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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 일가에 이별당한 2인자들…뒤끝은?

하루아침에 물러나는 대기업 ‘2인자’들… 총수 이익과 회사 이익이 충돌할 때 총수 위해 일할 수밖에 없는 구조 만들어
등록 2024-01-12 12:35 수정 2024-01-15 03:42
조대식 전 SK수펙스협의회 전 의장(왼쪽부터)과 박정호 전 SK하이닉스·스퀘어 부회장, 권영수 LG에너지솔루션 전 부회장. <한겨레> 자료, 공동취재사진

조대식 전 SK수펙스협의회 전 의장(왼쪽부터)과 박정호 전 SK하이닉스·스퀘어 부회장, 권영수 LG에너지솔루션 전 부회장. <한겨레> 자료, 공동취재사진


2023년 말 재계에도 많은 이별이 있었다. 특히 재벌 총수와 짝을 이뤄 ‘2인자’ 역할을 한 이들이 물러난 사례가 눈에 띈다. 이들은 총수 아래 막대한 권한을 행사하다 하루아침에 물러났다. 반면 총수 일가는 승진을 거듭하는 모양이었다. 에스케이(SK) 최태원 회장의 장녀 최윤정(35) SK바이오팜 전략투자팀장은 임원급인 사업개발본부장으로 승진해 ‘최연소 임원’이 됐고, 롯데는 신동빈 회장의 장남 신유열(38) 롯데케미칼 상무가 전무로 승진했다.

상호 견제하던 2인자들 물리친 회장 사촌동생

SK그룹은 2023년 12월 인사에서 조대식·박정호·김준·장동현 부회장 등이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다. 조대식 수펙스추구협의회 의장과 박정호 SK하이닉스·스퀘어 부회장은 각각 ‘디에스’(DS), ‘피제이’(PJ)라는 이니셜을 가질 만큼 탄탄한 입지를 갖고 있었다. 다른 재벌과 달리 복수의 2인자는 상호 견제와 경쟁을 펼쳐왔다. 두 부회장이 경영 2선으로 물러나면서 최태원 회장의 사촌동생인 최창원 SK디스커버리 부회장이 수펙스추구협의회 의장을 맡아 유일한 2인자가 됐다.

기존 SK의 의사결정이 조대식 부회장과 박정호 부회장이 최 회장과 협의하며 각각 이뤄졌다면, 향후엔 수펙스추구협의회를 중심으로 각 계열사와 의견을 조율해 내려질 전망이다. SK 관계자는 “두 부회장이 최태원 회장과 오랜 기간 보조를 맞춰왔고 후배들은 최 회장과 연차가 있어, 지난 연말 인사는 의외라는 반응도 있다”고 말했다. 이어 “2023년 경영 사정이 나빠지면서 구조조정 필요성과 지주회사와 계열사 간 더 긴밀한 의사결정을 할 요구가 커졌다”며 “SK디스커버리에서 구조조정 경험이 있는 최 부회장이 적합한 것으로 판단한 셈”이라고 말했다. 최창원 부회장은 2007년 SK케미칼을 맡으면서 섬유사업을 정리하고 헬스케어·바이오 위주 사업으로 조직을 정비하면서 대대적인 구조조정을 한 바 있다.

엘지(LG)그룹에선 권영수 부회장이 떠났다. 2018년 구광모 회장이 취임하면서 LG유플러스에서 지주회사 LG로 옮겨 최고운영책임자(COO)를 맡아 명실상부한 2인자 역할을 했다. 2021년엔 LG에너지솔루션으로 이동해 기업공개(IPO)를 이끄는 등 좋은 경영 성과를 보였다. 권 부회장은 인사 뒤 “LG에너지솔루션이 세계 최고의 배터리 회사가 되는 여정을 진심으로 응원하겠다”고 작별을 전했지만, 보유 주식을 모두 팔아 뒷말을 남겼다. LG에너지솔루션 대표이사이던 2022~2023년 2천 주를 매입했다가, 인사 발표 직전인 2023년 11월24일 모두 매도했다. 주당 약 50만원에 사고 약 43만원에 팔면서 1억원 넘게 손해를 봤다. LG 관계자는 “손해를 보면서도 주식을 팔아, 권 부회장이 불만을 표시했다는 해석을 낳았다”고 말했다.

