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인류의 가치를 높이는 ‘진짜기술’

생명빨대, Q드럼 등 ‘소외된 90%’를 위한 세계의 적정기술들… ‘차드 프로젝트’ ‘G세이버’등 국내서도 성과 나와
등록 2013-11-16 12:52 수정 2020-05-03 04:27
1

1

정보기술(IT)이 세상을 이롭게 한다고들 말한다. 정말 그럴까. “부유한 10%를 위해 공학설계자의 90%가 일하고 있다.” 을 쓴 폴 폴락의 일갈이다. IT나 과학기술은 정말 전세계 90%에겐 남의 떡에 불과할까.

폴 폴락은 이 ‘소외된 90%’를 보듬고 싶었다. 그는 국제산업증진기관(IDE)이란 비영리단체를 만들고, 이들을 위한 공학설계를 주창했다. 경제학자 E. F. 슈마허는 폴락의 뜻을 이었다. 그는 책 에서 소외층을 위한 공학설계 기술을 ‘중간기술’(Intermediate Technology)이라고 정의했다. 이 중간기술이 발전한 개념이 ‘적정기술’(Appropriate Technology)이다.

어떻게 기술이 소외된 90%를 위해 복무할 수 있을까. 이런 식이다. 아프리카 지역 신생아 5명 가운데 1명은 태어난 지 5분이 채 안 돼 삶을 마감한다. 콜레라와 이질 같은 수인성 질병이 주된 원인이다. 덴마크 디자이너 프란젠과 네덜란드 플뢰렌은 이 문제를 풀 방법을 고심했고, ‘생명빨대’(LifeStraw·사진)를 고안해냈다. 생명빨대는 겉으로만 좀 두꺼울 뿐 여느 빨대와 다를 바 없어 보인다. 이 빨대 안엔 15미크론 이상의 입자를 제거해주는 필터를 내장했다. 물이 부족한 아프리카에서 땅에 고인 더러운 물도 마실 수 있도록 고안됐다.

‘Q드럼’도 비슷한 고민이 낳은 물건이다. 아프리카 지역에는 물 한 동이를 긷기 위해 멀리 떨어진 식수원까지 한나절을 오가야 하는 주민이 적잖다. Q드럼은 평범한 물통이지만 원주 모양으로 만들어졌다. 식수원까지 오가는 아프리카 주민들이 물을 담아 굴려 운반할 수 있게 고안됐다. 한번에 75ℓ까지 물을 담을 수 있다. Q드럼은 현재 케냐와 나미비아, 에티오피아와 나이지리아 지역에 널리 보급돼 있다.

적정기술은 이처럼 많은 돈을 들이지 않고, 에너지 사용도 적으며, 누구나 쉽게 배워 쓸 수 있는 공학설계 기법이다. 자원이 부족한 저개발국가에 유용한 기술인 만큼, 되도록 현지 재료를 쓰고 적은 수의 사람들이 생산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대량생산과 전문화로 대변되는 자본주의의 흐름 대신 현지 환경에 맞는 소규모 생산을 중요시하는 대안 기술이자 문화인 것이다.

영미권이나 유럽 지역에서는 1970년대부터 적정기술에 관심을 갖고 활발한 연구활동을 벌이고 있다. 오스트레일리아는 1980년부터 적정기술센터(CAT)를 만들고 다양한 프로젝트를 꾸준히 진행해왔다. 2007년 5월에는 미국 뉴욕 쿠퍼휴잇박물관에서 ‘소외된 90%를 위한 디자인’을 주제로 국제 전시회도 열었다.

한국은 아직 걸음마 단계다. 2008년께 적정기술이 국내에 처음 소개된 뒤 몇몇 과학기술자 모임과 대학을 중심으로 공학설계 연구와 토론 움직임이 싹트는 모양새다. 한밭대학교 적정기술연구소, 서울 지역 교수들을 중심으로 운영되는 국경없는과학기술연구회, 대전 지역 과학자들 모임인 나눔과기술, 한동대 공학교육혁신센터 등이 대표적 사례다. 경남 산청에 자리잡은 대안기술센터는 귀농인을 중심으로 대안기술과 대안농업 사례를 적정기술과 접목해 연구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

조금씩 성과도 나오는 중이다. 특허청은 굿네이버스, 나눔과기술 등과 손잡고 ‘차드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땔감이 부족한 아프리카 차드 지역에 현지 사탕수수로 만든 친환경 숯을 보급하는 사업이다. 굿네이버스는 ‘씨앗 프로젝트’의 첫 작품으로 ‘G세이버’란 축열난방기를 개발해 몽골 지역에 보급했다. 진흙과 맥반석 등으로 속을 채우고 열 전달이 잘되도록 설계된 G세이버는 영하 40℃가 넘는 혹한에서 ‘게르’에 의지해 1년의 절반을 보내는 몽골 지역 주민에겐 더없는 혜택이다.

적정기술은 정보통신기술(ICT)이나 공학인들이 주축이 돼 사회 전반으로 관심의 영역을 넓혀나가는 추세다. 대단찮은 기술로 보일지도 모르겠다. 혜택받는 10%를 위한 기술만이 위대해 보이는가. 현지에 뛰어들어 소외된 90%를 데우는 진짜 기술로 눈을 돌려볼 때다.

이희욱 기자 asadal@bloter.net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