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범도 장군은 ‘독립투사’였지만 적지 않은 기간을 ‘공산당원’으로 살았기에 그의 흉상을 굳이 대한민국 ‘반공·호국 간성의 요람’인 육사에 설치하는 것은 부당하다.”(2023년 9월3일 신원식 국민의힘 의원)
“북한을 대상으로 전쟁 억제를 하고 전시에 이기기 위해 필요한 인력을 양성하는 곳에서 공산주의 경력이 있는 사람이 있어야 하냐는 문제가 제기됐다.”(2023년 8월25일 이종섭 국방부 장관)
“홍범도 장군은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2급)을, 문재인 정부 때인 2021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1급)을 받았다. 상훈법상 중복 서훈은 금지돼 있다. 절차에 맞지 않는 것은 바로잡아야 한다.”(2023년 8월16일 박민식 국가보훈부 장관)
2023년 8~9월 한 달 사이 국민의힘 뉴라이트 성향 인사들이 홍범도 장군에 대해 공격을 쏟아부었다. 애초 이 논란은 육군사관학교 독립영웅 5인 흉상 철거 문제로 시작됐다. 그러나 이회영, 김좌진, 지청천, 이범석 등 항일 무장투쟁을 대표하는 인물들을 모두 포함한 흉상 철거는 오히려 여론의 된서리를 맞았다. 그러자 국민의힘의 뉴라이트 인사들은 나머지 4명을 건드리지 않고 홍범도 장군에게 포화를 집중하는 방식으로 바꿨다.
과연 홍 장군을 비난하는 사람들은 그의 항일 무장투쟁 역사를 한 번이라도 들여다봤을까? 사실 1895~1920년 홍 장군의 무장투쟁은 조선에서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홍 장군은 명성황후 시해 사건 직후인 1895년 9월 금강산 단발령에서 김수협이란 동지를 만나 무장투쟁을 시작했다. 이들은 철령에서 화승총을 들고 일본군 10명과 맞서 싸우는 첫 전투를 벌였다. 이후 1920년 봉오동·청산리 전투까지 홍 장군은 일본군을 상대로 최소 30차례 이상 전투를 벌였다. 병력과 장비가 압도적으로 우세한 일본군을 상대로 30차례 이상 싸우고도 살아남았다는 것 자체가 기적이었다.
조선 정부로부터 어떤 지원도 받지 못하고 의병과 독립군으로 활동하면서 그는 가족 모두를 잃었다. 큰아들 홍양순은 15살 때인 1907년부터 함께 무장투쟁을 했다. 특히 1907년 11월 함경도 북청 후치령 전투 뒤 부자가 총알을 확보하려고 밤까지 숨어 있다가 일본군 주검이 널브러진 싸움터로 몰래 기어들어간 일은 정말 눈물겹다. 그의 자서전 격인 <홍범도 일지>에 그 내용이 자세하다.
그의 무장투쟁이 두드러지자 일본군은 1908년 3월 부인 이옥구와 아들 양순을 사로잡아 홍 장군을 회유하는 편지를 쓰라고 요구했다. 그때 이옥구는 “여자나 사나이나 실끝 같은 목숨이 없어지면 그뿐이다. 내 글로 영웅호걸(홍 장군)이 곧이듣지 않는다. 나와 말하지 말고 너희 맘대로 해라. 나는 안 쓴다”고 버티다가 고문 끝에 목숨을 잃었다.
이어 일본군은 아들 양순에게 회유하는 편지를 줘서 아버지 홍 장군에게 전달하도록 했다. 부대가 숨어 있던 곳으로 아들이 편지를 가져오자 홍 장군은 “이놈아, 네가 일본 감옥에 서너 달 갇혀 있더니 그놈들 말을 듣고 나를 해치려 하는구나. 너부터 쏴 죽여야겠다”며 아들에게 총을 쐈다. 다행히 총알이 빗나가 귓불에 맞았다. 최고의 명사수도 아들 앞에선 마음이 흔들린 것이다.
그렇게 다시 독립군에 합류한 양순은 불과 석 달 뒤인 6월 함경도 정평군 바맥이에서 아버지를 도와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다 목숨을 잃었다. 홍 장군은 <일지>에 “(음력) 5월18일 12시에 내 아들 양순이 죽었다. 그때 양순은 중대장이었다”고 울음이 밴 짧은 글을 썼다. 당시 홍양순의 나이는 16살이었다. 둘째 아들도 그해 1908년부터 아버지와 함께 간도, 연해주를 다니며 무장투쟁을 돕다가 자유시 참변 직전인 1921년 6월 병으로 죽었다.
