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플론티스 포파이아 빌라의 케이크를 묘사한 로마시대 프레스코화. 위키미디어
왜 또 저를 찾아오셨죠? 지겹지도 않으십니까. 이제 혁명이 불가능하다는 것쯤은 아시잖아요. 인간병기로 훈련받던 과거는 잊었습니다. 최단시간에 상대의 목을 꺾거나 눈알을 파내거나 사제폭탄을 만드는 법 따위는 제가 사람으로 살아가는 데 아무 도움도 되지 않더군요. 저는 이제 이 소도시에서 잔뿌리를 내리고 조용히 살아갈 겁니다. 달팽이처럼 귀여운 집을 구해서 부지런히 쓸고 닦을 겁니다. 믿을 수 있는 친구를 사귀고 솜털 같은 잔정을 붙일 겁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부대끼며 어린 자식의 머리를 감겨줄 겁니다. 상처받으면 혼자 신음하는 대신 연인에게 안아달라고 앙탈을 부릴 겁니다. 이웃 사람을 만나면 “같이 밥 먹을까? 맛있는 데 아는데”라고 말을 건넬 겁니다. 비겁하다고요? 그래요, 비겁하겠지요. 이 더러운 세상에서 자기만의 안온한 일상을 누리려는 것 자체가 비겁한 일이겠지요. 그러나 그렇게 꾸준히 일상을 적립해가다보면 점차 비겁하다는 느낌마저 휘발되겠지요. 변절자라고 욕해도 좋습니다. 전 제 인생이 소중합니다.
일신의 행복만 생각하는군. 조직은 잊었나?
인간의 온기조차 나눌 수 없었던 지하 점조직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아니면 신흥종교 단체로 위장한 대중조직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것도 아니라면, 저희가 속해 있던 노조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조직만이 희망이라고요? 노조 간부들이 얼마나 자주 사주 쪽과 투뿔한우생등심집을 드나드는지 아시지 않습니까. 귀족 노조란 말을 들어보셨겠지요. 이미 이익단체에 불과하지 않습니까. 대의의 깃발 아래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챙길 뿐이에요. 입으로야 무슨 말을 못하나요. 현실 속에서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자기 자식놈들에게 도움이 될 법한 일만 하지 않습니까. 이제는 도대체 어떤 조직적 운동이 가능한지 모르겠어요. 새벽배송에 저항하던 한반도택배연대가 이 시대 마지막 참노조였을 거예요. 사람들이 쓰러져나가던 그때가 오히려 태평성대처럼 느껴지네요. 지금은 인공지능을 탑재한 로봇이 새벽배송을 대신 하고 있잖아요. 대중은 업그레이드된 로봇이 등장하면 환호할 뿐, 아무것도 비판하지 않아요.
그래도 비판적 의식으로 무장된 소수정예가 남아 있네.
혹시 자칭 비판적 지식인을 말씀하시려는 건가요? 아니면 지하 사령부를 말씀하시는가요? 하.하.하.하.개.새.끼.들. 입으로는 무슨 말을 못하겠어요. 올바른 말을 부귀영화의 도구로 삼는 새끼들. 전 더 이상 그 새끼들의 가스라이팅에 넘어가 자본주의의 고기방패로 살 수는 없어요. 그러기엔 이미 늦었다고요? 그걸 제가 모르겠어요? 그러나 어쩌겠어요. 범사에 감사하고, 매 순간 행복을 감각해야죠. 이 참혹한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이 미친 세상에서 덩달아 미치지 않기 위해서는, 후벼 파는 고통을 소소한 근심으로 바꾸기 위해서는, 별수 없어요. 정신승리 만세!
