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응답하라 1988> 속 덕선이의 남편이 누가 될지 점치면서 시작된 ‘어차피 ○○은/는 아무개’ 놀이는 설렘과 응원, 희망을 담은 표현이었다. 그런데 지금 더불어민주당 안에서 나오는 ‘어대명’(어차피 대표는 이재명)은 체념과 포기, 좌절의 표현에 가깝다.
이재명을 지지하는 이들은 그러니 딴소리 말라고 하고, 이재명을 반대하는 이들은 그래서 대안이 없다고 한다. 당은 이미 쪼개진 것 같다. 컷오프(예비경선)를 책임지는 중앙위원 투표에서 엄청난 이변이 나오지 않는 한 분위기가 바뀌기 어렵다.
이재명 의원은 2022년 8월28일 열리는 민주당 전당대회 당대표에 출마하며 “이기는 민주당”을 내세웠으나, 그가 대표가 된 민주당을 떠올리면 가슴이 뛰기보다는 답답해진다는 이가 많다. 윤석열 정부의 탄압이든 본인의 허물이든 둘 다든, 또 얼마나 밤낮없이 사법 공방으로 지지고 볶을까 싶어서다. 하필 검경 수사 결과도 전당대회쯤 드러날 터이니 이재명을 둘러싼 법적 다툼이 최대 이슈가 될 것이다. 민주당이 그런 그를 꼭 지금 대표로 세워야 할 절박한 이유가 있는가. 지난 대선 때는 급해서 그랬다 해도 말이다. 이재명과 그의 지지자들이 내세우는 ‘책임’과 ‘혁신’은 둘 다 옹색하다. 울림도 감동도 없다.
이재명은 당대표에 나서는 게 “진정으로 책임지는 행동”이라 했다. 아등바등 뭔가를 해내려는 사람으로서, 시대 흐름에 민감한 정치인으로서, 이재명을 이낙연보다 더 쳐줬던 이들조차 적어도 ‘관계의 책임성’ 면에서는 그를 신뢰하지 않는다. 대장동 수사가 진행되며 관련자들이 죽거나 갇히거나 억울해할 때 이재명이 보여줬던 태도는 일견 잔인하기까지 했다. 산하기관의 책임자였거나 높은 직급이었던 이를 “일개 직원”이라거나 “잘 모르는 사람”으로 치부했다. 억울함을 호소하며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의 문상조차 가지 않았다. 인천 계양을 보궐선거 기간에 내보인 “숨 쉰 채 발견”이란 표현과 손으로 목을 치는 행동은 그 주변 인물들의 죽음을 기억하는 이들에게 조롱이자 충격으로 다가왔다.
이재명의 설득으로 공동비상대책위원장을 맡았던 박지현에게 보인 태도도 이해할 수 없다. 박지현이 수차례 그를 호명하며 전당대회 출마를 불허한 당의 방침에 대한 의견을 물었으나 끝내 묵살했다. 그러다 출마가 완전히 좌절된 7월18일 후보 등록 마지막 날에야 “박 전 위원장에 대해 도전의 기회를 주면 좋겠다”고 슬쩍 한마디 얹었다. 이에 박지현은 “기회주의 정치로 피날레를 장식하는 장면도 확인했다”고 이재명을 겨냥했다.
박지현이라는 반사경에 비친 이재명은 참으로 만화경 같다. 박지현이 자신을 비판하자 거리를 뒀는데, 그 방식이 이재명 본인의 얼굴만 가리는 형국이랄까. 7월15일 국회 의원회관 사무실 앞에서 기자들과 만났을 때 본인의 출마 결심에 대해선 꼼꼼히 답변하고는 곧이어 박지현 이름 석 자가 나오자마자 “좀 지나가도 될까요?” 하며 방으로 들어갔다. 그에 앞서 7월11일 국회 마당에서 기자들이 (이재명의 출마는 안 된다는) 박지현의 주장을 어떻게 생각하냐고 묻자 그는 갑자기 휴대전화를 꺼내 어디론가 전화를 걸더니 “어디쯤이세요?” 하면서 고개를 휙 돌려버렸다. ‘이재명이 박지현을 피하는 법’으로 한동안 회자됐다. 박지현은 그런 이재명을 두고 언론 인터뷰에서 “비겁하다”며 “고분고분 자기 말을 잘 들을 청년은 키워주지만 자기 목소리를 내는 청년은 가만두지 않겠다는 인식이 있는 것 같다”고 했다.
다른 의견은 묵살하거나 빤히 보여도 못 본 척 지나쳐버리는 ‘반쪽짜리 리더십’으로 과연 이재명은 민주당을 제대로 이끌 수 있을까. 그것도 본인에 대한 각종 수사를 방어해가면서 말이다. 무리라고 보는 게 무리는 아니다.
윤석열 대통령이 자신을 맹신한다면 경쟁자였던 이재명은 자신을 과신한다. 쫄리면 쉬는 게 맞다. 진짜 억울하다면 국민이 보호해줄 것이다. 우리, 그 정도의 신뢰와 책임은 갖고 살자.
김소희 칼럼니스트
*김소희의 정치의 품격: ‘격조 높은’ 정치·정치인 관찰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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