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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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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권은 유한하고 모피아는 영원하다

MB 정권 초기 숨죽이다 화려한 부활… 친서민 행보 계기 ‘관치 기술자’ 득세
등록 2009-11-25 15:55 수정 2020-05-03 04:25

지난 11월13일 이명박 대통령은 차관급 인사를 단행했다. 이 대통령은 금융위원회 부위원장에 권혁세 금융위 사무처장을 내정했다. 내년 서울에서 열리는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 준비위원회 기획조정단장으로 내정된 이창용 금융위 부위원장의 후임이었다. 이번 인사는 이명박 정부가 금융위에 민간 출신을 파격 기용했던 ‘민간인 실험’의 종언을 의미한다. ‘전광우-이창용’ 민간 투톱 체제로 출범했던 금융위는 ‘모피아’들이 접수했다.

이명박 대통령이 9월17일 오후 서울 종로구 청진동 소액서민금융재단에서 열린 제31차 비상경제대책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왼쪽부터 윤증현 기획재정부 장관, 이 대통령, 김성조 한나라당 정책위의장, 강만수 경제특보. 한겨레 김종수 기자

이명박 대통령이 9월17일 오후 서울 종로구 청진동 소액서민금융재단에서 열린 제31차 비상경제대책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왼쪽부터 윤증현 기획재정부 장관, 이 대통령, 김성조 한나라당 정책위의장, 강만수 경제특보. 한겨레 김종수 기자

1년 만에 상황 반전 경제팀 장악

이명박 정부는 지난해 3월 금융감독위원회를 금융위원회로 확대 개편했다. 당시 재정경제부의 금융정책 기능을 떼어내 금융위로 넘겼다. 관료 출신이 장악했던 금융감독위를 금융위원회로 확대·신설하면서 그 첫 수장으로 전광우 딜로이트컨설팅 회장을 내정한 데 이어, 금융위 부위원장마저 민간 출신인 이창용 서울대 교수를 임명했다. 이 대통령이 민간 출신을 두 명이나 금융위 고위직에 배치한 이유는 대대적인 규제완화와 관료사회의 혁신을 단행하려는 의도였다.

이명박 대통령은 집권 초기 경제관료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이 대통령은 지난해 3월 국무회의에서 “기획재정부에 조직을 슬림하게 개편을 하라니까 태스크포스를 만들어 잉여인력을 한방에 모아놨다. 이렇게 하니까 모피아라는 말을 듣는 것”이라며 경제관료를 정면으로 비판했다. 이어 이 대통령은 금융위 업무보고 자리에서도 “산업은행장은 자신을 ’총재’로 부르는데 스스로 부끄러움을 느껴야 한다”며 직격탄을 날렸다.

모피아는 옛 재무부 이재국 및 그 후신인 재정경제원과 재정경제부의 금융정책실(국) 출신 관료를 일컫는 은어로, 옛 재무부의 영문약자인 MOF(Ministry of Finance)와 마피아(Mafia)의 합성어다. 인맥으로 뭉쳐 서로 밀어주고 끌어주며 정부의 핵심 요직 자리를 장악하는 행태가 마치 조직폭력배 마피아와 같다고 해서 나온 말이다. 모피아 가운데 핵심은 금정(금융정책) 라인이다. 역대 경제부총리와 장관 중 상당수가 금정 라인 출신일 정도로 막강한 파워를 자랑했다.

정권 초기 모피아들은 ‘친시장·작은 정부’ 기치를 내건 MB노믹스의 위세에 숨죽이고 있어야 했다. 금융위원장 자리를 민간 출신에게 빼앗기는 수모까지 당했다.

하지만 곧바로 상황은 반전된다. 이명박 대통령이 180도로 변했기 때문이다. 지난해 봄을 뜨겁게 달궜던 촛불집회를 거치면서 위기관리에 강하고 현실적인 관료들에 사로잡혀버린 것이다. 이 대통령은 지난해 6월 고위공직자와의 대화에서 “공무원은 개혁의 대상이 아닌 주체다. 위축되거나 불안해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며 공무원에 화해의 메시지를 던졌다.

윤증현·윤진식·진동수 막강 라인

개혁 저항세력으로 치부되던 모피아들의 부활에는 초유의 경제위기도 한몫 했다. 위기 관리 능력이 절실해면서 관료들에게 더 손을 내밀게 된 것이다. 민간 주도 시장경제를 부르짖던 이명박 정부 초기 모습이 무색할 지경이다.