그래, 인정하지. 우린 실패했네. 진보를 가로막는 저 높은 장벽을 넘어서려는 우리의 시도는 매번 실패했네. 아직 더 많은 도전과 실패가 필요하다고 말하기 위해 새삼 자네를 찾은 건 아닐세. 그렇다고 자네의 푸념을 들어주러 온 것도 아닐세. 그런 푸석푸석한 푸념 따위는 새 세상이 찾아온 뒤 회고담으로나 들어주지. 자네 말대로 이제 혁명 같은 건 가능하지 않아. 그걸 모르는 바보가 어디 있겠나. 그렇다고 그런 진부한 진실을 새삼 들먹이는 것은 사춘기 소년들이나 할 짓이지. 혁명의 시기가 다시 무르익을 때까지 약자들끼리 연대해야 한다는 당연한 말을 하자는 것도 아닐세. 그 역시 혁명만큼이나 자주 반복돼온 이야기니까. 진부한 혁명의 멜랑콜리나 약자 연대를 말하기 위해 오늘 이곳에 온 것은 아닐세.
그럼 이만 꺼져주시죠. 제 일상을 파괴하는 건 용납하지 않겠습니다.
조용한 일상을 살겠다면서 여전히 화가 많이 나 있군. 나는 그 분노가 좋아. 분노는 우울과는 다르지. 분노는 잠든 영혼을 깨우는 뜨거운 커피일세. 그래, 우리는 고통받고 있네. 그 고통에는 이유가 있지. 그리고 그 이유는 반드시 제거돼야 하네. 그러려면 인간을 더욱 깊이 이해해야 해. 과거에 우리는 사회적 실천뿐 아니라 인간적 이해도 부족했어. 금과옥조처럼 받들었던 혁명이론은 사회 분석에는 적절했는지는 모르지만, 그 사회를 이루는 인간을 이해하는 데는 미흡했어. 인간을 이해하려면 인간성을 직면해야 해. 인간성을 직면하면 절망에 눈이 멀어버려. 자기 눈을 찌르고 싶어져. 인간을 아직 보지 않은 눈동자를 이식하고 싶어져. 우리는 절망이 두려워서 인간을 오해했고, 그 오해를 가지고 거짓 희망을 창조했지. 그런 과오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는, 피눈물이 나도 인간의 실상을 직면해야 하네.
인간은 결국 욕망덩어리지. 인간의 욕망을 경시하는 그 어떤 혁명도 성공할 수 없어. 그렇게 벌거벗은 인간성을 직면한 끝에 나는 마침내 발견했네, 저 독재자를 제거할 수 있는 확실한 방법을. 이제 한 명의 의인(義人)만 있다면, 우리는 적의 심장을 도려낼 수 있네. 모든 것이 불가능해 보이던 시절마다 고독한 의인이 있지 않았나. 그들은 차가운 사제폭탄을 바바리코트 안 주머니에 넣고 적에게 그림자처럼 접근했지. 투포환 던지듯 도시락 폭탄을 던져서 독재자의 기름진 머리통을 날려버렸지. 이 모든 시도는 중국 전국시대 자객 형가(荊軻)에게서 비롯됐네. 당시 진(秦)나라의 기세는 파죽지세였고, 희대의 독재자 진시황제가 조만간 등장할 참이었어. 오늘날이 난세라고 하지만 그 시절보다 더 난세겠나. 그때는 산 사람을 토막 낸 뒤 변소에 던져넣던 시대일세. 그럼에도 형가는 진나라 왕의 목을 노렸던 거야. 우리에게도 형가 같은 의인이 필요하네. 바로 자네가 이 시대의 형가일세.

중국 전국시대 연나라의 협객 형가. 위키미디어
형가는 결국 암살에 실패하고 비참한 최후를 맞지 않습니까. 저에게 실패를 권하러 왔습니까?
