뜻밖이었다. ‘인화’로 잘 알려진 엘지(LG)그룹에서 유산 상속을 둘러싼 갈등이 벌어졌다. 1947년 엘지 설립 이래 처음 발생한 집안싸움이다. 구광모 회장을 상대로 고 구본무 회장의 부인인 김영식씨와 두 딸(구연경 엘지복지재단 대표, 구연수씨)이 제기한 상속회복청구 소송이다. 2023년 10월과 11월 두 차례 변론기일이 진행됐고, 12월에 다시 변론준비기일을 갖는 등 다툼은 계속될 전망이다.
구광모 회장은 구본능 희성그룹 회장의 아들인데, 2004년 12월 큰아버지인 구본무 전 회장의 양자로 입적했다. 구본무 회장의 장남이 1994년 불의의 사고로 숨져서다. 구광모 회장은 2006년 엘지전자에 대리로 엘지에 발을 디뎠고 이후 경영 수업을 받다 장자 승계 전통에 따라 구본무 회장이 2018년 5월 별세하자 회장직을 물려받았다.
장자 승계 전통이 ‘시대착오적’이라는 비판에도 국내 재벌 가운데 이를 따르는 곳도 있다. 코오롱·한화그룹도 같은 원칙을 갖고 있다. 코오롱그룹은 창업주 이원만 회장, 2대 이동찬 명예회장, 3대 이웅열 회장으로 경영권이 이어졌고, 4대 이규호(39) 사장에게 승계가 진행 중이다. 한화그룹도 김종희 창업주가 별세한 뒤 장남인 김승연 회장이 이어받았고, 현재는 김동관(40) 한화솔루션 부회장이 그룹을 이끌고 있다. 국외에서도 드물지 않은데, 13대가 승계한 이탈리아 무기 제조사 베레타는 가족 내 아들이 없어 외손주의 성을 바꿔 승계시키기도 했다. 프랑스 푸조도 같은 원칙을 갖고 있는데, 한 딸이 소송을 16년간 지속하기도 했다.
엘지의 이번 소송은 그동안의 전통에 균열이 생겼음을 보여준다. 김영식씨 등은 소송을 제기하면서 “경쟁권 분쟁이 아닌 가족 간의 화합을 위해 상속 과정에서 있었던 절차상 문제를 바로잡기 위한 것”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두 차례 변론기일에선 경영권까지 염두에 두고 있음을 보여줬다. 11월16일 서울서부지법에서 열린 2차 변론기일에 공개된 녹취록을 보면, “아빠(구본무 회장)의 유지와 상관없이 분할 합의는 리셋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구연경 대표), “구연경 대표가 잘할 수 있다. 경영권 참여를 위해 지분을 다시 받고 싶다”(김영식씨) 등이 담겨 있었다. 구본무 전 회장이 남긴 엘지 주식(11.28%) 등 2조원 가운데 5천억원을 물려받았는데 이보다 더 받겠다는 의지보다 경영 참여 의지를 피력한 셈이다.
국내외 재벌에서 이런 분쟁은 손쉽게 찾을 수 있다. 2000년 이후로만 해도 국내에선 삼성·현대·두산·한진 등 상당 재벌이 분쟁을 겪었다. 2012년 2월 삼성가의 장남 이맹희(이재현 CJ그룹 회장의 부친)씨가 동생 이건희 회장을 상대로 상속재산반환 소송을 낸 바 있다. 창업주 이병철 회장이 물려준 차명주식 가운데 자기 몫을 돌려달라는 요구였다. 1심에서 패한 뒤 화해하며 분쟁은 일단락됐다. 현대그룹에선 창업주 정주영 회장이 생존했을 때인 2000년 장남 정몽구 회장과 5남 정몽헌 회장이 경영권 다툼을 펼치며 ‘왕자의 난’이, 2003년엔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과 정상영 케이씨씨(KCC) 명예회장이 현대엘리베이터를 두고 분쟁으로 ‘숙질의 난’, 2006년엔 정몽준 전 국회의원이 대주주인 현대중공업그룹이 현대상선 지분을 대량 매입하면서 현정은 회장과 갈등을 벌인 ‘시동생의 난’까지 있었다.
한진은 총수가 별세할 때마다 갈등이 불거졌다. 2002년 조중훈 창업주가 사망한 뒤 조양호 회장을 상대로 2005년 조남호 전 한진중공업 회장과 조정호 메리츠금융지주 회장 등이 소송을 제기했다. 2006년에 강제조정 결정을 내리면서 소송은 끝났지만, 이후에도 따로 성묘하는 등 갈등은 이어졌다. 2019년 4월엔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이 숨진 뒤 조원태 회장과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이 경영권을 두고 갈등을 벌였다. 조 전 부사장은 행동주의 사모펀드 케이씨지아이(KCGI), 반도건설과 ‘3자 주주연합’을 만들어 남동생과 2020년 3월 주총에서 경영권을 겨뤘지만, 다른 유족과 국민연금 등이 조 회장 손을 들면서 끝났다.