올해 1월19일 단행된 개각에서부터 모피아들은 화려하게 부활한다. 이명박 정부 2기 경제팀은 모피아로 진영이 짜였다. 기획재정부 장관에 윤증현 전 금융감독위원장(행시 10회)이, 청와대 경제수석에 윤진식 전 산업자원부 장관(12회)이, 금융위원장에 진동수 전 재정경제부 차관(17회)이 임명됐다. 세 사람 모두 옛 재무부 출신이다. 윤 장관과 윤 수석은 모두 모피아의 꽃으로 불리는 재무부 금융정책과장을 거쳤고, 진 위원장은 재무부 산업금융과장과 청와대 금융비서관을 지냈다. 금융위원장 자리는 1년도 채 못 돼 민간 출신에서 모피아로 넘어갔다.

모피아들은 상명하복의 사고가 강한 최고경영자(CEO) 출신 대통령의 의중을 읽고 업무를 추진하는 뛰어난 실무능력을 갖추고 있다. 또 모피아들은 다양한 인맥과 일사불란한 팀워크가 강점이다. 집권 초 모피아로 대변되는 재무부 출신 경제관료에 노골적인 반감을 드러냈던 이 대통령이 이들을 중용하는 속마음은 이런 현실적인 판단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지난 8월31일 출범한 3기 경제팀은 모피아들의 입지가 더욱 공고해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윤진식 청와대 경제수석이 정책실장을 겸임하고 강만수 국가경쟁력강화위원장이 경제특보로 임명됐다. 윤 수석은 경제정책뿐만 아니라 국가 정책 전반을 총괄하고 조정하는 역할을 맡는 등 한층 권한이 강화됐다. 노동부 장관으로 임명된 임태희 한나라당 의원 역시 재무부 금융정책과를 거쳤다.

모피아의 부활은 관료뿐만 아니라 산하기관 단체장까지 아우른다. 공석이 된 금융 공기업 수장 자리에 연이어 모피아들이 낙하산을 타고 내려갔다. 지난 10월 초대 한국정책금융공사 사장에 유재한 한나라당 정책실장이 임명됐고, 앞서 한국투자공사 사장 자리엔 진영욱 전 한화손해보험 부회장이 앉았다. 두 사람 모두 재정경제부에서 금융정책과장을 지냈다.

모피아들은 실무에 밝고 철저히 현실지향적인 조직문화를 갖고 있다. 집행 중심의 조직 특성상 과감한 결정과 이에 따르는 신속한 집행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단점도 있다. 정책의 큰 그림을 그리는 데는 약하다는 비판을 받는다.

반면 옛 경제기획원(EPB)은 거시경제를 다루며 경제계획 등 큰 밑그림을 그리는 부서였다. 때문에 창의적인 조직 문화를 갖고 있었다. 이런 이유로 참여정부 후반에는 경제기획원 출신들이 득세했다. 모피아 출신 재정경제부 장관은 김진표 민주당 의원과 이헌재씨가 전부였다. 한덕수·권오규 재정경제부 장관을 비롯해 변양균·김병일·박봉흠 기획예산처 장관 등은 모두 경제기획원 출신이었다. 참여정부가 집권 초 제시한 ‘동북아 중심 국가론’ 등 미래 전략들이 현 정부 들어 좀처럼 나오지 않는 것도 이같은 맥락이다.

전횡 막으려면 시스템을 통한 정책 필요

모피아들은 정권이 바뀌어도 승승장구한다. 참여정부에서 밀려난 재무부 출신들이 정권 교체를 위해 대통령 선거에 뛰어들기도 했다. 대통령 선거가 한창이던 2007년 10월 윤진식 경제수석이 ‘경제 살리기 특별위원회’ 부위원장을 맡으며 이명박 선거캠프에 들어갔다. 철저히 현실지향적인 모습이다.

윤증현 장관도 참여정부에서 금융감독위원장을 맡았다. 진동수 금융위원장은 참여정부에서 차관까지 지냈다. 이들은 노무현 정부가 추진한 금산 분리, 대북 지원 등의 정책에 반대하며 자신의 소신을 밀어붙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정권 교체를 예상하고 차기 정권에 코드를 맞췄다는 비판도 파다하다.

앞으로 ‘모피아 전성시대’는 더욱 번창할 전망이다. 이명박 대통령이 정치적 지지 기반을 넓히기 위한 친서민 행보에 나설수록 관료들의 힘이 더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선 민간을 다룰 줄 아는 관치 기술자인 모피아들이 필요하다.

전성인 홍익대 교수(경제학)는 “친서민 행보는 불가피하게 민간에 대한 정부의 개입 확대를 불러오게 된다. 이럴 경우 모피아의 도움이 필요할 수밖에 없다. 모피아의 전횡을 막으려면 시스템과 제도를 통한 정책을 진행해야 한다. 또 일상의 경제 운영은 모피아와 같은 관료들에게 맡기더라도, 개혁 과제는 외부에서 수혈한 교수 집단 등을 통해 진행해야 한다”고 말했다.

정혁준 기자 jun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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