그렇지. 형가는 실패했지. 겹겹이 에워싼 호위병들의 칼날에 도륙되고 말았지. 오늘날 상황은 그때보다 더 엄혹하지. 안중근 의사처럼 의거에 성공하리란 보장은 어디에도 없네. 그 어느 때보다 더 철통같은 경비가 독재자를 에워싸고 있지 않은가. 그뿐인가. 오늘날 독재자는 국민의 절대적 지지까지 받고 있어. 혈통이 아니라 선거를 통해 집권했으니까! 민주적으로 선출됐으니까! 늘 자신보다 더 나쁜 놈을 찾아내는 데 재능이 있으니까! ‘나는 저놈보다는 덜 나쁘다’가 시대정신이 되었으니까! 연예인이 되었으니까! 셀럽이 되었으니까! 국민은 독재자를 핥기 바쁘니까! 마침내 개가 되었으니까! 애완견이 되었으니까! 돼지가 되었으니까! 애완돼지가 되었으니까! 이제 불가능한 것은 혁명만이 아닐세. 암살도 불가능하네. 옛날처럼 독재자에게 다가가서 칼을 휘두를 수 있을까. 경호는 철통같고, 경호 밖에는 팬들로 가득한데? 여간해서는 접근조차 불가능하다네. 그러나 자네는 해낼 수 있네, 자네만큼은 독재자의 근접거리에 들어갈 수 있네. 이 모든 것이 바로 자네 증조부 오삼계님의 은덕일세. 다가오는 광복절에 그간 잊힌 순국선열들에 대한 표창이 있을 걸세. 마지막 광복군으로 불리는 자네 증조부에게 수여되는 표창, 그 표창을 받기 위해 자네는 기념식에 가게 될 거야. 그리고 기념식 직후 다른 독립투사 후손들과 함께 독재자와 오찬을 나누게 될 걸세. 바로 그때가 절호의 기회일세.
오찬장에 가면 뭐 합니까. 입장하기 전에 온몸을 샅샅이 수색당할 거고, 현장에는 경호원이 득실거릴 텐데요. 제가 아무리 인간병기로 훈련받았다고 한들, 맨손으로 그 많은 인원의 모가지를 뽑을 수는 없어요.
물론 그 오찬장에서 무력으로 상대를 제압할 방법은 없네. 그러나 자네는 증조부 오삼계님의 후손임을 명심하게. 오삼계님은 최근에야 조명되기 시작했지. 지금까지 독립운동사 연구는 무장투쟁이라는 하드파워에 집중한 나머지, 자네 증조부 같은 소프트파워 전문가에게는 주목하지 못했어. 새로운 자료의 발굴과 참신한 시각을 통해 드디어 그간 그늘 속에 묻혀 있던 독립투사들을 발굴할 수 있었다네.
자, 이 사진을 보게. 오래된 흑백사진 속에 한 남자가 초연히 서 있네. 날렵한 체구, 낭창낭창한 팔, 낮은 자세. 언제고 땅에 바짝 엎드리겠다는 듯, 그의 시선은 늘 아래를 향해 있지. 그가 서 있는 이곳은 전설적인 아부 전문가였던 자네 증조부 오삼계님이 살았던 만주의 고택 ‘아부다비’(阿附茶毘)일세. 그리고 그곳에 서 있는 이는 자기 아버지로부터 아부 테크닉을 전수한 자네의 조부 오골계님이지. 그가 서 있는 아부다비는 단순한 시골집이 아니라, 동아시아 아부의 심장이었네.
자네 조상은 부당한 대우를 받아왔어. 오랫동안 이 사회는 아부 전문가를 경멸해왔거든. 아부 전문가를 경멸함으로써 자신들도 아부한다는 사실을 숨기려 했지. 아부 전문가를 저열한 인간으로 취급해서 자신들이야말로 진짜 저열한 인간이란 사실을 숨기려 했지. 그러나 아부 없이 살 수 있는 인간이 어디 있겠나. 인간은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늘 아부를 일삼네. 긍정하는 답변, 인정하는 목례, 수긍하는 눈빛, 이 모든 것이 사실 아부일세. 상대의 전두엽을 살살 핥아주는 행위지. 그래야 더불어 살 수 있으니까. 그래야 사회가 유지되니까. 대체 저건 뭘까, 싶은 인간에게도 사람들은 직언이 아니라 아부를 하지. 그뿐인가. 사람들은 사는 게 지루해서 아부를 원하기도 하지. 인간은 결국 사회적 동물이야. 사회적 동물이란 아부적 동물이란 뜻이지. 사회적 동물로서 아부를 못하면, 그건 인간으로서 배임죄야.