명품으로 알려진 구치 일가의 갈등은 더욱 극적이다. 창업자 구초 구치의 손자 마우리치오 구치는 1995년 3월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전부인이 보낸 킬러의 총에 맞아 숨졌다. 어릴 적 친구인 35살의 인테리어 디자이너 여자친구와 재혼할 예정이었는데, 전부인은 이로 인해 자신의 두 딸에게 돌아갈 몫을 걱정해 킬러를 고용했다. 전부인은 25년형을 받았고 18년 복역 뒤 2016년 석방됐다. 이런 내용은 2021년 제작된 영화 <하우스 오브 구찌>에 나와 있다. 구치가는 성명을 내어 “사실과 다르다”고 반박했지만 소송은 제기하지 않았다.
재벌 가족 간 갈등은 승계가 곧 기업 리스크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한국개발연구원(KDI) 원장을 지낸 최정표 건국대 교수(경제학)는 <한국재벌사연구>에서 “(총수 일가의) 경영권 싸움은 기업 경영에도 영향을 미쳐 종국에는 국민경제에까지 피해를 준다. 재벌 폐해 중의 하나”라고 지적했다. 데이비드 랜즈 미국 하버드대학 명예교수(경제학)도 <왕조들>(Dynasties)에서 3세 이상이 승계된 기업들을 연구하면서 아들들이 회사에서 언제든 좋은 자리를 찾을 수 있다는 생각으로 자기 발전에 게으르거나, 소외된 딸들이 전투적으로 돌변하고 배우자까지 가세해 문제가 생기는 것을 약점으로 꼽기도 했다.
‘재벌 해체’가 어려운 상황에서 가족경영이 장점이 없지는 않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 미국 포드가는 회사의 회생을 위해 사재를 턴 반면 지엠(GM), 크라이슬러 등은 정부 도움을 받아야만 했다. 국내에서도 이건희 삼성 회장이 1974년 자신의 돈으로 한국반도체 지분 50%를 취득해 반도체 사업의 토대를 마련하기도 했다. 가족경영 기업과 전문경영인 체제를 비교한 경영 성과를 평가한 많은 논문을 보면 엇갈린 평가를 내린다. 대개 가족경영 기업의 장점으로 장기 안목을 가진 투자와 빠른 결정을, 단점으론 황제경영과 그에 따른 불확실성, 경영권 세습 등이 지적된다.
이런 상황에서 국내에서 경영권 승계를 위한 제어장치도 부족하다. 기업지배구조보고서 공시제도를 통해 최고경영자(대표이사) 승계정책을 마련하고 공표하도록 하고 있다. 삼성과 에스케이(SK), 현대차, 엘지, 한화, 지에스(GS) 등은 공시를 통해 최고경영자 승계 원칙을 밝히고 있지만, 재벌 총수 승계와는 동떨어진 내용이다. 재벌 총수 일가는 함부로 인사를 논의할 대상도 아니라는 뜻이다.
김화진 서울대 교수(법학)는 <소유와 경영>에서 경영학의 구루(대가) 피터 드러커의 말을 따 “가족이 회사를 우선할 때 회사와 가족 모두 성공한다. 회사가 가족을 위해 경영될 때 회사와 가족 모두 실패한다”라며 총수 일가의 책임을 강조했다. 반면 김우찬 고려대 경영학과 교수(경제개혁연대 소장)는 “재벌 가족 간 갈등은 사회적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들끼리 다투면 자기 것이 된다는 인식을 보여준다”며 “현실적으로 쉽지 않지만 ‘스튜어드십 코드’(수탁자책임 원칙)를 도입하겠다는 국민연금이나 다른 주주들이 재벌가의 경영에 대한 통제와 감시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정훈 기자 ljh9242@hani.co.kr
참고 문헌
<소유와 경영>, 김화진, 더벨, 2020
<한국재벌사연구>, 최정표, 해남, 2014
<Dynasties>, David Landes, Penguin Books, 2006
*알쓸재사: 재벌과 기업의 적절한 관계는 무엇일까. 기업은 물론 국가 경제에 영향이 큰 재벌들의 사정을 살펴본다. 알아두면 쓸모있는 재벌집 속사정. 3주마다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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