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제일 쓸데없는 걱정이 ‘재벌 걱정’이라지만, 재벌 총수에게 위로를 건네야 할지도 모르겠다. 윤석열 정부 들어 동원되는 횟수가 갈수록 늘어나서다. 윤석열 대통령과 재벌 총수의 만남은 <한겨레21>이 파악한 비공식 자리를 포함해 2023년에 한 달에 한 번 이상이었다. 이런 탓인지 2023년 하반기에는 재벌끼리 의논해 대통령 순방에 따라나설 순번을 정하기도 했다. 더 큰 문제는 비공식 회동은 정경유착 가능성마저 키울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정부가 글로벌 대기업 총수들을 무더기로 집합시키는 것부터 바람직하지 않다. 개별 총수들은 외국에서 국가원수급 예우를 받는 경우도 많다. 현 정부 들어 기업 애로 사항 청취보다 권력을 앞세워 기업을 ‘을’ 취급하는 경향이 유난히 강해졌다. (중략) 지금 상황을 종합하면 기업인들을 들러리로 세워 정부도 뭔가 하고 있다는 것을 홍보하기 위한 ‘사진 찍기’ 이외의 효과를 찾기 힘들다.”
<문화일보> 2019년 7월8일치 사설의 한 대목이다. 일본의 반도체 소재 수출 규제에 대응하기 위해 문재인 대통령이 30대 그룹 총수들을 청와대로 초청해 간담회를 열 계획에 대한 비판이다. 이러한 잣대를 윤석열 정부에 적용하면 어떨까?
지난 정부에선 이런 행태를 찾기 힘들다. 문재인 정부에서 대변인을 한 김의겸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재벌 총수와 공식 일정 외에 사적인 별도 만남은 없었다”며 “해외 순방 때도 기업 쪽의 물음에 문 대통령이 ‘기업은 기업 논리대로, 정치는 정치대로 움직이면 된다’고 할 정도로 별도 자리는 없었다”고 말했다. 또 정무수석을 지낸 이철희 전 민주당 의원도 “문 대통령이 재벌 총수는 물론 누구도 단독으로 만난 적이 없다”며 “내가 보고할 때도 비서실장이나 부속실장 등을 배석하도록 했고 그 내용은 대통령 기록물로 남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윤 대통령이 재벌 총수들을 비공식적으로 만났다면 그건 기록물로 남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고 덧붙였다.
문재인 정부의 태도는 박근혜 정부의 이른바 ‘국정농단’에서 드러난 비리 탓이 크다. 박근혜 대통령은 이재용 당시 삼성전자 부회장을 비롯해 재벌 총수들을 독대하면서 미르·케이(K)스포츠재단 지원을 요청하고, 재벌 총수들은 관련 사업 민원을 전달했다. 당시 내용을 살펴보면, 정몽구 현대자동차 회장은 2015년 7월, 2016년 2월 박 대통령을 독대하면서 ‘불법노동 행위에 대한 엄격한 법집행’ ‘전기차·수소차 보급 확대를 위한 정부 차원의 정책 지원’ ‘글로벌비즈니스센터(GBC) 조기 착공을 위한 협조’ 등을 요청했다.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은 수입맥주 과세 강화 등을 요구했다. 다른 재벌들도 이와 다르지 않았다.
독재정권 시절엔 비공식 만남은 곧 뇌물이었다. 1996년 1월 검찰이 발표한 전두환 비자금 수사 결과를 보면, 전두환씨는 대통령 재임 기간 ‘청와대 혹은 인근 안가’에서 정주영 현대 명예회장을 일곱 차례 만났다. 정주영 회장은 원자력발전소 건설공사 등 대형 국책사업자 선정, 금융·세제 운용과 관련해 선처를 부탁하며 220억원을 건넸다. 삼성 이병철 회장(220억원)이나 한진 조중훈 회장(160억원) 등 다른 재벌 총수도 비슷했다. 노태우 대통령 역시 청와대 집무실이나 안가에서 삼성 이건희 회장으로부터 경제정책, 금융·세제 등과 관련한 선처를 부탁받으며 250억원을 받는 등 전두환씨와 같은 모습을 보였다.