살아가기 위해 누구나 할 수밖에 없는 아부를 가지고 비난하면 되나. 그것은 인간이 밥을 먹는다고 비난하는 일이나 같네. 인간이 똥을 눈다고 비난하는 일이나 같네. 똥을 안 누고 사는 인간이 어디 있나. 똥을 누었다고 고해성사할 필요는 없지 않나. “흑흑, 신부님. 저는 매일 아침 똥을 누는 죄를 저질렀습니다”라고 흐느낄 텐가. 똥을 화장실에서 누면 괜찮듯이, 아부를 적재적소에 하면 괜찮아. 황금똥을 누면 괜찮듯이, 황금 같은 아부를 하면 괜찮아. 적재적소에 아부를 하느냐, 그리고 어떤 수준의 아부를 하느냐가 관건일 뿐.
최고의 아부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야. 그런 건 노력만으로는 되지 않는다. 타고난 자질이 있어야 해. 자네 조상은 노력과 자질을 겸비한 분들이었어. 그럼에도 세상의 경멸을 피할 수 없었지. 아부 전문가가 뭔가 성취할 때마다, 사람들은 시샘에 못 이겨서 말했어, 저건 노력이 아니라 아부로 이루어낸 거다! 천만에. 아부에도 노력이 필요하거든. 인생의 패배자들은 대쪽 같은 선비정신 어쩌고 하면서, 아부 전문가들을 탄압했다. 자신들이야말로 일상적으로 저질 아부를 일삼으면서 전문가를 욕하기 바빴지. 아부 전문가를 경멸하는 놈들이야말로 경멸받아 마땅해. 그런 억압적인 분위기 속에서 아부 전문가의 성취는 가려졌고 그들은 결국 섬처럼 고립됐다. 아부 전문가의 독립운동 행적이 오랫동안 인정받지 못한 데는 다 이런 배경이 있어.
그 결과, 세상에는 저질 아부만이 만연하게 되었다. 그래도 참아부의 불꽃은 꺼지지 않았지. 오삼계님이 세운 아부다비야말로 한반도의 아부 전문가들이 모여든 피난처였다. 오삼계님은 제자들에게 세상의 빛과 설탕이 되라 가르쳤고, 제자들은 다음과 같은 아부의 기본기를 잊지 않았어. 첫째, 악수할 때도 늘 허리를 굽힌다. 허리 디스크가 있어도 상관없다. 둘째, 틈만 나면 큰절을 시도한다. 아스팔트라도 상관없다. 셋째, 시선은 항상 약간 아래를 향한다, 떨어진 지폐를 줍는다는 느낌으로. 넷째, 약간 뒤처져서 걷는다, 짐을 이고 가는 노비처럼. 다섯째, 상대방이 의사표현을 하면 “그러고 말곱쇼”라고 대답한다. 여섯째, 필요하면 언제든 즙을 짠다. “흑흑, 정말 감동했어요.” 일곱째, 거짓말은 대화의 비타민이다. 체중계처럼 곧이곧대로 진실을 말하면 안 된다.
