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늘 자유민주주의라는 우리의 헌법 정신, 그리고 우리 사회의 제도와 질서가 다 성경 말씀에 담겨 있고 거기에서 나온다고 했습니다. 거짓과 부패가 우리의 자유민주주의를 위협할 수 없도록 헌법 정신을 잘 지키는 것이 하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길이라고 믿습니다.” ―2023년 4월9일 영락교회 부활절 연합예배 축사 중 윤석열 대통령의 발언
검사 시절 윤석열 대통령은 “검찰을 사랑한다”고 했으나, 요새는 “헌법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 같다. 대통령실 누리집의 ‘대통령의 말과 글’에 실린 글을 기준으로 보면, 취임 이후 ‘헌법’은 35차례, ‘헌법 정신’은 24차례나 공식 연설이나 발언에서 거론했다.
그런데 윤 대통령의 헌법 관련 발언을 살펴보면 앞뒤가 맞지 않는 내용이 많다. 이를테면 앞에 인용한 영락교회 축사를 보면 ‘자유민주주의라는 헌법 정신이 성경에 나온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그가 강조하는 ‘헌법’ 자체에 위배된다. 대한민국 헌법 제20조 2항을 보면 “국교는 인정되지 아니하며, 종교와 정치는 분리된다”고 돼 있기 때문이다. 윤 대통령의 이 발언은 2004년 5월 이명박 당시 서울시장의 “서울을 하나님께 봉헌한다”는 발언을 떠올리게 한다. 한상희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헌법, 참여연대 공동대표)는 “한국의 헌법은 정치와 종교를 엄격히 분리한다. 대통령이 헌법을 특정 종교와 연결하는 이야기를 해선 안 된다. 특히 이탈리아의 파시즘은 기독교 사상에서 영향을 받기도 했다”고 말했다.
윤 대통령이 헌법 정신의 핵심으로 꼽는 이념은 ‘자유민주주의’다. 그의 연설과 발언에서 90차례 이상 거론됐다. 그러나 자유민주주의라는 말은 헌법에 나오지도 않는다. 헌법엔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라는 말이 전문과 제4조에 한 번씩 나올 뿐이다. 심지어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라는 개념조차 반민주적 헌법으로 꼽히는 1972년 ‘유신헌법’에서 처음 나타났다.
정태호 경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헌법)는 “윤 대통령이 말하는 자유민주주의는 사실 반공주의, 뉴라이트 이념에 가깝다. 다른 사상을 배척하는 전체주의적 성격이 강하다. 반면 헌법에 보장된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는 헌법재판소의 판례를 보면 개방적이고 다양성을 존중한다”고 말했다.
실제로 2014년 12월19일 통합진보당 해산 청구 사건에 대한 결정문을 보면, “민주적 기본질서는, 모든 정치적 견해들이 각각 상대적 진리성과 합리성을 지닌다고 전제하는 다원적 세계관에 입각한 것으로서, 모든 폭력적·자의적 지배를 배제하고, 다수를 존중하면서도 소수를 배려하는 민주적 의사 결정과 자유·평등을 기본 원리로 하여 구성되고 운영되는 정치적 질서를 말한다”고 돼 있다. 현재 윤 대통령이 벌이는 정치와는 반대에 가깝다.
자유민주주의는 크게 두 가지 뜻을 가졌다. 첫째는 파시즘이나 옛 소련, 북한과 같은 전체주의나 독재를 배격한다는 의미가 있다. 통상 공산권의 정치 체제를 ‘인민민주주의’라 표현하고, 자유민주주의와 대립되는 개념으로 본다. 둘째는 평등을 강조하는 사회민주주의와 대비되는, 자유를 강조하는 민주주의를 뜻한다. 자유민주주의와 사회민주주의는 모두 서방의 민주주의로서 서로 포용하며 대립하지 않는다.
윤 대통령이 헌법의 또 다른 핵심 요소로 보는 ‘시장경제’에 대한 언급은 112차례 나온다. 그러나 윤 대통령이 ‘분배’에 대해 언급한 것은 단 두 번뿐이었다. 그런데 그마저도 ‘평등’의 관점이 아니라 주로 ‘자유’의 관점에서 거론했다. 이 역시 헌법의 내용과는 맞지 않는다. 헌법 제119조는 1항에서 ‘자유와 창의’를 강조하고, 2항에서 ‘균형과 분배, 조화, 경제 민주화’를 강조하기 때문이다.
윤 대통령은 남북관계에 대해서도 헌법을 인용했다. 2023년 8월29일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격려사에서 그는 “자유민주주의에 입각한 통일은 (…) 보편적 가치에 기반한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이것은 헌법 제4조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입각한 평화적 통일정책을 수립하고 추진한다”는 내용과 통한다.
그러나 윤 대통령의 통일 관련 발언은 남북관계의 헌법이라고 할 남북 간 중요 합의를 무시하고 있다. 1972년 7·4남북공동성명의 조국 통일 3대 원칙 중 셋째는 ‘사상과 이념, 제도의 차이를 초월해 우선 하나의 민족으로서 민족적 대단결을 도모해야 한다’고 돼 있다. 또 1991년 남북기본합의서 1장 1조는 ‘남과 북은 서로 상대방의 체제를 인정하고 존중한다’고 돼 있다. 실제로 민주화 이후 역대 대통령들은 이런 합의를 고려해 헌법 제4조를 아예 입에 올리지도 않았다.
김연철 전 통일부 장관(인제대 교수)은 “헌법 제4조에선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보단 ‘평화 통일’이 더 중요하고, 대북 관계 개선을 위해선 ‘자유민주주의’보단 그냥 ‘민주주의’를 말하는 것이 낫다. 상대가 있으니 신중히 말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반면, 윤 대통령은 한-일 관계에 대해서는 헌법 정신에 비춰 관계를 개선해야 한다는 특이한 주장을 했다. 2023년 4월24일 미국 <워싱턴포스트>와의 인터뷰에서 윤 대통령은 “(한-일 관계 개선은) 우리 헌법의 자유민주주의라는 정신에 비춰봤을 때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다. 가치를 공유하는 국가들끼리는 과거사 문제든 현안 문제든 소통을 통해서 해결할 수 있다”고 말했다.
서복경 더가능연구소 대표는 “윤 대통령이 헌법을 제대로 읽어봤는지 의문이다. 헌법 전문에서 말한 것처럼 한국이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했다면 강제동원 문제나 독도 문제를 그렇게 대응해선 안 됐다. 헌법을 아무 데다 갖다 붙이는 느낌이 든다. 대통령은 일관되고 포괄적인 철학과 정책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렇듯 윤 대통령은 더 이상 맥락에 맞지 않게 헌법을 주워섬기는 일을 그만둬야 한다. 대신 자신이 2022년 3월10일 대통령이 된 직후 시민들에게 했던 처음의 말로 돌아가야 한다. “국민을 위한 정치, 민생을 살리고, 국익을 우선하는 정치는 대통령과 여당의 노력만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의회와 소통하고 야당과 협치하겠습니다. 국정 현안을 놓고 국민들과 진솔하게 소통하겠습니다.”
장영수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헌법)는 “윤 대통령이 헌법을 강조하는 일이 잘못은 아니다. 다만 헌법을 올바르게 해석해야 하고, 행동으로 구체화해야 한다. 윤 대통령이 매사를 합법 여부로 따지기보단 폭넓게 소통하고 타협하려는 태도가 더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규원 선임기자 ch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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