부패한 과거는 현재의 불안을 키운다. 윤 대통령이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등 7개 재벌 총수들과 2023년 12월6일 부산의 한 시장에서 연출한 ‘먹방’도 그러했다. 한 재벌그룹 총수가 떡볶이를 먹는 시늉을 하다 내려놓는 모습이 부각되자, 해당 그룹은 이를 해명해야만 했다. 공교롭게도 해당 그룹 회사들이 국세청 세무조사를 받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 부각됐다. 깨작거림에 따른 ‘미운털’이 박혀 세무조사가 이뤄졌다는 세간의 의심에 적극 해명에 나설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됐다. 해당 그룹 관계자는 “일부 영상만 보면 그렇게 보이지만 전체를 보면 먹는 장면도 있다”며 전체영상을 안내했다. 세무조사 역시 “11월에 이뤄진 것이라 부산 방문과는 연관이 없는 ‘오비이락’일 뿐”이라고 했다. 박근혜 정부 시절엔 최순실씨의 청탁을 간접적으로 전달받은 기업이 이를 거절했다가 세무조사를 받은 사실이 나중에 드러나기도 했다.
외국 논문은 대통령과 대기업 회장의 공식적 만남마저 정경유착 가능성이 크다는 점을 보여준다. 미국 일리노이대학(어배나섐페인 캠퍼스) 제프리 브라운 교수가 2020년 발표한 논문 ‘대통령과의 친분: 정치적 접근과 회사 가치’(All the President's Friends: Political Access and Firm Value)를 보면, 대통령 등 관료와 기업 최고경영자(CEO)가 자주 만날수록 회사 가치는 높아지고 정치적 특혜 가능성이 커지는 것으로 분석됐다. 논문은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재임 시절인 2009~2015년 에스앤피(S&P) 1500 기업의 경영자들이 백악관을 방문한 2401회를 분석했다.(오바마 행정부는 대법관 후보 등 비밀 유지가 필요한 경우를 빼곤 모든 방문자 명단을 공개했다.)
백악관에서는 오바마 대통령(338회), 밸러리 재럿 선임고문(105회), 제프 자이언츠 비서실장(103회) 등의 순으로 기업 회장을 만났다. 방문자는 하니웰(방산·에너지, 30회), 제너럴일렉트릭(에너지·금융)·제록스(제조업)·에버코어파트너스(금융, 21회), 제이피모건(금융)·에이티앤티(통신, 18회) 등의 순으로 소속 회장이 백악관을 드나들었다. 이들 기업은 대통령 등과 만난 뒤 12일간 주가 누적 수익률 0.512%를 보여, 만남이 없는 같은 업종(0.274%)보다 높았다.
미국 정부는 국내총생산(GDP)의 10%에 이르는 재화나 서비스를 구매하고, 관료들은 규제완화 등 의사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다. 기업에 대통령 등 관료를 만날 수 있는 것은 매우 중요한 가치인 셈이다. 논문은 기업이 정치인을 만날 수 있는 것은 선출된 공직자에 대한 부당한 영향력을 얻고 정치적 특혜를 받을 가능성을 높인다고 결론 내렸다.
윤석열 정부는 어떨까? 검사 출신 윤 대통령이 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 뇌물수수 등을 수사한 경험이 있어 재벌 총수와의 만남은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될까? 이창민 한양대 교수(경영학)는 “비공식적 만남은 기존 공적 절차를 형해화하고 대통령에게 끈을 대려 하거나 그 과정에서 로비하는 등의 문제를 낳을 수 있다”고 말했다.
이정훈 기자 ljh9242@hani.co.kr
*알쓸재사: 재벌과 기업의 적절한 관계는 무엇일까. 기업은 물론 국가 경제에 영향이 큰 재벌들의 사정을 살펴본다. 알아두면 쓸모있는 재벌집 속사정. 3주마다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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