자네 증조부 오삼계님은 아부의 도(道)를 추구한 인물이었다. 아부 테크닉에 그치지 않고 테크닉에 깃든 정신을 설파했지. 오삼계님은 온갖 아부 테크닉의 핵심은 결국 “당신 말이 맞다”고 인정해주는 것임을 밝혀냈어. 식색(食色)의 욕구를 채우고 나면 인정욕을 채우려 드는 게 인간이지. 인정욕구에 시달리는 인간에게, 당신 말이 맞다고 해주는 걸세. 가장 간단하고 확실한 아부지. 걱정 마, 그 아부에는 어떤 진심도 담겨 있지 않아. 오죽하면 오삼계님이 “아부는 궁극의 겉절이다”라고 했을까. 오삼계님은 진심이나 진정성 같은 단어를 싫어하셨어. 진정성이 아니라 이런 철학이 필요하다고 했지. “칭찬은 정신적 뇌물이다!” 실로 오삼계님의 아부는 철학 있는 아부였어. 철학이 있는 아부는 보법부터 달라. 서양중심주의에 빠져 있는 상대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달걀 반숙을 “에그 미디엄 레어”라고 불렀을 정도지. 전설이 된 명아부 가운데 이런 것도 있지. “당신보다 당신에게 기어가는 길이 더 좋습니다. 길 끝에 당신이 있으니까요.” 이 아부를 목격한 제자들은 오삼계님을 아부의 신, 줄여서 ‘아신’(阿神)이라고 불렀어.
아신의 뒤를 이은 오골계님, 그러니까 자네 조부님은 오삼계님의 유업을 잇는 마지막 제자였어. 상반신을 굽히는 그의 몸놀림은 오삼계님만큼 유연했고, 방향을 가리지 않는 그의 혀놀림은 오삼계님 못지않게 정교했지. 그가 새로 개발한 아부 중에는 ‘당위아부’라는 게 있어. 간혹 아부가 통하지 않는 이들이 있지. 그들은 정신무장이 확고해서 단순한 사탕발림으로는 한계가 있다. 그때 필요한 것은 의미, 그 의미에 기초한 당위를 만들어주는 것이 중요하지. 오골계님은 그것을 당위적인 아부라고 불렀어. “국가를 위해서” “민족을 위해서” “인류 평화를 위해서” 등이 대개 그런 아부들이지. 자네 조부는 이렇게 아부의 새로운 보법을 창시했음에도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어. 당시 일본의 아부 전문가 나카무라 히데요시와 경성에서 커피 한잔을 마셨다는 이유로 친일파로 몰렸기 때문이지.
사람들은 몰랐어. 오골계님이 얼마나 애국적인 아부를 해왔는지를. 그는 “아부를 해도 대국적으로 하라”는 아버지의 유언을 잊지 않았어. 그리하여 그의 장기인 ‘안락한 아부’를 통해 일본 제국주의의 무수한 요인을 살해했지. 이제 자네가 광복절 오찬에 구사할 필살기도 바로 오골계님이 개발한 ‘안락한 아부’일세. 안락한 아부의 강점은 아무런 도구가 필요 없기에 어떤 제재도 먹히지 않는다는 거지. 이처럼 검문검색이 철저한 세상에서는 사제폭탄은커녕 바늘 하나도 가지고 들어갈 수 없잖아. 21세기는 더 이상 안중근 의사의 시대가 아니지 않나. 그러나 안락한 아부는 그저 세 치 혀 하나만으로 그 자리에서 상대를 죽일 수 있어. 필요한 것은 날카로운 단도가 아니라 달콤한 말 한마디니까.
독재자를 만나자마자 연거푸 감언이설(甘言利說)을 퍼붓게. 그러면 저렇게 무시무시한 독재자도 견디지 못하고 물복숭아 처먹듯이 감언이설을 퍼먹을 거야. 첩첩첩첩첩. 그놈의 귓가에 단물이 질질 흐르도록 감언이설을 끼얹는 게 중요하네. 그때 흘린 단물이 나일강까지 흐르도록. 한 10분쯤 감언이설을 듣고 나면 아부 중독 상태에 빠질 거야. 독재자 스스로 감언이설을 찾게 되지. 여봐라, 여기 감언이설 한 사발 대령해라! 이쯤 되면 정신적 당뇨병에 걸린 상태라고 봐야지. 바로 그때 기세를 멈추지 않고, 액상과당 같은 아부를 연거푸 구사해야 하네. 고농축 액상과당 같은 아부에 절여지면, 그 어떤 사람도 정신이 헐레벌떡해지고 말아. 그때부터 놈의 뇌가 천천히 녹을 거야. 이렇게 안락사가 시작된다.