신세계그룹에선 2인자까지는 아니지만 ‘정용진의 남자’라 불린 강희석 전 이마트·에스에스지(SSG) 대표를 비롯해 전문경영인 4명이 짐을 쌌다. 이번 인사는 그동안 경영을 지휘한 정용진 부회장, 정유경 총괄사장이 아닌 이명희 회장이 주도했다. 자녀가 신임한 전문경영인을 교체하고 그 자리에 이석구(75) 전 스타벅스코리아 대표가 신세계라이브쇼핑을 맡는 등 ‘올드맨’이 되돌아와서다. 이명희 회장과 두 자녀는 그룹 내 주요 계열사에서 등기이사가 아닌 미등기이사로 연봉을 받고 있다. 지에스(GS)건설에선 임병용 부회장이 10년 넘게 맡았던 대표이사 자리를 허씨 일가 4세인 허윤홍 사장에게 넘겨줬다.

작별의 말은 응원이었지만 주식은 모두 팔아치워

총수 일가를 빼면 재계에서 결별은 늘 예고 없이 찾아왔다. 롯데그룹은 2020년 8월 갑작스럽게 황각규 부회장을 인사 조처했다. 그룹 내 컨트롤타워인 경영혁신실을 맡아 ‘마산고·서울대 화학과·호남석유화학’으로 대표되는 이른바 ‘황각규 라인’ 얘기마저 있었지만, 그가 물러난 뒤 그 라인에 있던 임원들도 대거 정리됐다.

물론 2인자가 총수와 맞먹는 권한을 가진 경우도 있었다. 대개 경영권 승계로 인한 공백 상황에서 불거졌다. 삼성 소병해 전 비서실장, SK 손길승 전 회장이 대표적이다. 고 이건희 삼성 회장은 1993년 <신동아> 인터뷰에서 “집안 정리하고 회사 정리 끝내는 데 5년 걸렸다”고 말할 정도로 소 비서실장의 힘이 상당했음을 보여줬다. 손길승 전 회장은 최종현 회장이 숨지자 1998~2004년 그룹 회장은 물론 2003년엔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마저 맡았다. 그는 2001년 “최종현 회장의 장남 최태원 회장이 2세라는 이유로 당연히 그룹 회장이 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런 예외적 경우를 빼면 전문경영인은 ‘총수 경영’ 아래 넘보기 힘든 권한을 갖지만 동시에 한순간에 자리를 내놓는 자리이기도 하다.

미국은 지배주주가 전문경영인과 대등한 존재인 경우가 많다. ‘경영의 귀재’로 불리는 리 아이어코카도 포드 사장 시절 지배주주와 갈등을 겪었다. 지배주주는 그를 쫓아내려고 사설탐정을 고용해 비리를 캐내도록 지시하기도 했다. 휼렛패커드(HP) 칼리 피오리나 최고경영자는 대주주이자 창업자인 윌리엄 휼렛·데이비드 패커드(지분율 19%)의 반대에도 컴팩 인수를 관철하면서 한때 ‘정보기술(IT) 여제’로 불리며 막대한 권한을 누렸다. 강정민 경제개혁연대 연구위원은 “애플에서 창업자인 스티브 잡스가 쫓겨난 것이나, 오픈에이아이(AI)에서 샘 올트먼 해임을 시도한 것을 보면 이사회 권한이 막강하다”며 “한국에선 총수 일가가 이사회 멤버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말 한마디로 2인자마저 내쫓을 수 있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소유와 경영 분리 불가피… 전문경영인과 관계 재설정 필요해

2인자를 비롯한 전문경영인이 회사를 위해 일한다지만, 총수 이익과 회사 이익이 충돌할 때 총수를 위해 일할 수밖에 없는 구조를 만든다. 정몽구 현대차그룹 명예회장은 2011년 본인과 정의선 회장의 지분이 많은 계열사 글로비스에 일감 몰아주기를 지시하고 전문경영인이 이를 이행해 현대차에 손실을 끼쳐 배상 판결을 받기도 했다. 아직까지도 많은 일감 몰아주기가 이러한 불법 위험을 내포한다. ‘코리아 디스카운트’의 큰 요인 가운데 하나로 후진적 지배구조가 꼽히는 이유다.

강정민 위원은 “총수 중심 경영과 전문경영인 중심 경영의 효율성을 따질 때 다양한 의견이 있을 수 있지만, 매 세대에서 경영 능력이 뛰어난 후계자가 나올 수 없어 향후 소유와 경영 분리는 불가피할 것”이라며 “승계뿐만 아니라 회사를 잘 이끌 수 있는 전문경영인을 발굴하고 이사회가 독립적으로 운영되도록 지배주주와의 관계를 재설정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정훈 기자 ljh9242@hani.co.kr

*알쓸재사: 재벌과 기업의 적절한 관계는 무엇일까. 기업은 물론 국가 경제에 영향이 큰 재벌들의 사정을 살펴본다. 알아두면 쓸모있는 재벌집 사정. 3주마다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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