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일(47) 교수는 태어나면서부터 앞을 못 봤다. 그가 처음 본 세상은 물속처럼 흐렸다. 색깔과 명암만 겨우 구분할 수 있었다. 그나마 뿌옇던 세상은 뜻하지 않은 사고가 겹치며 암흑으로 변했다. 그의 나이 8살이었다. 공부를 하고 싶었지만, 학교는 또 다른 암흑이었다. 친구들은 방학 때 미리 받아 겉장까지 반듯이 입혀 들고 오는 교과서를, 그는 새 학기가 시작되고 한참 지나서야 받을 수 있었다. 교과서 외의 학습서나 교양서는 언감생심이었다. 그는 필사적으로 지식을 더듬었다. 그렇게 연세대 교육학과를 졸업하고, 장학생으로 뽑혀 미국 밴더빌트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2001년 전남 조선대 특수교육과 교수가 됐다. 이 땅에서 그의 궤적은 기적을 그린다.
세상은 1980년, 중학교 1학년 꼬마 김영일의 학교보다 한결 나아진 것처럼 보인다. 2007년 개정된 ‘장애인 등에 대한 특수교육법’은 장애 아동의 교육받을 권리를 법으로 보장했다. 2009년 ‘도서관법’이 개정되어 국립중앙도서관은 도서관 자료를 제작·발행한 이에게 디지털 파일 납본을 요청할 수 있게 됐다. 2013년 4월 발효된 ‘장애인 차별금지 및 권리구제에 관한 법률’은 개인 홈페이지를 뺀 모든 웹사이트가 장애인 접근성을 의무 보장하도록 했다. 디지털 시대는 장애인을 가로막는 문턱을 한결 낮춘 듯하다.
그러나 현실은 아직도 깜깜하다. 점자교과서만 봐도 그렇다. 국정교과서를 주로 쓰는 초등학교는 그나마 사정이 낫다. 중·고등학교는 여전히 1980년대에 머물러 있다. 학교별로 검인정교과서를 쓰다보니 출판사에 일일이 점자교과서 제작을 요청해야 하는 형편이다. 미적거리는 출판사를 어렵사리 설득해 점자교과서를 받더라도, 두 달은 훌쩍 지나간다. 그나마 받으면 다행이다. 검정교과서의 점자책 납본율은 30% 수준이다.
역시 유력한 대안은 디지털이다. 파일 형태로 책을 받으면 시·청각 장애 학생도 교과서에 접근하기 쉽다. 시각장애인도 점자단말기나 음성 낭독 프로그램으로 책을 읽을 수 있고, 휴대성이 좋은데다 검색도 쉽다. 그런데 이게 또 험난한 산이다. 출판사는 저작권 침해를 걱정해 디지털 파일을 넘겨주길 꺼린다. 디지털교과서도 여전히 시범사업 수준에 머물러 있다. 2015년부터 일반 학교를 대상으로 디지털교과서 보급을 확대하려 했지만, 이번 정부 들어 다시 연기됐다.
해법은 간단하다. 김영일 교수는 “시각장애인 학생도 비장애인처럼 원하는 매체로 어느 출판사 책이든 자기가 다니는 학교에서 선택하고 제공받을 수 있도록 법으로 보장하면 된다”고 말했다. “한꺼번에 바꾸기 어렵다면 국어·영어·도덕 같은 텍스트 중심의 교과서라도 우선 디지털화해 공급해주면 좋겠다”는 바람도 덧붙였다.
디지털 파일을 ‘어떻게’ 공급받느냐도 중요한 문제다. 출판사는 마지못해 파일을 넘겨주더라도 애초 출판용으로 만들었던 인디자인이나 PDF 파일로 넘겨주기 일쑤다. 그러다보니 시각장애인은 파일을 받아도 점자단말기나 개인 기기에서 읽을 수 있는 파일로 다시 변환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미국은 장애인도 오디오북이나 점자단말기 등에서 손쉽게 읽을 수 있도록 XML 기반의 ‘국가교수학습접근성표준’(NIMAS)이란 기술 표준을 일찌감치 정하고, 출판사가 이를 의무 제공하게 했다. 이건 출판사의 선의나 의무에만 기댈 문제가 아니다. 국가 표준을 서둘러 정하고, 기존 출판용 파일을 이 형식으로 손쉽게 바꿀 수 있는 변환 도구를 정부가 나서서 개발·보급해야 한다.
“우리나라가 통합교육을 시행한 지 10년이 채 안 됩니다. 그 아이들이 아직은 초등학교에 머물러 있는데요. 진짜 문제는 이 아이들이 중·고등학교에 들어갔을 때예요. 우리 아이들도 다른 아이들과 똑같이 교과서로 공부하게 해주세요. 이것도 못해줍니까, 나라가.”
이희욱 기자 asadal@bloter.net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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