고농축 액상과당 아부라면 어떤 게 있을까요?
면전에서 재림예수라고 불러, 아니면 미륵이나 생불이라고 하든가. 혹시 신장결석이나 담석이 있다고 하면, 꼭 사리라고 불러주고. 최근에 읽은 책 같은 걸 거론하면, 세계적 석학이라고 해줘. 그러면 부화 직후 아무 생각 없는 병아리처럼 멍청해진 끝에 쿵 쓰러질 거야. 그의 뒤통수에는 달콤한 아부로 녹아버린 뇌의 국물이 질질 흐르겠지. 그 국물이 갠지스강까지 흐를 때까지 계속 아부해야 해. 죄의식 같은 건 느끼지 않아도 돼. 어차피 인간은 죽기 마련이고, 아부를 들으며 죽는 것만큼 안락한 것도 드물어. 그래서 오골계님은 아부에 피폭돼 죽는 것을 안락사라고 부르셨지. 안락사에 이르지 않아도 적어도 통치가 불가능한 바보가 될 거야. 독재에 필요한 최소한의 판단력을 결코 회복하지 못할 거야.
독재자를 암살한 뒤 어떻게 빠져나오면 되나요? 뇌수가 녹아 흘러내리는 모습을 본 경호원들이 저를 그냥 두지 않을 텐데요. 도주할 방법 같은 것은 없잖아요. 횡단보도를 건널 때마다 플래시가 반짝이지 않습니까. 우리 동선은 어디서든 다 기록되고 있어요. 이제는 다 신용카드만 받는단 말입니다. 동선을 들키지 않으려 현금만 쓰는 데도 한계가 있어요. 우리 생체정보도 모두 정부가 갖고 있죠. 출입국할 때마다 공항에서 지문을 스캔하지 않습니까. 동사무소에 들어갈 때마다 홍채로 인식하지 않습니까. 정부가 갖고 있지 않은 정보라면, 우리 항문 주름 정도일 겁니다.
음, 살아서 빠져나온다는 보장 자체가 없어. 뇌수가 흘러 바닥이 흥건해지면 경호원들이 현장 통제를 시작할 테니까. 그 전에 빠져나올 수 있다면 다행이지만, 붙잡히면 경호원에게도 향정신성 아부를 구사하게. “보기 드물게 훌륭한 경호원이시네요.” 그런 정도로는 상대방의 호감을 살 수는 있어도 죽일 수는 없어. 경호원을 죽이려면 “당신처럼 단단한 몸을 갖고 산다는 것은 어떤 느낌일까요” 정도로 아부해야 해. 그 정도로 달콤하게 아부하면 경호원 뒷목에 뇌수가 흐를 거야.
로봇 경호원에게 붙잡히면 어떻게 하죠?
그때는 별수 없어. ‘안락한 자살’을 시도하게.
자살이요? 어떻게?
‘자뻑’을 하면 된다. “내가 이래 봬도”로 시작하는 자뻑이 효과적이지. “내가 이래 봬도 정말 멋진 암살 전문가야.” “내가 이래 봬도 엄마가 나보고 미남이라고 하셨어.” “내가 이래 봬도 동안이라 아직도 귀여워.” 좀더 확실한 자기 아부로는 자기성찰형 아부가 있지. “귀하게 자란 내가 죽어도 될까.” 이 정도로 셀프 아부를 퍼부으면 더는 버티지 못하고 자네 뇌수도 녹아내리기 시작할 거다. 좀더 빨리 죽고 싶으면, “난 여느 중년 남자들하고 달라. 난 온 세상 사람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는 영포티야!”라고 외쳐. 아니면 “이 구역의 대물(大物)은 나야!”라고 자부하든가. 뒷일은 걱정 말게. 우리 조직은 자네의 희생을 결코 잊지 않을 거야.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한 달에 한 번씩 상상의 여행을 떠납니다.
□ 김영민의 엽편소설 :
https://h21.hani.co.kr/arti/SERIES/33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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