가장 빛나는 순간은 역시 봉오동·청산리 전투였다. 1920년 6월 길림성 북간도 화룡현 봉오동 전투는 홍범도·최진동·안무의 3개 부대가 연합해 치른 전투였다. 이 전투에서 1200여 명의 독립군은 500여 명의 중무장한 일본군과 전투를 벌여 100~500명의 일본군을 살상했다. 이것은 독립군이 일본군과 대규모로 격돌한 첫 전투이자, 대승이었다.
넉 달 뒤 1920년 10월 길림성 북간도 화룡현 청산리에선 홍범도·김좌진 부대가 연합해 일본군을 상대로 역사상 최대 승리를 거뒀다. 당시 독립군 부대는 3천 명 이상이었고, 일본군은 3만 명 이상이었다. 6일 동안 10차례 사투를 벌여 모두 독립군이 승리했다. 일본군 500~1천 명이 죽거나 다쳤다. 독립군과 임시정부의 사기는 하늘을 찔렀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 두 차례의 대승이 문제였다. 독립군의 대승은 간도 참변과 자유시 참변으로 이어졌다. 일본군은 독립군을 잡는다는 명분으로 간도 일대의 조선인 수천 명을 무차별 학살했다. 독립군 부대들은 사회주의 혁명 직후였던 러시아의 지원을 기대하고 1921년 아무르주 자유시(스보보드니)로 대거 이동했다. 그러나 오히려 무장해제를 당한 뒤 소련군에 흡수돼 조선에서 머나먼 이르쿠츠크로 강제이동을 당했다.
홍 장군은 <일지>에서 자유시 참변에 대해 기록하지 않았다. 다만 “일본 총 707개, 러시아 총 4개, 총알 4만7천 개, 수류탄 2804개, 나팔 6개, 권총 40개를 다 붉은군대 2군단에 넘기고 자유시로 들어왔다”고 짧게 적었다. 또 1922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민족대회에 가서 블라디미르 레닌을 따로 만난 자리에서 “(레닌이) 자유시 사변을 묻는데 몇 마디 대답한 일이 있었다”고만 적었다.
홍 장군은 1922년 이후 반강제로 군인을 그만두고 이르쿠츠크와 하바롭스크, 우수리스크 등을 옮겨다니며 집단농장을 운영했다. 그러다가 이오시프 스탈린에 의해 1937년 카자흐스탄으로 강제이주를 당했다. 중-일 전쟁을 일으킨 일본과 소련 극동의 조선인들이 협력할 것을 우려한 조처였다. 홍 장군은 카자흐스탄에서 병원과 고려극장 등의 경비로 일했다.
그는 1938년 경찰에서 한 조선인의 무고로 조사받고 그때까지 갖고 있던 총을 빼앗겼다. 총을 잃은 군인의 마음이 <일지>에 절절하다. “본래 나이 70살 먹은 늙은 몸이 소용없는 총을 집에다 둘 수 없다 해서 보내기는 합니다. 그러나 내 사랑하던 30여 년 총입니다. 1903년 3월8일 후치령 허리원서 나 혼자 일본군 기마병 세 놈을 잡고 빼앗은 총입니다.”
홍 장군은 1941년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자 73살의 나이로 참전하겠다고 요청했으나 고령 탓에 거부당했다. 두 해 뒤인 1943년 10월 친구, 동지들을 불러 돼지를 잡아 잔치를 벌이고 며칠 뒤 세상을 떠났다. 동포 신문 <레닌의 기치>는 1943년 10월27일치에 “그는 일찍부터 착취의 멍에를 대치하여 분투하셨으며 조선 빨치산 운동의 거두가 되어 고투하였다. 홍범도 동무에 대한 기억은 그를 아는 친우들에게 영원히 남아 있을 것이다”라고 그의 삶을 기렸다.
홍 장군과 관련해 자유시 참변 때 붉은군대의 요구에 따라 순순히 무장해제를 당한 일이 의심스럽다는 사람들이 있다. 또 소련공산당에 가입했기 때문에 육사에 흉상을 두기 어렵다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에게 묻고 싶다. 당신은 조국이 외적에 침략당했을 때 스스로 총을 들어 단 한 번이라도 그 외적과 맞설 수 있겠는가? 그런 용기와 애국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홍 장군에 대해 그렇게 말하지 않을 것이다.
김규원 선임기자 che@hani.co.kr
참고 문헌:
반병률, <홍범도 장군>, 한울, 2014
김삼웅, <홍범도 평전>, 레드우드,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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