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 3월9일, 서울 망원동 연립주택 지하방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아버지는 경비원, 어머니는 파출부 일을 나갔고 방엔 5살, 3살 남매만 있었다. 사람들은 발을 동동 굴렀지만, 방문은 안에서 잠겨 있었다. 아이들은 손톱으로 문을 긁어대다 옷더미에 코를 박고 숨을 거뒀다. 영철·혜영 두 남매의 사연은 가수 정태춘의 구슬픈 읊조림으로 우리 가슴을 그을렸다.
가난이 남긴 상흔은 비단 우리네 달동네만 할퀸 건 아니었다. 첨단 기술로 방화벽을 두른 지금도 가난은 지구촌 곳곳에서 비슷한 모습으로 변주된다. 화마는 삶을 송두리째 태운다. 도시 빈민가부터 저개발국가 외딴 마을까지 예외 없다.
2013년, 남아프리카 케이프타운 카엘리차 마을에서 큰 화재가 발생했다. 수백 가구가 잿더미로 변했고, 주민 5천 명이 터전을 잃었다. 참혹한 건, 이런 일이 아프리카에선 일상적인 위협이란 점이다. 남아프리카 슬럼가엔 지금도 190만 가구가 화재 위협과 더불어 오밀조밀 웅크려 살고 있다. 날씨는 건조하고, 사람들은 집 안에서 불을 지펴 음식을 만든다. 첨단 소화 장치는 이들에게 사치다. 누구든 카엘리차의 운명이 될 수 있다.
케이프타운대학 강사와 학생 6명은 이들의 위태로운 현실에 눈을 돌렸다. 이들은 지역 환경에 맞게 값싸고 쓰기 쉬운 화재경보기를 만들어 보급하기로 뜻을 모았다. 이렇게 출범한 대학 프로젝트는 어엿한 스타트업의 모습을 갖췄다. ‘룸카니’ 얘기다.
룸카니는 화재경보기다. 화재를 진압하려고 만든 물건은 아니다. 조기 경보를 울려서 주민들 목숨과 재산을 하나라도 더 구해보자는 생각에서 출발했다. 까닭이 있다. 아프리카에선 이웃집에 불이 났는데도 이를 모르고 있거나 너무 늦게 알아채 재산이나 인명 피해를 입는 일이 허다한 탓이다. 제품명 ‘룸카니’는 코사어로 ‘조심하세요’란 뜻이다.
대개 화재경보기는 연기로 화재 여부를 감지하도록 설계돼 있다. 룸카니는 방의 온도 변화를 인식해 화재 여부를 판단한다. 아프리카 판자촌에선 임시 거주지에서 요리를 하면서 연기가 나는 일이 흔하기 때문이다.
생김새는 단순하다. 손바닥만 한 네모 박스 모양이 전부다. 본체는 방열 처리된 플라스틱으로 제작했다. 위성항법장치(GPS) 칩셋과 경보용 스피커를 내장했고, 경보음을 끄거나 배터리 상태를 확인하는 버튼도 달려 있다. 전력 소비량도 적다. AA 배터리 하나로 1~2년은 너끈히 작동한다. 경보기끼리는 라디오 주파수(RF)로 정보를 주고받는다. 통신 거리는 최대 60m다. 1개당 가격은 8.3달러, 우리돈 9300원 수준이다.
사용법도 쉽다. 화재경보기를 되도록 주방과 멀리 떨어진 곳, 되도록 높은 곳에 달아두기만 하면 준비는 끝난다. 짧은 시간에 온도가 급상승하면 룸카니는 이를 화재로 인식하고 곧바로 경보를 울린다. 여기까지는 여느 화재경보기와 다를 바 없다. 룸카니는 주변 기기와 연동될 때 진가를 발휘한다. 집주인이 20초 안에 경보를 끄지 않으면, 반경 60m에 있는 기기가 일제히 경보를 울려 마을 전체에 경고를 보낸다. 경보를 들은 주민들은 힘을 모아 화재를 초기 진압하거나, 여의치 않으면 신속히 대피하면 된다.
룸카니는 문자메시지와 GPS 위치 정보도 이웃들과 인근 소방서에 전송한다. 소방수는 화재 신고 없이도 이 위치 정보를 보고 정확한 발화 장소를 찾아 신속히 초기 진압할 수 있다. 첨단 센서와 칩셋 기술로 무장한 화재경보기가 널린 요즘, 룸카니는 기술보다 끈끈한 ‘공동체의 연대’로 안전을 도모하려는 모습이다.
룸카니 화재경보기는 남아프리카 5개 마을, 1700여 가구에 3500여 개가 우선 보급됐다. 8월 초엔 크라우드펀딩 서비스 ‘인디고고’에서 1억여원을 펀딩하는 데 성공하기도 했다. 다음 제품엔 지역 응급서비스를 곧바로 호출할 수 있는 기능도 덧붙일 예정이다.
이희욱 기자 asadal@bloter.net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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