의 혹세무민이 극심해질 것이고, 다시 그 안에서 노골적 파시즘으로 기우는 부분이 커질 것이다. 현 헌법에 따른 정치 일정(가령 조기 대선)에 예측 불가능한 변수(가령 즉각적 개헌)를 끼워 넣는 식의 제안은 이런 형국에서는 본의와 상관없이 위험만 초래할 수 있다. 최대한 변수를 줄이고 비상상태를 단축시키며 제6공화국의 정치 과정을 복원해야 한다. ‘부정선거’론 등과 단절하도록 국민의힘을 다그치고, 조기 대선을 통해 민주공화국 수호의 기본 합의를 확인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정치의 복원은 12·3과 1·19(서울서부지방법원 점거 폭동) ‘이후’의 한국 사회에 꼭 필요한 또 다른 과제들을 위한 기본 전제일 뿐이다. 제6공화국의 일상적 정치를 복원하는 데 그쳐서는 정치 위기의 끈질긴 지속을 막을 수 없다. 되돌아온 정치가 바로 친위쿠데타의 배경이 된 그 정치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내란이라는 위급한 증상을 진정시키고 나면 차기 정부 출범과 함께 곧바로 내란의 뿌리를 뽑는 작업에 나서야 한다.
이 작업은 정치의 복원을 넘어서는 정치의 재구성이라 할 수 있다. 그 기본 방향으로는 적어도 다음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는 시민들 자신의 참여로 더 넓어진 ‘정치’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2017년과 달리 이번에는 새 정부의 조치에만 기대를 걸지 말고 시민들 스스로 연대의 경험을 바탕으로 사회를 재건해가야 한다. 말하자면 응원봉 광장에서 목격한 장면을 어떻게 하면 비상상태가 아닌 일상에 재연할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하며, 전광훈 세력의 ‘자유마을’ 실험을 압도할 연대의 촘촘한 망을 일굴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응원봉 광장이 그냥 닫히지 않고 우리 삶 곳곳에 작은 광장들로 증식하도록 말이다.
다음으로는, 정치의 틀과 규칙을 새로 정하는 또 다른 층위의 ‘정치’(메타정치)가 시작돼야 한다. 그러자면 당연히 현행 헌법을 새로운 역사적 경험에 맞게 고치는 과정이 필요하다. 하지만 좁은 의미의 헌법에만 한정돼서는 안 된다. 실질적 헌정을 구성하는 준헌법적 법률이나 제도, 가령 선거법이나 정당법 역시 과감히 개정해야 한다. 조기 대선 이전과 달리 차기 정부 아래서는 좀더 시간 여유를 갖고 시민 참여 통로를 여는 형태로 이런 ‘개헌의 정치’에 착수할 수 있다. 국회의 한계를 넘어 추첨 등의 방식으로 시민 대표들이 참여하는 숙의기구를 구성해 개혁안을 차분히 입안하고 합의해갈 수 있다.
이렇게 여러 방향에서 동시에 전개되는 정치 재구성 과정은 극우정치의 위협에 맞서는 가장 적극적인 대응이 될 것이다. 지금 내란 동조 세력은 기존 정치의 맹점과 한계를 파고들며 아예 정치가 사라진(통치만 있는) 세상을 몽상한다. 이런 전복적 위협은 단순히 기존 정치를 ‘전보다 더 잘하는’ 것만으로는 격퇴할 수 없다. 정치의 폭을 넓히고 주체와 층위를 다양화함으로써 반정치 세력의 공격력을 분산시켜야 한다. 매번 확인하듯이 결국, 더 풍부해지고 깊어진 민주주의만이 민주주의의 위기를 해결할 수 있다.
장석준 출판&연구집단 산현재 기획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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