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 우리의 새로운 기술 성과물을 발표합니다. 저는 25년간 이날이 오기만을 꿈꿨습니다.”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은 들떠 보였다. 6월4일 밤 9시45분 트위터에 올린 글엔 흥분이 고스란히 묻어났다. 다음날인 5일 오후 1시, 전세계는 불 꺼진 기자회견장을 인터넷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몽환적인 음악을 타고 어둠 속에서 눈을 반짝이며 등장한 건 손정의 회장도, 사회자도 아니었다. 초등학생만 한 몸집의 로봇이었다. 이 로봇은 한동안 호기심 어린 눈으로 무대를 돌아다니며 관객을 둘러봤다. 그때 어둠 속에서 손정의 회장이 홀연히 등장했다. 손 회장은 주머니에서 빨간 하트를 꺼내 로봇 손에 쥐어주었다. 로봇이 하트를 가슴에 달린 화면에 댔다. 심장박동이 시작됐다. 손 회장이 입을 뗐다. “세계 최초로 감정을 가진 로봇을 여러분께 소개합니다. 이름은 ‘페퍼’입니다.”
로봇이 인간에게 성큼 다가왔다. ‘공상과학 영화에서나 봤던 로봇’이란 식상한 수사학을 되풀이하려는 건 아니다. 15년 전인 1999년, 소니는 이미 로봇 강아지 ‘아이보’를 사람 품에 안겼다. 이듬해엔 혼다가 세계 처음으로 두 발로 걷는 인간형 로봇 ‘아시모’를 공개했다. 동글납작한 청소로봇은 우리 집안을 휘젓는 친숙한 식구다. 로봇 따위,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은 대상이다.
그렇지만 로봇은 지금까지 ‘그들만의 피조물’이었다. 소니 아이보는 장난감 강아지에 가까웠고, 아시모는 혼다 전시관이나 로봇 박람회에서나 만나는 ‘연예인’일 뿐이었다. 청소로봇? 우리에겐 로봇‘청소기’이지, ‘로봇’청소기는 아니잖은가.
페퍼 역시 아직은 어리숙해 보이는 기계덩어리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두 다리로 걷는 대신 바퀴로 움직였고, 가슴에 큰 태블릿 화면을 단 모습이 우스꽝스러웠다. 그럼에도 손 회장은 한껏 고무돼 있었다. 페퍼는 다른 로봇과 조금 달랐기 때문이다.
페퍼는 잔디를 깎지도, 설거지나 청소를 돕지도 않는다. 처음부터 그런 용도를 염두에 두고 만들지도 않았다. 페퍼는 사람의 감정을 읽고 반응하는 인공지능 로봇이다. 손정의 회장은 2012년 1억달러에 프랑스 로봇 기업 알데바란 지분 80%를 사들인 뒤, ‘감정로봇’ 개발에 수백억원을 더 쏟아부었다. 그렇게 낳은 첫아이가 페퍼다.
클라우드와 인공지능(AI)은 페퍼를 움직이는 핵심 기술이다. 페퍼는 스스로 배우고 익히는 로봇이다. 사람과 대화하고 소통하며 수집한 감정을 디지털 정보로 저장한다. 가정이나 사무실에 입양된 여러 ‘페퍼들’은 이렇게 모으고 학습한 정보를 클라우드 서버로 모은 뒤, 다시 각 페퍼에게 전달한다. 이런 식의 ‘집단지성’은 시간이 지날수록 페퍼를 똑똑하게 만든다. 정이 깊어질수록 페퍼는 어떤 상황에서 아이가 웃고 즐거워하는지 더 잘 알게 된다. 책을 읽어줄 때보다 춤을 출 때 아이가 더 크게 웃는다면, 다음부터 페퍼는 아이 앞에서 더 열심히 춤을 출 것이다.
더 놀라운 건, 몇 달 안에 이 감정로봇을 우리 집안에 들여놓을 수 있다는 점이다. 소프트뱅크는 2015년 2월부터 페퍼를 시판한다. 가격은 19만8천엔. 우리돈 200만원으로 키 120cm에 몸무게 28kg, 영어·일본어·프랑스어·스페인어를 자유자재로 쓰는 로봇 친구를 입양할 수 있다.
손정의 회장은 로봇에 대한 인간의 오랜 꿈에서 페퍼의 모습을 찾았다고 했다. 그는 ‘왜 휴머노이드를 만들었나’란 질문에 “사람들은 인간을 닮은 로봇에 가장 쉽게 다가가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우주소년 아톰’을 예로 들기도 했다. ‘감정’이 로봇의 핵심이란 뜻이다. 그는 또 “당장 이익을 내는 것보다, 사람들이 지불할 수 있는 가격에 페퍼를 내놓고 싶었다”고 말했다.
거실에 있는 페퍼에게 오늘 일정이나 맛있는 음식점의 위치를 물어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페퍼는 다른 것에 더 어울려 보인다. 퇴근 뒤 거실에 앉아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고, 아이들과 웃고 떠들며 놀게 하고, 힘들고 괴로운 일을 털어놓고 마음의 치유를 받는 친구. 로봇은 생각보다 우리 인간에게 훨씬 바짝 다가와 있다. 의 로이나 의 써니는 당분간 더 기다려야 하겠지만.
이희욱 기자 asadal@bloter.net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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